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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학살 조병옥, "방해되면 싹 쓸어 버려"제주43학살자들이 옷만 바꿔입고 지금도 지배세력이 되어 자살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20.04.04 23:51

자주독립국가 뿌리, 인민위원회 미군정이 탄압

1947. 삼일절 시위대 경찰 발포로 사상자 발생

미군정, 발포자 처벌과 사과 무시 정당방위로 두둔

3.10 제주도민 95%가 참여하는 총파업 단행, 저항

일제정책 부활, 5분의 1가격에 강제공출 민심폭발

분단고착, 동족상잔 예고하는 단독선거 반대투쟁

미군정 지휘받는 경찰, 서청의 무자비한 고문, 살해

1948.4.3.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 4.3항쟁 돌입

 

▲ 미국군정부 지휘하에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에 학살된 식구 앞에서 절규하는 민간인. 그 뒤에 미제점령군 한 군인이 싸늘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 제주43학살이 미군의 비호하에 미군이 대준 총과 칼로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1894동학농민봉기 이후 계속되는 외세에 의한 민족사 비극을 웅변하고 있다.

"1947년 하반기 (제주도에) 서청(서북청년단)은 7백명으로 늘었다. 대부분 실업자인데 배후에 조병옥 경무부장이, 정치적 후원자로 이승만이, 정신적, 영적 후원자는 한경직 목사도 있었다. 영락교회 기독교가 있었다. 이것은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강조한다. 좌익을 때려잡기로 먹고 살던 자들이다."

"1948.4.3.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현기영은 '나는 왠지 가슴이 설렜다' 고 했다. 360여명의 무장대는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30여명이 총이나 권총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는 죽창이나.칼을 들었다.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 이렇게 초라한  무기로 맞섰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공격하듯, 통일조국건설을 방해하는 미군정에, 이에 빌 붙은 자들에게 대들었다. 이 갸날픈 30여명의 호소를 미군(울컥)과 이승만은 무장폭동이라고 이름짓고 이후 수년간  백성들을 포함한 수만명을 학살한다."

서기2020.03.28.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 광화문아침에서 통일학당( 학장, 손윤) 강연에서 임태환 목사(신학박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증언한 말이다.

8.15. 해방된 조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인민의 기쁨은 잠시, 피릿내나는 학살과 동족상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미국은 일본압제에 놓여있던 조선을 일본과 같이 적으로 보았다.

항복한 일본의 일부로 보고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맥아더 포고령이 이를 말해 준다. 이에 따라 미군은 자주독립세력의 새나라 건설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주민자치위원회)를 불법단체라며 해체시켰다. 

서기1945.9.8. 미군이 인천으로 들어와 미군정부를 설치하기 전까지  8.15.해방이후 1달도 안되어 인민자치조직이 결성돼 행정과 치안을 이끌어갔다. 

새나라 건설을 위한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일본인과 친일부역자들이 사라진 행정관서와 경찰서를 접수하여 행정과 치안을 완벽하리 만큼 확보했다. 

서기1894년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혁명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를 한 것과 같았다. 중앙정부가 없어도 얼마든지 백성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치민주정치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민위원회의 자치민주정을 점령군 미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세계와의 냉전을 예고하면서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남쪽울 공산세계의 총알받이로 만들어야 했다. 이는 미국제국주의의 이익을 뽑아내는 식민지통치였다. 미국군 정부에게 이땅은 제2차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인민위원회의 자주독립국가세력과 이 민족의 현대사 비극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임태환 목사는 생생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하여 4.3학살 비극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이날 그가 전한 제주4.3 학살과 항쟁의 진상은 이렇다.

제주4.3학살, 항쟁의 시작은 서기1947.3.1. 삼일절 기념식에서 시작됐다. 이날 북 초등학교 제주도민이 3만여명이 모였다.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와 미군정을 설치한 후 1년여 동안 미군정은 실패했다. 이전의 인민위원회가 주민자치를 경험한 도민은 미군정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친일파를 옹호, 친일경찰들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들고 나온 현수막, 푯말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일파쇼분자를 근멸하라는 구호가 써 있었다. 또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서기1919.3.1. 만세독립투쟁의 사실상 부활이었다. 대상이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 인민위원회에 정권 넘기라고 하는데 인민위원회의 정체는 뭔가. 요즘말로는 주민 자치위원회가 될 것이다. 동무=친구, 인민=그냥 백성 의미와 같다. 

