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서 미군의 만행을 조명하여 전쟁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글: 정대화( 전 하버드大국제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천석군의 우리 집안을 파탄 낸 일본제국주의

일제에 재산 강탈당한 부친은 화병으로 숨져

내 고향 사천에 내려온 인민군 군관의 다정함

뒤에 들어온 국군의 폭력과 미군의 부녀자강간

 

▲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조선땅을 초토화 시켰다. 남과 북 할 것없이 2차대전후 남은 폭탄을 다 쏟아 부었다. 6.25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경제가 활황을 띠었고, 패망한 일본이 부활했다. 유럽도 경제가 재건됐다. 전쟁전에 과잉생산된 전쟁물자를 처리하고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사진은 서기1951.05.10. 북한 학천에 반인륜적 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퍼 붓는 모습. 초가집과 기와집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 순식간에 초토화 됐다(편집자 주).

전쟁과 나!

6.25의 기억

나의 이야기는 해방 전인 1944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해방 전의 기억은 나의 고향인 경남 사천의 비포장 국도위로 삼천포 항에서 내린 일본군들이 만주로 가느라고 밤 내 마차를 끌고 이동하는 기억이다.

그리고 해방 1년 전에는 일본 놈들은 사천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땅이 필요했다. 나의 아버님은 큰 아버님과 함께 처음에는 진주-사천-삼천포 간 행상을 하다가 돈을 벌어 건재상을 하며, 재제소를 운영하며 땅을 많이 사들인 줄로 안다.

지인에 의하면 아버님은 소위 “천석”군 정도를 하여 사천사람은 우리 땅을 밟아야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일본 헌병 장교들이 사천비행장 부지에 잘 마련된 선산을 옮기라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 아버님을 설득을 하다가, 하루는 권총을 들이대며 1주일 안에 옮기라고 강요했다고 나의 누님은 말했다. 아버님은 선산을 많은 비석을 세우시고 아주 아름답게 꾸며 놓으셨든 것이다.

결국 아버님은 사천비행장을 만들 땅도 차압을 당하고 선산을 약 10리 밖으로 옮기셔야 했다. 유교 사상에 의하면, 우리의 가문이 망하게 된 것이다. 아버님은 선산이장 1주일 후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나의 나이가 5살이였다.

홀로되신 어머님은 자식 5을 데리시고 소위 명주를 짜는 직조공장을 운영하셨는데....수동으로 하시든 것을 전동으로 교체하려고 모타 10개 정도를 사 놓았는데 아버님 돌아가신 6년 후인 1950년에 전쟁이 터졌다. 이때 나는 11살이였다. 어머님은 5 아이들을 대리고 선산을 이장한 사천의 구암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하셨다.

▲ b-52 폭격기로 폭탄을 퍼붓고 있는 미군. 조선 땅 전역을 파괴했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파괴한 것이 객관적 사실임에도 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세주로 각인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토를 완전파괴하여 석기시대로 돌렸지만, 전후복구지원 및 전쟁구호물자 지원 등으로 미국은 더욱 은인의 나라로 새겨졌다(편집자 주). 

본론: 1950년 6.25의 기억

1. 평화로운 인민군의 진입, 2. 폭력적인 국군의 진입, 3. 첫날부터 강간을 시작한 미군의 진입!

1. 평화로운 인민군의 진입

우리가 피난을 간 구암이라는 동네는 사천읍에서 약 10리 떨어진 곳으로 아마 약 100여명이 거주한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방 두칸짜리 초가집을 얻어 피난살이를 했는데, 큰방에는 20대의 과부가 살고, 우리는 작은방을 빌려 살았다.

1950년 여름인가 인민군이 동네에 진주하여, 우리집의 큰 방에 있든 젊은 새댁은 아마 친정으로 가고 그 방에는 인민군 장교 한 명이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마 어머님이 그에게 밥을 해 주고 우리도 약간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가끔 식 젊은 위생병이 들락 그렸고, 그 젊은 위생병은 우리 어머님을 자기 어머님처럼 좋아했다.

마을에서는 가끔 저녁에 동내 사람들이 인민군 군가(장백산 줄기줄기 피 흘린 자국....)를 배우고 동네는 아무일 없이 아주 조용하게 세월은 흘러갔다.

