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는 우리 역사의 머리를 조선총독부 일제식민주의 사관으로 장식했다.

기사수정: 2020.06.06. 21:16

 

이이화 선생,

“환단고기에는 (단군의)역대의 왕 이름과

재위 연대가 적혀 있으나 믿을 것이 못돼,

규원사화는 국수적 분위기 짙게 깔고 있어”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있었다고 하고 낙랑군의 선진문물로 

우리나라 역사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

일제식민통치를 미화, 찬양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닮은 꼴

▲ 고 이이화 선생이 생전에 활동하던 장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을 걸어놓고 있고, 왼쪽에 진보 선각자로 알려진 리영희 선생이 앉아 있다. 자료출처: 한길사

역사를 대중화 시켜 우리역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고 평가 받는 이이화 선생이 지난 3월 세상을 떠났다.

각계각층에서 아쉬움 표하고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행적을 칭송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부터, 정세균 국무총리, 문희상 국회의장,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의 유명인사들이 추모행렬에 함께 했다.

그는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문에 정통하고 진보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도 일생을 바쳤다. 생전에 서울 중구에 전봉준 좌상을 설치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진보사학의 중심지로 평가되는 역사문제연구소를 이끌어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역사문제연구소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추모행렬은 그를 시민사회장으로 크게 기렸다.

그런데 그가 생전에 대중역사저술 활동의 전성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저서에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역사관이 깔려있는 것이 발견되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우리역사를 시작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연속물로 총 24여권을 저술했다. 통사라고 할 수 있다. 책 이름은 큰 제목으로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다. 

제1권 제목은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이다. 우리역사 머리인 셈이다. 이 책에 일제식민주의 역사관인, 정체성론, 타율성론이 깔려있다.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으로 파악되는 낙랑군에서 부터 현도, 진번, 임둔군, 이른바 한사군이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사방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장의 골격을 보면 지난 서기2016년, 2017년에 걸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식민사학 소굴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 의 주장과 쌍둥이 처럼 닮아 있다.

이들은 시민강좌라는 명목으로 당시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과 공모하여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역사관을 시민들에게 주입시켰다. 

우연의 일치인가. 이이화 선생은 창립 초기 부터 역사문제연구소를 이끌었다. 서기2016년 한국고대사학회가 벌인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 전파에 역사문제연구소 발행잡지인 '역사비평'과 연대했다.

역사비평 2016 봄호에 조선일보에서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이름 붙인 기경량, 위가야, 안정준 등을 내세워 식민사관이 옳고 민족사학을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비난 함으로써 결국 단재 신채호 사관이 틀리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후에도 이런 행태는 계속 됐다. 당시 이사장은 서중석 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였다. 이사 명단에 이이화 선생이 등록돼 있다. 

기경량과 안정준은 한국고대사학회 회원이다. 이 무서운 아이들은 이 당시 단재 신채호 사학 저격에 전위대로 나서, 민족사학을 사이비역사학, 유사역사학이라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런한 공을 인정받아서 인지 기경량과 안정준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규대학 교수직을 꿰 찼다.

기경량은 서강대 총장을 지냈고 역사학을 전공한 이종욱 서강대 전 교수가 '식민사학 찌거기'라고 비난한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노태돈 전 교수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안정준은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지낸 연세대 사학과 하일식 교수의 제자다. 그에게서 학위를 받았다. 

이이화 선생은 당시 이사로 있으면서 무서운 아이들이 역사비평에서 단재 신채호 사학인 민족사학을 사이비, 유사역사학이라고 비난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역사비평에는 아예 작정하고 비난하겠다는 의도로 글을 올렸다는 흔적이 보인다. '기획1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 으로 글 제목을 뽑고 있다. 

이이화 선생이 쓴 한국사 1권이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으로 점철된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보여주는 역사비평 글이다. 

▲이이화 선생의 별세를 알리는 언론매체들.

그렇다면 이이화 선생은 그의 책에서 어떻게 일본제국주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펼치고 있을까. 아래는 그의 책에서 직접 발췌한 주장들이다. 그의 주장들에 필요하면 해설을 붙인다.

“오늘날 전해지는 환단고기에는 역대의 왕(단군)이름과 재위 연대가 적혀 있으나 믿을 것이 못된다(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권-우리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한길사, 1999. 149쪽, 이하부터 ‘책’ 이라고 줄여씀).

