민간인 학살범죄는 시효를 두지 말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글: 주철희 (순천대학 교수, 역사학 박사)

 

전남 광양시 어치고개 주민들, 14연대 '반란군' 이라 부르며 학살현장 얘기 꺼려

얘기하면 아직까지 살아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다시 원수가 되고 척지며 살아야 

다시 찾아가 증언 들으려 했으나 비극역사현장의 주인공들은 이미 고인돼 있어

야만의 민간인 학살 범죄는 반드시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고 시효를 두어서는 안돼

 

▲ 서기1948.10.19. 국군 14연대가 미국군이 세운 이승만 정권의 제주도 자국민학살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에서 봉기했다. 이 과정에서 군과 경찰에게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됐다. 사진은 한 여학생이 봉기군에 협력한 혐의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는 '산동애가'라는 피울음의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14연대 봉기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당할 처지에 있는 오빠를 대신해서 사형 당한 19살 소녀가 끌려가면서 불렀다는 노래다. 총살집행하는 장교가 듣고 기록했다고 한다. 그 오빠마져 북으면 그 집안의 대가 끊긴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청해서 오빠대신 죽었다. 저 군경이 입고있는 군복, 대검, 엠1소총, 철모 등 모두 미국군이 제공한 것이다. 이 무기로 자국 민간인을 학살했다(편집인 주). 사진자료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64년 전의 이야기는 언제나?
-백운산 어치계곡을 따라서-

광양시 진상면 어치계곡에 다녀왔습니다. 지금 백운산 자락은 고로쇠 물 받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대부분 주민은 고령이십니다.

이때가 되면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주말이면 들어와 같이 고로쇠 물을 받는다고 합니다. 노인들은 마을에서 가까운 곳으로, 자식들은 먼 깊은 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한 통에 5만5천이라는 고로쇠 물에 백운산 자락은 바빠지고 있습니다.

광양은 섬진강을 끼고 하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지리산과 함께 빨치산의 근거지였습니다.

진상면 어치계곡은 백운산 억불봉이 위엄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봄소식이 들려오듯이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몇몇 어르신들과 만났습니다. 어떤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이 TV를 시청하고 계셨고, 어떤 마을에서는 화투놀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화투놀이를 하는 할머니들에게 “노름하는 사람들 잡으러 왔다”고 하니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빨리 잡아가시오” 하던 군요. 잡아다가 밥만 먹여 주면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할머니는 “우리 잡아다가 어디에 쓸라고요” 합니다. 그러면서도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뭐 할라 왔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마을의 어르신들을 소개받았습니다.

겨울이면 어르신들은 마을회관(경로당)에 모입니다. 그래서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마을회관입니다.

또한, 이들에게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썩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생각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일상적인 이야기로 어르신들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야 합니다.

또한,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기에 젊은이가 말벗이 되어 주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소소한 이야기로 접근을 시작합니다. “자식은 몇이나 두었습니까?” “이 동네는 몇 가구나 사십니까?” “할머니는 참 곱네요” “두 분만 사세요”

▲ 여수시내 한 길가에 우는 아이들의 아버지로 보이는 시신이 다른 시신과 함께 나뒹굴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인 부모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것을 본 어린아이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고통을 받는다. 이 사진은 이승만 정권의 배후에서 학살을 지배 조종한 미군의 한 기자가 찍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저렇게 정밀하게 촛점을 맞춰 학살현장을 누비며 사진을 찍을 역량이 없었다(편집인 주). 사진자료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이 아니라 14연대 반란사건이라니까?

어제 만나신 어르신 중에 한분의 이야기를 잠깐 하면 이렇습니다. 어치마을에 살고 계신 어르신은 올해 85세(1928생)입니다.

어르신은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건강하셨으며 너무도 또렷하게 64년 전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일명 여순사건(어르신 표현 : 14연대반란사건)과 6.25전쟁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르신은 “14연대반란사건을 교과서에서나 정부에서 여순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실제 옳은 지적입니다. 사건 초기 정부의 발표는 ‘국군 제14연대반란“이었습니다.

