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를 위대한 제국으로, 고구려등 우리는 미개한 민족으로 묘사...

김병준 교수, 한국고대사 아닌 중국사 강의하다...

“한나라 무제는 북쪽으로는 흉노를 내쫓고, 남쪽으로는 남월을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서남이를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모든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이렇게 말과 풍습이 크게 다른 광대한 지역을 일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제도와 율령을 적용하였고, 모든 행정은 문서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통치의 기초작업은 지배와 수취의 대상인 호구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고대사시민강좌가 지난 3월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5월 4일, 8회 강좌에서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김병준 교수가 맡았다. 김교수는 '군현의 측면에서 본 한사군'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김교수는 중국 진한대의 목간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평양이 한나라의 직접통치를 받은 곳이라고 했다. 한나라의 군현제는 봉건제와는 달리 한나라가 직접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지배하는 방식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직접지배의 증거로 호구파악을 들었다. 진한대에 중국땅에서 발견되는 목간이 호구와 인구수, 사람의 나이 등이 기록된 일종의 호적이라고 하였다. 호적은 세금을 걷기위한 기초적인 자료라고 하였고, 이 호구수는 리->향->현->군의 단계를 거쳐 파악된다고 하였다. 김교수는 이러한 자료를 가지고 북한 평양에서 발굴되었다는 ‘초원4년호구’낙랑군 목간을 설명해 나갔다. 이 낙랑목간에는 현별 호수와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진한대와는 달리 너무 간략하게 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대륙에서 발견된 진한대의 목간을 가지고 채워 나갔다. 한나라 때 현의 호수는 1만호를 기준으로 편성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규정 즉 법규로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1만호가 안되면 현령이 아닌 현장이 임명된다고 하였다. 한서에 규정된 내용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교수는 평양의 낙랑목간에 나오는 낙랑군 25개현 각각의 인구수가 한나라 현 인구수 규정에 턱없이 부족함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의 한 사례를 들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자가 낙랑군을 통해서 전해졌고 이두의 원조가 우리나라가 아닌, 진나라와 한나라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문자생활이 낙랑군의 자극을 받아 시작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 낙랑군의 덕택이라고 했다. 김교수는 일제시기 나온 봉니 ,와당, 벽돌, 동기 그리고 점제현신사비가 모두 진품임을 전제로 강의를 이어나갔다.

▲ 서울대학, 동양사학과 김병준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다.

김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는 수많은 비판과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 한국 고대사를 강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중국동북공정사관에 입각하여 중국의 한나라 고대사를 풀어 놨다는 것이다. 앞서 기사 첫머리에 직접 인용하였듯이, 철저히 중국인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 왕, 유철이 정복하고 멸망시키고 축출하였다는 흉노 등 주변 민족은 우리의 방계역사라고 할 만큼 문화적, 인류학적, 유전학적으로 너무나 친하다.

또한 김교수는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낙랑군도 철저하게 중국사의 입장에서 풀어 나갔다. 낙랑목간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이 한나라의 영토요, 강역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류사학계가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내세우는 낙랑목간은 오히려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물로 밝혀지고 있다. 김교수가 소개한 대륙의 진한대의 목간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 증거가 한나라의 현(縣) 1만호수 준강제규정과, 낙랑목간에 나오는 모든 현의 호수가 하나도 안 맞는다는 것이다. 25개 현 중에서 한두개가 한나라 규정과 틀리다면 수긍이 갈 수 있으나, 25현 모두 하나도 안 맞는다. 다만 조선현만 9천6백여 호로 나올 뿐이다. 나머지는 수백 호에서 평균 2천여 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목간 형태와 글 배치가 진한대의 것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고 호구수와 관련한 내용자체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즉, 김교수가 소개하는 진한대의 목간 관련 정보와 비료해 볼 때, 평양 정백리에서 발굴되었다는 ‘초원4년호구’낙랑목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위조품임이 완벽하리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관련 기사를 그대로 베껴다가 인구수만 작위적으로 집어넣어 만든 냄새가 너무나 많이 풍기고 있다. 강단주류사학계는 역사학의 한 방법론으로 사료비판을 강조한다. 낙랑목간도 일종의 1차사료에 해당하는데 이것에 대한 진위여부에 대한 비판이, 이것을 활용하기 전에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강단주류사학계는 낙랑군 재평양설에 집착하다보니 이러한 작업을 전혀하지 않고 바로 인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김병준 교수가 제시한, 진한대의 대륙목간, 평양 출토 소위 한나라 '낙랑목간'과 너무나 다르다.

둘째, 김교수는 낙랑군 지배 421년을 언급하면서 고구려가 서기313년 낙랑군이 망할 때 까지 고대국가의 상징으로 알려진 중앙집권체제조차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식민사관의 핵심중의 하나다. 낙랑군이 313년까지 421년간 북한지역을 지배했다는 식민사관을 지키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고 해야한다.

한나라는 이미 서기전 2백년경에 군현제라는 기관을 통해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으나, 우리는 서기 4세기 이후에나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우리역사는 미개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고구려 등이 이미 고대국가에 진입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김교수는 전형적인 일제식민사학자라는 비판이 이어 졌다.

셋째, 김교수는 이두와 관련하여 이두가 진나라, 한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 우리가 처음 발명한 것이 아니라, ‘진한제국’에서 사용된 예를 가져다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학의 전문가들이 밝혀낸 이두 한국기원설을 비전문가인 사학자가 부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넷째, 김교수가 동북공정지도를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진나라, 한나라의 동쪽경계가 우리나라 서북한까지 들어와 있는 중국동북공정지도를 띄워놓고 고구려가 경계선 밖에 있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진나라, 한나라의 국경을 더 위로 확장하여 그려야 한다는 의도를 내 비추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방청객 중의 한사람이 “저것 동북공정지도 잖아요, 똑 바로 하세요” 라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경희대 조인성 교수가 이끄는 주최측에서 질문지를 받았다. 그러나 질문을 왜 받는 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시간이었다. 요식행위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김교수는 질문지에 대한 답변시간에 답변이 아닌, 강의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20여장이나 되는 질문지에 거의 답을 하지 못하고 마쳤다. 김교수에게 불리한 질문은 언급하지 않고 유리한 질문 한두 개를 선택하여 답변시간을 다 채웠다.

이번 강좌에는 지난번보다 인원이 더 줄어들어 있었다. 가지고 간 지난번 강좌에 대한 학문적 비판 인쇄물이 지난번보다 더 남은데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강좌에서도 방청객의 절대다수는 거의 60세이상으로 보였다. 젊은 방청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주최측과 관련된 사람들로 보였다. 이번 강좌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한 몇분이 분을 삭히자면서 막걸리를 같이 마시자고 하였다. “어떻게 저런 매국적 강좌가 가능한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이다, 예전에는 더 심했다”, “방청객의 질문에 대하여 주최측이 성질을 내면서 하는 말이 <강사님은 동양사학을 전공했는데, 고대사를 질문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데 그럼, 고대사 시민강좌를 한다면서 왜 전공과 상관없는 동양사전공자를 데려다가 강의시키냐,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등 수많은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그 중에 어떤 분은 ‘저 사람들 어떻게 처단해야 마땅하겠는가’ 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한편 학문적 비판 인쇄물을 받은 한 분은 인쇄물에 나온 출처를 따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에 와서 양질의 역사기사를 읽고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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