나는 가끔 산에가서 나무를 베어 오기도 하며, 인민군 장교와 친해졌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8로군 출신인지 아주 점잖하고 나에게 다발총 분해 방법을 가르쳐 줄 정도였다.

아마 이때가 부산에 미군이 상륙하기 전으로, 약 3개월인가 아주 조용하게 흘러갔다. 장마가 시작되어 매일 같이 비가 왔고 그 이후에는 부산지역에 인민군과 국군/미군이 전투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

런데 어느날 갑자기 인민군들이 마을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아마 인천상륙 전 철수시기 였을 것이다. 인민군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용히 철수를 했으며 마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서기 1950.09.30. 미공군이 폭격을 한 뒤의 대전시 모습. 말 그대로 초토화 시켰음을 알수 있다(편집자 주).

2. 폭력적인 국군의 진입

갑자기 마을이 동요를 시작하고 어머님과 우리도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여름인데도 우리는 옷을 겹겹이 껴 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이 때 과거 일본군 출신인 마을의 우리 집안 친구되는 어른이 진입하는 군은 민간인을 해 기치지 않으니 그대로 있으라고 어머님에게 말하여 우리는 평시 옷으로 갈아입었다. 국군과 미군이 진입을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환영하러 길가로 나갔다.

그런데 이때에 일이 생겼다. 우리는 길가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진입하는 국군 자동차를 보고 환영을 하였다. 그런데 한 국군 장교가 내려 우리형에게 무슨 말을 하드니 우리형을 내려 치는 것이였다.

듣고 보니...인민군이 어디로 갔는지를 물은 모양인데, 우리형이 알 리가 없었다. 마을에 국군이 들어오자 마자 마을은 공포 분위기에 싸였다.

국군장교가 마을에서 공포를 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든 것이다. 하기야 지리산 "공비"토벌에서나, 제주 4.3사건을 보면 재워주고, 밥해주면 국군에게 맞아 죽었으니까(자기들이 들어왔지, 우리가 재워준 것은 아니지만....).

▲서기1950.08. 미군이 비-52 폭격기로 폭격한 뒤의 원산시 모습. 원산시 95%가 폭파됐다. 미국은 전쟁군수경제체제라서 끊임없이 무기를 생산하고 소비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 무기소비시장의 황금어장이다. 한국은 지금도 전쟁중이다. 휴전상태가 70년이 가까이 됐을뿐이다. 미국은 남북한이 끊임없이 분단상태와 긴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무기를 팔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전쟁을 유도하여 무기를 소비하고자 하나 한국내 진출 미 기업과 전쟁이 아닌 긴장으로 더 많은 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전쟁까지는 안 가고 있는 상태다. 또 북한의 핵이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못하게 누르고 있다(편집자 주). 

3. 첫날부터 강간을 시작한 미군의 진입

그날 밤 우리는 잠을 자고 있는데, 이제 친정에서 돌아온 새댁의 방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마치 칼에 맞은 사람이 지르는 비명 같았다.

우리는 공포에 질려 옆방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누가 우리방의 문을 열드니 푸라시(손전등)으로 방을 비치며 천장과 벽을 비치드니 아이들이 빼곡하게 누워 있으니 문을 닫아 버렸다.

11살 어린 나이에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어 바깥을 내다보니 보름 달빛아래 사릿문으로 나가는 철모 4-5-6개가 보였다.

그들이 앞 방문을 열자 놀란 새댁은 뒷문을 차고나가 담을 넘어 도망을 쳤다. 키가 아주 작아 약 4척이나 될까 말까하는 가냘픈 여인이 어떤 위력으로 담을 넘고 도주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 밤 동네에는 난리가 났다. 여러 집에서 겁탈이나 비슷한 일이 일어난 모양이였다. 따라서 다음날에는 여러 칸이 있는 부잣집에 동네 여인들을 모아놓고 헌병이 보초를 서야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동네 구암에서 국군과 미군이 진입한 첫날과 그 직후 기억의 전부이다.