1948년에 벌어졌던 상황을 이야기하십니다. 백운산을 타고 저녁이며 나타나는 반란군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6.25전쟁이 나면서 군대에 입대했던 이야기도 뚜렷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사코 말문을 닫습니다. “내 입으로 누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냐고” 합니다. 본인의 입으로 마을 이야기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치마을은 광양시 진상면에서 가장 큰 피해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일명 진상면 모스크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란 좌익활동가가 많았던 지역이나 핵심이 있었던 곳을 지칭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너무도 뚜렷하게 이야기하시면서, 마을에 벌어졌던 일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일과 관련된 후손들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내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마주치는 속에서 1시간 이상을 이렇게 저렇게 말문을 열고자 하였으나 안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안타까웠던지 감을 깎아 줍니다. 그러면서 몇 마디 참견도 하였습니다. 감이 참 맛났습니다.

그분의 기억 속에 1948년의 사건은 매우 잔인했고, 그로 인하여 마을에 피해가 무척이나 컸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가 마을의 안녕이나 혹시 자식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면서도 경찰이나 군인이 참 많이도 죽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건이 소소한 사건이 아닌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그러한 기록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어르신은 강한 의문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의 기록이 어디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잔인하게 민간인을 죽였던 군인이나 경찰은 기록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거의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고령이고 이제 생을 얼마 남겨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64년 전 백운산 자락의 피울음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 피울음소리는 또 어떤 모양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진상면 어치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던 느재마을 입구입니다. 조사일자는 2012년 2월이고 사진은 2011년 11월 촬영했습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아직 여순사건과 관련된 전남동부지역, 넓게는 전남지역의 피해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나 지방정부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부나 지방정부는 손 놓고 있습니다.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등 전남동부지역을 비롯해서 전남지역 전체에 대한 민간인 피해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분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하루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는 좋은 것도 있으며, 가슴 아픈 것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역사는 후대가 판단할 일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전해져야 할 이야기 자체가 지금 막혀 있습니다.

단지 피해조사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건의 맥락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건의 배경은 무엇이고 ‘반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누가 주동자 하는지도 밝혀야 합니다. 분명 국군 제14연대 반란사건은 1948년 여수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에서 빨치산 활동이 있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시대가 아직도 어르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즉, 500년 전 조선의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역사 이야기는 할 수 있어도 한국현대사에 파문을 일으켰던 여순사건에 대해서 침묵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두려워 아직도 금기시해야 하는 역사일까요.

역사는 단지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길입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그저 그렇게 묻혀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말문을 닫아 버리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을까요.
백운산 북성골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에 대략 20명 정도의 민간인이 경찰과 군인에 끌려와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시신을 찾아 나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시신을 찾아 나섰다가 다른 가족까지도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우 떼들이 시신을 갉아 먹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백운산에는 여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64년 동안 자연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의 기억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64년 전의 백운산에 멈춰 있습니다.

이렇게 죽어간 민간인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죽어간 민간인은 왜 죽었을까요. 알고 싶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육신을 여우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는지 꼭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두렵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운산을 넘어가는 석양을 보면 어치를 떠났습니다. 어치계곡은 말라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도 말랐습니다. 그러나 또 어치마을을 찾을 것입니다. 그 어르신의 대문을 나서면서 어르신에게 말했습니다.

“어르신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꼭 해주십시오.” 어르신은 아무 말 없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만 띱니다. 어르신 깊은 폐부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 2012년 2월 13일 글입니다.
시간이 흘러 좋은 세상이 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끔찍한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이들은 그 기억을 망각하고자 합니다. 빨갱이면 죽여도 좋았던 시대를 온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망각이었습니다.

올해 10월 제10회 세계인권도시포럼(개최장소 광주)에서 ‘노인’ 컨셉에서 발제를 맡았습니다. 제목은 ‘여순항쟁 유족의 삶과 기억’이며, 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찾은 글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시 오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갔는데 이미 고인이 되셨습니다. 1948년 여순항쟁과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 특히 유족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망각이고, 둘째 자포자기입니다. 셋째는 자발적인 복종입니다.

발표 후에 발제문도 공유하겠습니다.

▲ 이 책은 여순민간인 학살을 현장 조사와 당시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잔인무도한 여순학살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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