“환단고기, 단군의 등장에서 마지막 임금까지 고대 조선의 1천년 역사와 역대 왕을 간략하게 적은 책인데 지은이를 알 수 없다. 근세조선 후기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책 149쪽).”

-> 이이화 선생은 위 글에서 '환단고기'가 고대 조선의 1천년 역사를 간략하게 적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근세조선 후기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든던 소리다. 

한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의 역사를 압축해서 전하고 있는 일연의 삼성기(이른바 단군신화)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일연이 몽골침략을 맞아 민족의식을 고취시켜려고 만들어낸 것이라고 퍼뜨린 바 있다. 이이화 선생의 주장은 이 맥락과 같다. 

“규원사화, 단군설화를 역사 사실처럼 엮은 책으로, 조선후기 숙종 때 북애자가 지었다... 단군이 만주일대에서 도읍하여 고대 동양의 지배자로 세계에 군림하였다는 국수적 분위기를 짙게 깔고 있다(책 152쪽).”

-> 식민사학계는 한(환)단고기를 이유립 선생이 창작했다며 위서라고 한다. 규원사화는 내용이 한단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책 종이가 숙종 당시의 것으로 판명돼 위서논란 여지가 사라졌다. 이들이 주장하는 위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며 위서로 몰아간다. 이이화 선생도 이런 행태를 보인다 '국수적 분위기를 짙게 깔고 있다'고 한다. 사실 아닌 역사를 과장, 뻥튀기해 놓은 것이니 믿을게 못된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 이이화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행렬.

“우리의 기록에 환단고기, 규원사화 따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단군을 이은 역대 왕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단군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 있기도 하나 모두 조선 후기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책 152쪽).”

“동이족은 이때(은말주초) 중국의 청동기문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 냈다(책156쪽).”

-> 중국이 청동기 문화를 먼저 시작했고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여 여러가지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는 논리다. 중국 선진문물이 아니면 우리역사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인 정체성론이 어른 거린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남부 시베리아지방에 연원을 두었으며, 그 문화가 요하지역으로 내려와 자체 발전하고 이어 한반도 남부에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책 172쪽).”

->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청동기 역사가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시작됐다는 타율성론이 보인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어디서 전파돼 우리 청동기역사가 진행된 것이 아니다. 

홍산문화지와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검에서 보듯이 청동기 역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고도로 발달돼 있고 시기도 4천년이상으로 올라간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청동기와 고도로 발달된 것이 나왔다는 보고를 본 적이 없다. 

“당시(서기 11세기 주나라) 중국에는 청동기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조선은 신석기문화에서 초기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조선이 중국보다 미개하고 지배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군사력이 보잘 것 없었다(책 188-189쪽 ).”

“두번째 단계는 중국의 전국시대 철기문화가 서기전 3~2세기경에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화폐였던 명도전이 함게 나오는 경우도 있어서 중국 유입을 확인시켜 준다(책 201-201쪽).”

“한무제는 철기문화 보급에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힘입어 한나라의 침략 후 한반도에도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강철 제품이 보편화되었다(책202쪽).”

-> 위 세가지 주장에서도 중국 선진문물 수혈론을 주장하고 있다. 밖에서 들어온 선진문물로 우리역사가 발전하게 됐다는 정체성론 타율성론이 도사리고 있다. 

“그(위만)와 그의 무리는 ‘지금의 압록강’인 패수를 건너 평양으로 진출했다... 준왕은 위만의 기세와 많은 무리들, 그리고 우수한 철제 무기를 보고 힘이 솟아났을 것이다...결국 (위만의) 우수한 철제무기가 준왕과 조선을 끝내 파멸로 몰고간 것이다(책 208~209쪽).”

-> 패수를 압록강이라고 한다. 식민사학 본거지, 서울대 국사학파가 주장하는 것과 똑 같다.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의 대표격인 낙랑군 재평양설을 시작하고 있다. 또 이민족 위만이 우수한 철기를 들여왔다고 한다. 

“비록 한나라는 사군을 설치하여 동쪽(평양 낙랑군을 중심으로 현도, 임둔, 진번을 설치)의 식민지를 만들었으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 조선의 멸망으로 한사군이 등장하고, 북쪽의 부여계통의 나라와 남쪽의 삼한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한국 고대사회는 새로운 정세에 놓이게 되었다(책 260쪽).”