미군과 국군은 얼마되지않아 마을에서 철수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인민군이 후퇴를 하고 곧 인천상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빠진 이야기는 국군과 미군의 우리마을 진입 이전에 사천에 미군 폭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천을 떠나기 전에는 밤내내 미군 비행기가 끝없이 하늘을 도는 소리가 나서 밤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

만주로 가든 일본군 행군의 기억과 6.25전쟁이 시작한 이 후에는 밤내 하늘을 떠 돌든 미군 비행기의 굉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폐허간 된 평양시를 돌아보는 부상당한 손자를 업고있는 할머니. 평양은 북조선 중심지이고 전쟁지휘부가 있던 곳이라 특히 미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다. 평양은 풀포기 하나 없을 정도로 초토화를 면지 못했다(편집자 주).

우리가 구암에서 피난을 할 때 우리는 점심을 싸가지고 마을 높은 곳에있는 절 혹은, 아주 큰 선황당(?) 같은 곳에 가서 피난을 했다. 처음에는 폭격이 무서워서 길 밑의 콩크리트 동굴에서 피난을 하다가, 다음에는 선황당 같은 큰 건물 마루에서 사천을 내려다 보며 미국비행기의 폭격을 구경했다.

미군 제트기들이 사천을 돌다가는 순서대로 급 강하하여 폭격을 하고는 선희하여 올라와서는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당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그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은 그것이 군사 목표였는지는 몰라도, 그 주변의 민가까지 폭격을 하였다. 갈퉁교수는 미군이 유럽에서도 민가에 폭격을 했다고 했다.

매일 사천에서 폭격이 끝나면 우리 식구들은 행여나 우리집이 폭격을 맞았을까 걱정이되어 오후늦게 사천으로 걸어가 보면 집은 아직은 남아있었고 우리들은 옷가지나 약간의 물건을 챙겨 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가보니, 우리 집 뒤 아주 가난했든 나의 동창 초가집 마당에 폭탄이 떨어져 앞에 있든 기와집인 우리 집은 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사천읍으로 돌아왔으나 거처할 집이 없었다. 우선 임시로 가 건물을 만들고 우리는 어려운 피난 후 살이를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먹을 것이 없어....천석군의 마누라였든 어머님은 동네 동생같은 여인과 같이 삼천포에서 올라오는 생선을 받아 장사를 했으나 며칠을 가지 못하였다.

다행이 한국공군이 사천에 진주를 해오고 어머님과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밥을 해 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 총에 맞은 듯한 남편을 안고 공포 속에서 절규하는 아낙네. 길바닥에 보따리와 이불이 있는 것을 보니 피란가다 총격을 받은 듯하다. 서울 시내로 알려 졌다(편집자 주).

이 때 나는 중학생으로, 우리의 비극의 원인을 생각해 보니 미국과 소련이 우리를 분단을 해서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았다.

중학생인 나는 소련에는 못가니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며 사천 미 공군고문단의 장교를 만나 회화를 배웠다.

나는 중학생 때에 미 공군중위 Smith를 알게 되었다. 자주 미군부대로 가서 영어를 배웠는데, 나는 그를 우리집에 저녁초대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마당도 없는 초가집 단간 방에 와서 군화까지 벗고 들어와 나의 저녁초대를 받아준 Smith중위가 너무 고맙다.

아마 나는 쌀밥에, 생선전, 김치와 막걸리를 대접 했을 것이다. 지금생각해도 중학생인 나는 대단한 외교를 하였다고 생각을 한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한국의 우유가 무엇인가 위생상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때 Smith중위가 그 초라한 우리 초가집에 와서 밥을 먹어준 것이 지금생각해도 너무 고맙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대학을 갈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미공군 장교의 소개장을 들고 서울로 올라가, 미 공군 고문단장 숙소에서 자고 먹고 일하며 대학을 다니고 통역관이 되어 대학원을 다니고 영어덕택으로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전 장학금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 미군이 쏜 포탄피가 산 더미처럼 쌓여있다. 저 만큼의 포탄이 우리 산하를 파괴했다(편집자 주).

나의 전쟁의 기억이라해야 별것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해방군이나 조선 인민군은 깨끗했고 장개석군이나 국군은 민폐를 끼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군이라는 놈들은 전쟁 중에 겁탈을 하고 다닐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주의 군대와 자본주의 군대의 차이점이 아닐가 생각이 된다. 보잘것 없는 나의 전쟁의 기억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끝.

 

▲ 6.25한국전쟁 미국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서기1950.09.30.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에 내린 뒤 초토화된 전장지역으로 참모들과 여유롭게 들어오고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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