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매금으로 환단고기 위서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신라 김씨왕조의 왕호 매금으로 신라역사 지평 넓혀

신라의 왕호 매금은 모용선비 출신임을 말해주는 징표

비석에서만 나오는 ‘매금’은 「환단고기」의 사실성 증명해

 

▲울진 봉평비에 나오는 매금

매금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 신라의 왕호(王號)이다. 한자는 ‘寐錦’을 쓴다. 뜻을 헤아려보면 ‘비단을 걸치고 잠을 자는 존귀한 사람’ 정도로 이해된다.

그런데 정작 매금 왕호는 문헌기록이 아닌 비문기록에만 나온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일본서기」도 딱 한 번씩 매금을 언급한다.

대략 매금 왕호의 사용시기는 마립간시대와 겹친다. 그런 까닭으로 매금 왕호를 마립간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마립간 이전의 사용한 이사금 왕호와 연결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왕호 이사금과 마립간의 이해

신라 왕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등으로 변천한다.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은 신라 초기 왕호로 시조 박혁거세와 남해왕(2대)이 각각 사용한 제정일치 정치체제를 반영한 왕호이다.

이사금(尼師今)은 유리왕(3대)부터 흘해왕(16대)까지 대략 330여 년간(22년~356년) 14명(미추왕 포함)의 박씨와 석씨 두 왕조가 사용한 왕호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김대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사금은 ‘치리(齒理)’의 뜻으로 이빨(齒)이 많은 사람 즉 연장자(*지혜로운 사람)에서 유래한다.(#1)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한다.

마립간(麻立干)은 내물왕(17대)부터 소지왕(21대)까지 대략 150여 년간(356년~500년) 5명의 김씨왕조가 사용한 왕호이다.

역시 「삼국사기」에 실린 김대문의 설명에 따르면 마립간은 말뚝(橛)의 방언으로 신하의 자리보다 높은 왕의 자리(諴操)를 나타내는 위계의 표식이다.(#2)

다만 마립간 왕호는 대륙(중국)사서나 일본사서 등에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 오직 우리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신라사초」(남당필사본) 역시 마립간 왕호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마립간 왕호의 실제 사용여부는 다소 불투명하다.

후대에 역사기록을 재정리하며 마립간 왕호를 제정하여 사서에 남겼을 개연성 또한 존재한다.

▲ 신라 마립간시대의 왕호 표기 [출처 : 필자 제공]

 

매금은 내물왕계 출자를 밝힌 왕호

매금은 김씨왕조 마립간시대를 대표하는 왕호이다. 매금의 단서는 대륙사서 「통전」<신라전>에 나온다.

김씨왕조 실질시조인 내물왕의 실명(實名)이 ‘모루한(慕樓寒)’이다.(#3) 성씨 모(慕)는 대륙 동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한 갈래인 모용(慕容)씨를 말한다. 이는 내물왕 출신이 모용선비(慕容鲜卑)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4세기 중엽인 342년 모용선비의 후연(後燕) 모용황이 고구려 고국원왕(16대)을 공격하여 수도 환도성을 유린하고 미천왕(15대)의 시신을 탈취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남녀 5만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승리한 모용선비의 한 일파가 신라로 내려와 석씨왕조(흘해왕)를 무너뜨리고 신라 왕실을 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내물왕계열이다.

이들은 이전 북방 유목민족 오환족(烏丸族)의 한 갈래가 신라로 내려와 김씨 성의 미추왕(13대)으로 재탄생하였듯이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까닭에 자연스레 본래 성씨인 모(모용)씨를 버리고 김씨 성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매금은 내물왕계열이 모용선비 출신임을 나타내는 왕호이다. ‘모(慕)씨 이사금’을 축약한 말이다. ‘모+이사금’→‘모+니금’→‘마이금’→‘매금’의 음운 변화를 거쳐 ‘寐錦’으로 음차한다.

특히 「일본서기」는 내물왕을 ‘파사매금(波沙寐錦)’으로 적는다.(#4) 파사(波沙)는 박씨왕조의 파사왕(5대)이 아니다. 파사는 서역을 가리킨다.

내물왕은 서역출신의 매금(모씨 이사금)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고구려 장수왕 기록에 신라왕을 매금,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름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준다.(#5)

▲미즈타니 데이지로오의 탁본 석문

비문기록의 매금 검토

매금을 기록한 비문은 《충주고구려비》(397년), 《광개토왕릉비》(414년), 《울진봉평비》(526년), 《지증대사적조탑비》(924년) 등이다.

① 《충주고구려비》의 기록은 ‘신라매금(新羅寐錦)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다.(#5)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시기에 대해 기존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비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永樂七年(397년)’이 새로이 확인되어 광개토왕이 영락6년(396년)에 한반도 서남부 지방인 충청도를 정벌하고 귀국길에 세운 비로 추정된다. 동이는 신라를 가리킨다.

