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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사람노릇 할 수 없다'일제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킨 독립투사들을 대우해야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다.
류돈하 객원기자 | 승인 2020.03.23 18:24

 

 

'한일의정서'는 일제가 한국침략을 문서로 공식 인정한 것

러일전쟁에 앞서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 맺어 한국지배권 확보

돈으로 관리 매수, 고종을 협박하여 맺은 한일의정서는 원천 무효

일제침략 신호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저지 시킨 왕산 허위 등 

왕산 허위,

" 원수가 있으되 복수를 아니하면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수 없고, 

국토가 있으되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할수 없다 하였다"

 

▲서기 1904.08.22. 제1차 한일협약을 마치고 이토오히로부미(사진 앞줄 중앙) 등이 한국 관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또오 왼쪽이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관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제는 이 해 2.23. 한일의정서를 채결하여 러일전쟁을 위한 일본군 기지용 토지를 마음대로 수용해서 쓸 수 있게 했다. 

1904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광무8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의 국제정서를 살펴보자면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 이후 남만주를 점령하였다.  

계속 군대를 주둔시켜 남만주를 경영하던 러시아에 맞서 일본은 전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이미 일본은 앞서 1902년 1월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을 일본의 특수 이익지역으로 인정받았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해 청나라와 만주철병조약을 맺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계속 봉천성과 길림성을 차지하였다. 

대한제국(이하 한국으로 약칭)에 대한 야욕을 러시아 역시 가졌기에 1903년 대한제국의 용암포에 포대를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사건은 일본을 자극하게 되어 드디어 개전론을 결정하였거니와 일본의 지배기반 예정지인 한국을 이 전쟁에 끌어들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침입하여 여러 건물들을 점유하였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한국의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임권조(하야시 곤스케)가 마주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동아시의 평화와 조선의 독립 보전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지배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 침략의 완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에 있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2.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한다.
3.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도모한다.
4.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이 위험해질 경우 일본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또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한다.
5.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상호 승인을 거치지 않고 제3국과 협약을 맺을 수 없다.

▲한일의정서. 일제는 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으며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국정부을 강압하여 의정서을 채결케 하여 우리 국토를 러일전쟁 후방기지로 침탈했다.

일본은 이 체결 후 한국을 점령하기 위한 불법적 침략을 합법화한다. 일본은 뒤이어 3개월 후인 5월, 한국 지배를 위한 후속 조치들을 취하였다. 

대한방침, 대한시설강령, 대한시설세목 등 세부 방침의 확정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일본군대의 한국주둔, 정치와 외교의 감독, 철도 부설권까지 장악하였다. 

그 중 대한시설강령에는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을 명시하는 한편 일본인의 이민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장차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구축하기 위함에서였다. 일본은 좀더 노골적으로 대장성 관방장을 지낸 장삼등길랑(나가모리 도키치로)을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정부에 대하여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는 곧 일파만파 알려지게 되어 전 국민이 반대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 중에서 전직 관료와 유생들은 격문과 상소를 통해 일본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황성신문 등의 언론 역시 논설과 기사로서 맹렬히 규탄하였다. 1904년 6월 28일 영남의 선비이자 평리원 판사인 왕산 허위(旺山 許蔿)는 이상천, 박규병, 김연식, 정훈모 등과 함께 '배일의거 통유문(排日義擧 通諭文)'에 서명하였다.

이 배일의거통유문은 왕산이 작성한 것이다.

왕산은 배일의거통유문을 통해 '원수가 있으되 복수를 아니하면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수 없고, 국토가 있으되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할수 없다 하였다.' 라는 매서운 기개를 보여주었다.
왕산은 동지들과 함께 이 통유문을 전국 13도에 발송하였고 나아가 7월 12일을 기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점점 거세지는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일본은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게 된다. 

이것은 비록 잠시이지만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던 왕산 허위와 국민들의 여론 및 적극적인 대응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 낸 하나의 '구국운동'이였다.

류돈하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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