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중화패권주의가 낳은 동북공정...
중국의 끝없는 영토야욕,
결국 스스로 파멸 자초할 것...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을 알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표지다. 현재 중국은 공식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고 있다. 진제국의 영토가 한반도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중국이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태강지리지』‧『진서지리지』‧『통전』의 관련기록을 검토하여 중국측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역사왜곡인지 살펴보고, 진나라 만리장성 동단의 올바른 위치를 밝히려고 한다. 글이 다소 길어서 5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2. 본 글
(1)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 검토
A-1 :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사기색은』
위의 『태강지리지』(사료 A-1) 기록은 고조선의 강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전하고 있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중심지에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이다. 낙랑군은 이때 설치된 뒤로, 후한과 위‧오‧ 촉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에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2) 때인 서기 313년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회복한 이후로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은 요서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태강지리지』는 서진의 초대황제인 무황제 태강(太康, 280~290) 년간에 편찬된 지리서로, 한나라 낙랑군이 요서로 이동하는 서기 313년 보다 30여 년 전에 편찬된 책이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기록은 본래의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역사기록이다. 그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었고, 그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은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는 말과 같다. 모든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산천이야 어찌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갈석산을 찾을 수 있다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와 만리장성의 동단 및 고조선의 중심지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이 전해진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기록은 아래의『서경』에 나오는 갈석산을 설명하면서 전해진 것이다.
B-1 :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서경』‘하서 우공 제10장, 11장’
사료 B-1은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일대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B.C. 2070? – 1600?) 우임금 시절에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우공갈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료 B-1은 『사기』‘하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 ‘우공갈석’에 대하여 『사기색은』은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B-2 :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 「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사기색은』
사료 B-2에서 보는바와 같이『태강지리지』(사료 A-1)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구절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는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황하하류 해변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료 B-2에서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는 갈석산이 ‘우공갈석’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먼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던 ‘우공갈석’이 오늘날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 확인한 후, 그곳에 낙랑군 수성현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황하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우공갈석’의 위치를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서경』에 나온다.
B-3 : “견산에서 물을 인도하여 기산을 거치고 형산에 이르며, 황하를 넘어 호구와 뇌수로부터 태악에 이르며, 저주와 석성으로부터 왕옥에 이르며, 태행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導岍及岐 至于荊山 逾于河 壺口雷首 至于太岳 底柱析城 至于王屋 太行恒山 至于碣石 入于海).” 『서경』 ‘하서 우공 제84장’
위의 사료 B-3는 하나라 우임금이 산맥을 따라 황하를 치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견산岍山에서 시작하여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태행산과 항산을 거쳐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서기 1209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고지도인 <그림 3>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푸른색으로 표시한 것은 황하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며, 우임금이 황하를 치수하면서 거쳐 간 산맥들의 지명을 각각 한글로 표시하였다.
위의 사료 B-3의 내용은 『사기』 ‘하본기’와 『한서』 ‘지리지’에도 각각 실려 있는데, 갈석산에 이르기 직전의 산인 태행산과 항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B-4 : “공안국이 말하기를 ‘이 두 산은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에 접하여 창해로 들어간다.’ 하였다(孔安國曰:「此二山連延,東北接碣石,而入于滄海」).” 『사기집해』
B-5 :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 서북쪽에 있다. 상산은 항산으로 상산군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太行山在河內山陽縣西北. 常山,恆山是也,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 『사기색은』
B-6 : “안사고가 말하기를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의 서북쪽에 있다. 항산은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두 산이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과 접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師古曰:「太行山在河內山陽西北. 恆山在上曲陽西北. 言二山連延, 東北接碣石而入于海).” 『한서』 ‘지리지’
위의 사료 B-4와 B-6에 의하면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항산의 위치를 찾으면 갈석산의 위치는 저절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오늘날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항산(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백석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110개에 이르고, 해발 2,000M 이상인 봉우리도 5개나 되는 웅장한 산인데, 해변가에 위치한 좁은 의미로의 갈석산은 백석산의 동쪽 지맥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을 가리킨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을 현 중국 산서성 혼원현에 위치한 현무산을 항산恒山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청나라 순치 17년(1660)에 항산의 명칭이 대무산大茂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그림 4> 참조)
그리고 이 갈석산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중국 고지도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그림 5>의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이다. 이 지도는 이름 그대로 기주冀州에 있었던 갈석산을 중심으로 주변을 흐르는 강과 연나라 5군인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연나라 5군의 위치가 표시된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고지도이다. 참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로 향하는 보물섬 지도라 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들이 가득 담긴 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하여 고대의 요수가 현 중국 북경시 동쪽을 흐르는 조백신하이며, 요서지역이 현 중국 북경지역이며, 고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도에는 다음과 같이 갈석산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도 기록되어 있다.
B-7 :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사료 B-7에 의하면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등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역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갈석산은 거마하의 하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 분명하다. 참고로『기주협우갈석도』는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같아진다.
이와 같이 ‘우공갈석’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5대 명산 중의 북악北岳인 항산과 동북쪽으로 접하여 있으므로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 중국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갈석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사실인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수면의 높이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과학적으로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602년 이전의 고대 황하는 그 하류의 흐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흘렀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아서 보정시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위의 <그림 6> ‘황하 및 해안선의 변천도’는 워싱턴대학의 Tristram R Kidder와 런던대학의 Yijie Zhuang이 황하의 변천에 대하여 공동 연구한 논문에서 참조하였다. 푸른색 굵은 선이 하나라 우임금 시대의 황하 흐름과 해안선을 나타낸 것이며, ‘우공갈석’인 낭아산의 위치는 필자가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우공갈석’인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정확하게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다(3회에 계속).
글 : 김봉렬('고조선으로 가는길' 저자, 도서출판 '마고문화'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