②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은 ‘신라매금(新羅寐錦)’이다.(#6) 영락10년(400년) 신라 내물왕이 한반도 왜(부여백제)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지원을 요청한 내용에 나온다.

특히 《충주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 둘 다 ‘신라매금’을 쓴 점으로 보아 당시 내물왕은 매금 왕호를 썼다고 볼 수 있다.

③ 《울진봉평비》의 기록은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다.(#7) 《울진봉평비》는 신라 법흥왕(23대) 때인 526년에 세워진 비이다. 모즉지(牟卽智)는 법흥왕의 이름 모진(慕秦)을 음차한 별칭이다.(#3)

특히 법흥왕은 마립간이 아닌 왕의 칭호를 사용한 왕이다. 이는 내물왕계열이 왕의 칭호와 함께 매금 왕호도 지속적으로 사용한 사실을 부연한다. 매금왕이 신라왕의 고유칭호가 된 경우이다.

④ 《지증대사적조탑비》의 기록은 ‘매금지존(寐錦之尊)’이다. 《지증대사적조탑비》(문경 봉암사)는 통일신라 진성여왕(51대) 때인 893년 최치원이 지증대사의 도현을 현창하기 위해 찬술한 비이다. 현재 전하는 비는 924년(경애왕)에 세워진 비이다. 최치원이 사용한 ‘매금지존’은 매금을 높여 부른 말로 이해된다.

정리하면 신라의 매금 왕호는 김씨왕조 내물왕계열을 표식화한 특별 왕호이다. 이전 박씨, 석씨왕조와의 차별화를 꾀하면서도 두 왕조를 계승한 사실을 애써 강조한 김씨왕조의 고유 왕호이다.

 

▲ 역사작가이며 실증 역사저술가이기도 한 정재수 작가.

【참고문헌】

#1. 「삼국사기」<유리이사금>. ‘김대문이 이르길 “이사금은 방언이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 말했다. 그러나 후에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여 세 성씨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사금이라 불렀다.” 하였다.(金大問則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2. 「삼국사기」<눌지마립간>. ’김대문이 이르길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諴操)를 뜻하는데 그것은 위계(位階)를 정하여 둔다는 것이니 왕궐이 주가 되고 신궐이 그 아래에 있음으로 임금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金大問云 麻立者 方言 謂橛也 橛謂諴操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3. 「통전」<신라전>. ‘부견(苻堅-전진) 때 그 나라 왕 루한(樓寒)이 보낸 사신 위두가 조공하였다. 부견이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물으니 위두가 답하길 “또한 중국과 같은 경우입니다. 시대가 바뀌어 명칭과 이름을 고쳤으니 어찌 예전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양무제(梁武帝) 보통2년(521년)에 왕의 성은 모(慕)요 이름은 진(秦)인데 처음 백제 사신을 따라 방물(方物)을 바쳤다.(苻堅時 其王樓寒遣使衛頭朝貢 堅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 何也”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梁武帝普通二年 王姓慕名秦 始使人隨百濟獻方物)

#4. 「일본서기」<신공기>.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이 곧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미사흔)를 인질로 하였으니, 금은(金銀) · 채색(彩色) · 능라(綾羅) · 겸견(縑絹) 등을 80척의 배에 싣고 관군을 뒤따르게 하였다.(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5.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서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에 대하여 약정하였다. (又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于 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5. 《충주고구려비》. ‘5월 중에 고려태왕(광개토왕)이 조왕(祖王)이 령(한 대로) 신라매금(新羅寐錦)과 세세토록 형제처럼 상하가 서로 화목하기를 원하여 하늘에 맹세함을 지키고자 동쪽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 공(共),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多亏桓奴), 주부 귀도(貴道)가……궤영(跪營)에 이르러 태자 공이 말하여 위로 향하여 (태왕을) 함께 뵈니 (태왕이) 태곽추(太霍鄒)를 내렸으며 교하여 동이매금(東夷寐錦)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다.(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奴主簿貴德細類▨安聰▨去▨▨到至跪營天太子共語向▨上共看節賜太霍鄒敎食在東夷寐錦之衣服)’

#6. 《광개토왕릉비》. ’옛적에는 신라매금(新羅寐錦)이 몸소 나라의 일을 (고구려와) 논하지 않았으나, …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광개토왕)이 …하여 (신라) 매금(寐錦)이…복구(僕勾)…조공(朝貢)하였다.(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7. 《울진봉평비》. ’훼부(喙部)의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법흥왕) … 등이 교한 일이다.(喙部牟即智寐錦王 … 等所敎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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