“낙랑군의 위치는 한반도 한복판이었으니 조선을 비롯한 동이의 나라들을 분리시켜서 통치할 수가 있었다(책 263).”

“낙랑군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남쪽의 일부 지방, 임둔군은 강원도지방, 진번군은 황해도지방을 군치의 범위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현도군을 두어 옥저와 예의 땅을 다스리게 하여다(책 264쪽).”

-> 한나라가 설치했다던 낙랑군은 당시 살아있던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조선열전에서 부터 한서, 진서 등 중국 정사에서 현재 중국 하북성 갈석산 인근이라고 한다. 각 군의 속현도 요동에 있었다고 하지 우리나라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한개도 없다. 

이이화 선생은 그의 책에서 중국 정사 1차 사료를 거론하며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낙랑군이 하북성 갈석산 인근에 있었다는 기록은 안보였나 보다. 그럴리가 없다. 그는 한학의 대가라고 할 만큼 한문을 잘 안다. 고의로 지나쳐 버렸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그 뒤 낙랑은 이름 없는 존재로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역사 기록에도 잘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평양은 중국계 유민의 자치도시로 전락하고 있었다...(중국 삼국지)조조가 일으킨 위나라는 중국의 삼국 중에서 영역이 가장 넓었고 또 낙랑군을 관할하는 지금의 북경 일대인 유주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책 273쪽).

“서기311년에 중국에서 큰 세력으로 이름을 떨치며 낙랑군을 관리하던 서진이 흉노족에게 수도 낙양을 내주고 쫓겨났다. 이 무렵 고구려는 아무런 간섭이나 제재도 받지않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낙랑군은 설치된지 4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다가 소멸되어다(책 274쪽). ”

-> 이 주장도 식민사학 소굴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의 주장과 똑 같다. 311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 멸망했다는 주장까지 똑 같다. 낙랑군의 성격이 뭐냐라는 것에도 똑 같다.

또 삼국지 조조의 위나라가 400년 넘게 북한 지역을 차지했다고 한다. 중국땅이었다는 얘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때까지 중국 역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기311년" 낙랑군 멸망 얘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조에 나오는 기사에서 뽑은 것이다. 미천왕조에는 낙랑군이 멸망했다는 기사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침공해서 포로남녀 2천여명만 잡아 왔다고 나온다. 이이화 선생은 사료까지 날조하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펼치고 있다. 또 서기311년이 아니라 서기313년이다. 년도를 틀리게 적은 것은 단순 실수로 보인다.

“낙랑군이 몰고 온 문화 충격, 낙랑군에서 종이로 된 한나라 관리나 망명자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이웃 나라에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 들여 일찍부터 종이 제조와 인쇄술이 발달되었다(책 275쪽).”

“낙랑군은 자국의 선진문화를 전파하여 토착세력에게 일대 문화 충격을 주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낙랑군이 우리 역사 최초의 식민지 수탈기지였다는 관점은 옳지 않다(책 277쪽).”

-> 중국 선진문물 특히 낙랑군이 아니였으면 우리가 종이도 혜택 못누렸을 것이고 생활상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정체성론, 타율성론 되풀이며 낙랑군 시기 덕에 우리역사가  전진,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일제식민통치가 좋았다는 고대판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부여의 인구는 40만명, 뒷날 읍루를 공격해서 차지한 적도 있다. 이렇게 잡으면 지금의 만주 땅 삼분의 이를 거두어들인 것이 된다. 처음에 송화강의 상류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널리 뻗어 나갔다. 8만호를 최소한 가구당 다섯으로 잡는다면 40만 명이 된다(책 286쪽).”

-> 부여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송화강에서 시작됐다고 확정한다. 러시아와 가까운 북만주다. 삼국지나 한서를 보면 부여는 장성(진장성=만리장성) 북쪽에 있다고 분명이 나온다.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갈석산일대에서 장성 동단이 시작한다는 게 중국 사료의 기록이다. 

이이화 선생은 한학의 대가이고 중국 1차사료를 보고 있다고 그의 책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다고 하는 중국 정사 기록도 보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풀다 보니, 이런 기록이 안보였나 보다. 

한 인물이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때 공적과 과오가 있기 마련이다. 이이화 선생은 역사대중화라는 면에서 공적이 지대하다. 반면에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임헌영 선생이 고 이이화 선생에게 바치는 조문. 자료: 역사문제연구소 누리집 발췌.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