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인재를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 성공한다.

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교수)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훌륭한 책사가 있어

처음 범증 말대로 유방을 포위하여 다 잡아

유방의 반간계로 범증 내친 항우의 어리석음

 

▲ 항우. 유방의 반간계에 넘어가 책사 범증을 내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자료: 위키피디아.

반간계(反間計)란 적敵의 간첩을 거꾸로 이용하거나 이간질시키는 책략을 말합니다. 즉 적의 첩자를 포섭하여 아군의 첩자로 이용하는 것, 또는 첩자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거짓 정보를 흘려 적에게 속임수를 쓰는 병법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에도 기가막힌 반간계를 쓴 유방의 일화가 나옵니다.

항우에게는 범증(范增)이라는 책사가 있었습니다. 항우는 범증을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한다는 뜻인, 아보(亞父)라고 부를 정도로 따랐습니다. 항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기원전 204년, 형양(滎陽)으로 피신해 있던 유방은 항우에게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식량 보급 문제로 곤궁한 처지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형양을 기준으로 서쪽은 한나라가, 동쪽은 초나라가 차지할 것을 항우에게 제안했습니다. 항우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아직 제나라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증이 이에 반대했습니다. 유방을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나라를 차지하기가 쉬울 때입니다. 지금 이를 버리고 취하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항우는 믿고 따르던 범증의 말을 듣고, 유방의 군대를 포위하였습니다. 유방은 범증 때문에 사지에 몰리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범증만 아니었다면 항우를 구워삶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형양의 포위를 푸는 데 실패한 유방은 진평(陳平)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진평은 유방에게 반간계를 제안합니다.

항왕의 강직한 신하들이라면 아보(亞父, 범증) · 종리말 · 용저 · 주은 등 몇 사람밖에 없습니다.

대왕께서 만약에 금 수 만 근을 내놓으실 수 있다면 이간책으로 군신을 갈라놓아 그 마음을 서로 의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항우의 사신을 맞이할 때 태뢰(太牢)를 준비했습니다. 태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희생犧牲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호화로운 큰 잔치를 뜻합니다.

그런데 유방은 막상 항우의 사신이 오자 놀라는 척 하며 "나는 범증의 사신으로 여겼는데 도리어 항왕의 사신이었구나"라며 상을 물리고, 초라한 식사를 내왔습니다.

돌아온 사신은 이를 항우에게 보고했습니다.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하여 점점 범증의 권력을 빼앗았습니다. 항우의 행동에 범증은 분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이제는 군왕께서 스스로 하십시오. 원컨대 늙은 해골이나마 놓아주시어 평민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범증의 이 말은 심신은 주군에게 바쳤지만 뼈만은 돌려 달라는 뜻으로 늙은 재상이 연로하여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왕에게 사직을 주청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항우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중 등에 악창이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범증이 죽은 후, 유방은 항우를 무찌르고 중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훗날 유방은 자신이 승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장량, 소하, 한신 등 인걸들이 있어서 이들을 쓸 줄 알았으나, 항우 휘하에는 그런 인걸이 범증 한 사람 뿐이었음에도 그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패한 것이다.

항우가 유방의 반간계에 넘어가지 않고 범증을 믿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중국 통일의 공이 항우에게 돌아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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