1945.8.15. 일본이 항복하자, 제주도에도 부역 친일관리와 경찰들은 관공서와 경찰서에서 도주, 사라져 버렸다.  빈 행정과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됐다. 인민위원회가 다시말해 주민자치위원회가 자발적 조직되었다. 

해방공간의 무주공산에서 정부 행세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구성원은 독립운동세력과 사회명망가 우익인사까지포했다. 제주 인민위원회는 전국에서 가장 길었고 중앙조직과도 거리두었고 가장 독자성이 강했다. 

인민위원회는 70%가 좌익성향이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전국 70% 정도였다. 이는 인민위원회가 인민을 대표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비스한 시기 만들어진 남로당은 민군정에 등록된 합법적인 단체였다. 제주도 미군정장관 베르스 중령이 남로당원은 1947.7. 관공서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좌익은 인민이란 말처럼 좌익에 아직 빨간 딱지 안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9.10에 결성되어 미군 1945. 11. 9. 제주에 진주하기 까지 제주도는 진정한 해방구였다. 외세 도움 없이 자치적 인민위원회구성를 구성하고 있었다.

탐라국 이래 전무 후무한 일이었다. 일본이 항복했지만 소련과 미국은 아직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제주도민은 스스로 지도자를 뽑았고, 좌익도 우익도 차별없이 독립운동가를 주로 뽑되 온건한 친일파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미군이 들어오면서 짧지만 짜릿한 해방구는 끝나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와 김구 임시정부도 인정 안했다. 제주 인민위원회를 처음에는 지원하고 이용했지만 곧 적대시했다

남로당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1947.3.1. 삼일절 기념식에서 인민위원회에 전권을 넘기라는 시위대 요구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하라는 표시였다.

당시 제주도 지배하는 실권자 미군정 장관은 딘 중령이었다. 해방된 나라였는데 서울 중앙청에는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팔랑거렸다. 제주도 군정장관 관청에도 성조기가 걸려 있었고 공용어도 한국어가 아닌 미국어를 강요했다. 일제치하 조선어 말살, 일본어 강제와 다르지 않았다.  

일제치하 경찰이 민군정에서 미군정 경찰로 변신한 것 뿐이었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고문하던 악명 높은 경찰이 또 다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제주도를 떠났던 돌아온 6만여명이 해방 되자 돌아왔다. 이 사람들 특히 높은 사회의식과 반제국주의 의식을 가진 열혈 청년들이었다. 이들을 탄압하는 군정경찰은 또 다른 일제경찰들이었다. 

미국은 또 하나의 일본이었다. 이게 대한히 중요한 말이다.  조선인 차별의 서러움을 경험한 그들에게 미군정은 조선독립으로 가는 길에 고통이었다. 

1946년에는 보리 고무마 생산량이 전년도의 반도 50%도 안되었다. 유입인구가 6만명으로 폭증했는데 식량은 전년대비 반토막이 되었으니 집집마다 끼니를 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배 고른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평온할리 없었다. 

여기에 일본과 교역중단으로 생필품은 부족하고 여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콜레라라는 돌림병까지 만연해 있으니, 민심이 들끓었다. 

미군정 1년여를 경험한 제주도민에게 미군정은 무능한 위정자였다. 1947.3.1. 삼일절에 시위에서 이제 미군정을 끝내라고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제주 북초등학교에 삼일절 기념식에는 3만여명 운집했다. 자주 독립국가를 바라는 시위대로 변했다. 이 때 출동한 경찰 기마대에 어린아이가 채였다. 말발에 차여서 넘어져 다쳤다. 

기마대는 아이를 추수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분노한 군중이 기마대를 따라 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은 자기들을 습격하는 것으로 보고 발포했다. 이 때 6명이 죽고 여섯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발포로 피투성 된 사람들이 엎혀갔고 시위대의 대부분을 차지한 부녀자들과 학생들이 무장경관과 대치했다. 기관총 거치한채 경찰 50여명이 집총자세하고 1시간 가량 대치했다. 제주신보 기자들 설득해 시위대는 자진해산했다. 

