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유신세력이 사라지고 에도막부세력이 부활하면 한일관계는 좋아질 것이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명치유신세력의 조상 야마구치현 세력이 정권 잡으면 전쟁

에도막부세력이 정권 잡으면 조일 간에 평화와 선린우호 시대

왜구침탈도 없었고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양국이 사이좋게 지냄

 

 

▲도구카와이에야스(덕德川家康).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마구치현 세력을 타도하고 동경을 중심으로 에도막부를 세웠다. 250년간 지속되면서 조선과는 선린우호의 평화시대를 추구했다.

<오사카의 여인> 여섯번째 이야기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 막부)

일찍이 에도막부는 조선과 선린외교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랫동안 동아시아에 창궐하였던 왜구의 침입은 에도막부에 와서는 일체 근절됐다.

또 막부는 대외적으로는 250년 간의 대평화시대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다.

임진왜란 후 에도막부(江戶幕府)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침략이 다시 있을 것인가 아닌가를 항상 촉각을 세웠다.

에도막부가 침략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적정(敵情)의 탐색이란 임무를 그치고 순수한 문화의 전도사로 탈바꿈하였다.

이때 통신사의 규모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컸으며, 에도막부 쇼군(막부의 실권자, 征夷大將軍의 줄인 말)들이 여기에 들인 비용도 국가 재정에 맞먹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통신사도 선진문화의 전수라는 국가적인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통신사는 에도막부 쇼군의 취임 때마다 파견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인원은 대략 4~500여 명이었다. 통상 통신사의 왕복 행정은 거의 1년에 이르렀으며, 일본측에서는 접대인원이 3000여 명 전후로 막대한 경비를 들여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오랜 기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 1467~1573)를 거치면서 황폐해진 일본에 조선통신사가 방문한 일은 일본을 문화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사건이다.

에도막부(江戶幕府)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동경하고 수용하였던 것은 훌륭한 정책이었으며,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매년1년치의 막부(幕府) 예산에 맞먹거나 육박하는 거금을 들여 국가적인 차원의 사업으로 조선통신사를 초빙한 것이다.

▲ 피렌체에 초빙된 700인의 그리스 학자와 예술가. 코시모 디 메디치(Cosimo di Medici)는 그리스 문화사절단을 피렌체로 초청하여 고대 그리스문화를 도입함으로서 르네상스를 열었다.

이것은 1439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지도자인 '코스모 디 메디치(Cosimo di Medici)'가 700명의 그리스 문화예술인들을 피렌체에 초빙하여 서유럽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사건에 비견되며 인류사에 빛나는 일로 칭송되어야 마땅하다.

에도시대의 중기에 이르면서 일본은 기존의 포르투갈 외에 네델란드 등으로부터도 서양문물을 수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문화적인 우위는 사라졌다.

이러한 일로 일본으로부터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우는 점차로 낮아지게 되었다.

통신사가 쇼군의 취임 때 파견되어 축하ㆍ조공사절로 왜곡되고 있음에도 조선에서는 이것도 모르고 통신사를 파견했다라든가, 조선의 국력이 딸리는데도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 줌으로서 자신의 주제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이다.

또 조선통신사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지방의 번주(藩主, 다이묘)들에게 부담시킴으로써 막부(幕府)가 그들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는 주장도 사실일 것이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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