제주도 남로당 대책위원회는 채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위한 정당방위 라고 주장했다. 

1947.3.11. 도민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세계적 유래가 없는 총 파업이었다.  민관의 95%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도청, 법원, 검찰 등 관공서, 통신기관, 운수회사, 각급 학교, 상점까지 문닫다. 제주출신 경찰도 66명이 파업동참했다. 166기관 4만 1211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좌우익이 참여했다고 미군정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미군정에 대해 제주도민이 총 궐기한 샘이다. 일심단결하여 미국에 대항한 것이다. 

미 군정은 파업원인을 경찰의 발포로 제주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이 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다. 온건하게 대처했다고 당시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 해임하고 강경론자 베르스 중령을 임명했다. 

▲ 제주4.3봉기 학살진압을 지시 하고자 제주 비행장에 내린 미군정부 수뇌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미군정부 장관 딘 소장, 세번째 부터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제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 감찰청장. 양민 학살 주요 인사들이다. 물론 저 둘 중에는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민정장관 안재홍과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도 있다. 김익렬 연대장은 학살명령에 불복해 봉기 유격대장 김달삼과 평화방법으로 해결하는 협정을 이끌어낸다. 민간학살 방지대책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학살에 나선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을 기용했다. 또 제주도민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학살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기를 든 김익렬 연대장을 좌익빨갱이라고 하여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박경운 제주 도지사를 해임하고 유해진 극우파를 임명했다. 또 조병옥 경무부장을 미군 수송기 편으로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경기경찰, 전남경찰 전부경찰 321명이 함께 들어갔다. 2월 말에는 응원경찰까지 가세해 421명으로 불어났다. 파업했다고 육지의 경찰을 대거 투입해 탄압에 들어간 것이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포고문은 31을 발표하고 파업사건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건국에 저해가 되면 싹 쓸어버려"라고 해, 그의 잔인무도함을 드러냈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악마화하고 붉은 섬으로 규정했다. 제주도민의 자각적인 선진의식을 이념굴레로 씌워 매도했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조병옥의 이 빨갱이 낙인으로 젖먹이도 덮어놓고 꺼려하고 징그러워 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파리목숨만도 못하고 벌래나 다름 없었다. 

제주에 투입된 토벌대가 4.3기간 내내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노인이나 어린이를 죄짓는 마음이 없이 죽일 수 있었다.  조병옥의 빨갱이라는 말이 2020년 오늘까지 장수하면서  정치가들이 휘두르는 뜨거운 낙인이 된다. 

조병옥은 1947. 3. 15일 부터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육지에서 들어온 응원경찰이  마을 마다 돌아다니면서  검거하고 폭력을 일삼았다. 

삼일절 행사를 주도했던 이 지역 지도자들이 속속연행되고 해임된 도지사 박경운, 제주도 산업국장 임관우도 검거됐다. 3일동안 2백여명을 검거했다.  검속강도는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강해지고 4월 말에는 5백여명에 이르렀다. 

청년들 3천명 가량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또는 일본으로 빠져 나갔다. 더러는 한라산 동굴 은신처로 도피했다.

이 길외에 달리 사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본격 4.3학살이 진행되면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될 때 한라산과 둘래 벌판의 눈 속에 6천명 이상이 떨고 있었다. 

파업했다고 경찰서에 끌려간 사람들은 취조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에 주민들이 불법체포와 고문에 분노하고 항의했다. 

1947.3.14. 우도에서 1천여명이 초등학교에 집결하여 경찰 삼일절 발포자와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도 한바퀴를 돌면서 시위 행진을 했다. 

중문리 중문에서도 항의 집회가 열렸다. 지역주민 1천여명의 모였다.  중문리 사무소로 몰려가 삼일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4월 10일 새 도지사로 임명된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서북청년단원 7명을 육지에서 대리고 들어왔다.

유해진은 전북 완주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에도 영국인 가정교사를 두고 기차는 1등이나 침대실을 이용했고 승마를 즐긴 선민사상과 귀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자 마자 관군민을 숙정한다는 명목으로  총 파업에 조금이라고 관련이 있는 사람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파직시켰다. 

빈자리는 주로 이북출신으로 채웠다. 좌익에게는 일체의 집회를 허용하지 않고 우익에게만 허용했다.  좌익과 온건파들은 더욱 좌파로 몰렸다. 탄압으로 지하로 몰려 동조자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국군정부는 유해진의 극우활동을 묵인했다. 유해진의 극우적 행정과 서북청년단을 앞세운 폭정과 폭력은 43봉기의 뿔씨가 됐다. 주민들은 위압적 폭정속에서도 항의집회 계속했다. 

1947.3.14. 우도와 3.17 중문시에 이어  6.6. 에는 종달리 바닷가에서  항의집회가 열렸다.  달빛아래 밤 9시에서 시작했다. 처녀도 상당수 참여했다. 

경찰관이 냄새를 맡고 여러명이 들이 닥쳤다. 부옥만 부산상고 출신 부옥만이 경찰과 다투면서 경찰 포박해 버렸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도망갈 필요없다." 며 당당하게 맞섰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유해진 도지사의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에 맞장을 뜬다.  유해진이 여름께 제주 제일 중학교에 검은안경을 쓰고 무장경관 2인과 함께 담을 넘어들어가 수업중인 교재를 빼앗듯이 낚아 챘다. 교재를 훑어보고 던지듯 돌려주었다. 교육내용에 선동적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러 현장 점검을 나온 것이었다. 

이 같은 짓에 수업중 선생이 "누구냐 당당히 전문으로 들어와서 직원실을 찾을 일이지, 왜, 추잡한 짓을 하느냐" 라고 항의했다. 육척 장신의 도지사는 무장경관의 경호를 믿고 "나는 도지사라"고 거만하게 말했다. 

이에 우하고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이 돌맹이를 던졌다. 당시 교실바닥은 흙바닥이었고 군데 군데 돌맹이가 있었다.  도지사가 물러났다. 학생들은 도지사를 비방하는 삐라를 만들어 뿌리고 다녔다. 

1947년 하반기 제주도 경찰관 고위직은 모두 육지출신 경찰관들이었다. 행정력과 경찰력이 제주도민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구도가 됐다.  이 무렵에는 일단 지서에 끌려가면 매질부터 해대는 것이 상례처럼 됐다. 경찰관의 폭행이 난무했다.

또 하나의 경찰, 서북청년단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3월에 이르러 조천, 모슬포 등지에서 잇달은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문 관습의 결과였다. 

4.3봉기 촉발의 또 하나의 기폭제는 식량 공출이었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의 여파가 제주도에도 불어닥쳤다. 이을 둘러싸고 도민과 관리, 경찰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제주 도지사 유해진의 공명심에서 나온 행정력의 남용과 경찰력 과잉이 합작하여 사태 악화시켰다.  

도민들은 공출에 저항하며 경찰관리와 몸싸움 벌였다. 식량를 뺏기면 굶어죽어야 하기 때문에 싸워야 했다. 

전년에 이어 농사는 흉년이 들었다.  미군정의 미곡정책은 실패였다. 곡물의 자유판매제를 실시하자 쌀값이 수십배로 폭등했다. 서둘러 이를 백지화하고 일제가 행했던 곡물 수집정책 즉 쌀 공출제도를 부활 시켰다. 

당시 제주도는 해외에서 6만명이 들어와 있었고 식량생산량은 전년대비 반토박도 안됐다. 판매가에 5분의 1도 안되는 가격에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관에서 뺏어가겠다고 했다. 하곡수매에 대한 주민들간의 저항이 공감대가 형성됐다. 

부족한 식량을 뺏기면 굶어 죽는는 것이며 목숨이 걸리 일이었다. 곡물수집에 반대하는 삐라가 여기저기 나붙겼다. 

1947. 7월 한림읍 명월리에서 유해진이 후원하는 우익청년단원들이 강압적으로 압박하자 농민들이 몸싸움으로 저항했다. 1947.8.8 동광리에서 몸싸움 벌어졌고 주민들은 수곡수매를 예전처럼 차등 수매하라고 외쳤다.

이때 미군정의 실패를 비판하는 삐라를 붙이던 어린이에게 경찰이 발포 3명이 사망했다. 공출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저항하다 체포되면 일제가 행했던 야만적인 태형을 가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군인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유해진은 공명심에 눈이 멀어 104% 공출량 달성했다. 우익청년단의 도움을 받았다. 

도민들은 제주도 군정장관 베르스 중령이 일제 관리만도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일제보다 더 가혹하게 폭압을 일삼았다는 것을 말한다.  

▲ 임태환 목사가 '제주4.3학살'을 주제로 통일학당 정기강연에서 제주4.3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1947년 하반기 서북청년단은 7백명으로 늘었다. 대부분 실업자였다. 조병욱 경무부장이 배후에 있었고 이승만 정치적 후원자였다. 이들의 정신적, 영적 후원자는 한경직 목사였다. 영락교회 기독교가 있었다. 이것은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강조한다. 좌익 때려잡기로 먹고 살던 자들이다. 

협박 구타가 이들의 주무기였다.  대동청년단원 1천여명, 응원경찰 421명, 서청단원 7백명, 모두2천 1백명으로 우익 폭력세력이 이를 증거한다. 

1948.1.13. 남로당은 미군정청에 합법정당이어서 저항하다 체포된 60여명 당원이 석방됐다. 단순당원은 처벌 불가능했다. 

2월 남한만의 단독선거(단선)가 현실로 다가왔다. 유해진이 속한 민복당도 단선 반대했으나 유해진은 이를 무시하고 단선 찬성했다. 

단선 반대파는 미소확정한 38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 하는 것이고 동족상잔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단선에 반대했다. 

3월에는 청년 3명이 지서에서 고문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천중학교 2년생, 김용철은 조천 지서에, 청년 양은아는 모슬포 지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박형구는 금릉에서 곤봉과 돌로 찍혔고 초 죽음 상태서 끌려가다가 총살 당했다. 

이들은 열렬히 자주독립을 외쳤고 친일파를 성토했다. 양은아는 조국이 분단되기 때문에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양은아의 처, 문옥녀는 세살난 아들을 등에 업고 매일 모슬포 지서를 찾아갔다. 지서 마당에 눌어 앉아 내 남편을 살려내라 고함쳤다. 남편이 했던 것 처럼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번갈아 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경찰은 그녀를 쥐도세도 모르게 죽여 없앴다. 

3월 29일 금릉에서 사복차림의 서북청년단원에게 총살당한 박형구는 몇몇사람을 지칭하면서 '민족을 팔아먹는 민족반역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여명의 서청단이 그를 죽였다.  

삼일절 시위 가담 3만여명, 3.10파업에 가담한 4만여명, 식량공출에 저항한 농민. 단독선거에 반대한 통일운동가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불법, 체포 고문에 항의한 사람들, 삐라를 뿌리거나 연통한 어린이 부녀자들이라 하여 1년동안 2천 2백명을 검거 구속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주도 남로당은 결사항쟁을 결의했다.  '단독선거 단독정부로 통일은 물건너 가는 것이니 5.10단독선거는 막아야 한다' 는 것이 결의 핵심 이유였다.  

통일된 새나라 건국은 절체 절명의 일이었다. 봉기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서 의한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남로당 자체 결의에 의한 것이었다. 

1948.4.3.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현기영은 '나는 왠 가슴이 설랬다'고 했다. 

무장한 360여명의 봉기군이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이중에 30여명이 총이나 권총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는 죽창이나 칼을 들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 이렇게 초라한  무기로 맞섰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공격하듯 통일조국건설을 방해하는 미군정과 이에 빌 붙은 자들에게 대들었다. 

이 갸날픈 30여명의 호소를 미군(울컥)과 이승만은 무장폭동이라고 이름짓고 이후 7년 7개월간 백성들을 포함한 수만명을 학살한다. 

▲한경직 목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 기1984.05.14. 한경직 목사가 청와대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한경직 목사는 자신이 직접 서북청년단을 모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국 개신교 집단은 일제시기에는 친일부역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군 정부와 이승만 정권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최대규모 종교로 교세를 확장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미사대주의 종속종교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필연으로 반민족 부패종교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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