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시작과 끝, 보은 장안리의 동학지상낙원터를 복원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기사수정: 서기2020.02.20. 01:20

 

동학혁명 북접사업회 총회 보은 장안리 사무소에서 열려

보은 장안리 일대 동학 지상낙원 터 알림 그림판 세워

방정환 학교 세워 아이들에 방과 후 무료 공부방 및 쉼터 제공

 

▲ 동학민회 회원들이 조선개국 4353.02.15.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안리 옥녀봉 아래에 동학공동체 조망도를 새긴 안내판을 세우고 기념촬영을 했다.

한 겨울 충북 보은 장안리 들판은 잘 정리된 논으로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는 마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 뒤편에는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옥녀봉이 버티고 있다. 마을 앞에는 포장된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다. 그 옆에는 내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을 산이 둘러싸고 있는 듯하나 수백호가 들어설 정도로 넓은 평지다. 송리산 초등학교까지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떠나 대부분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기 전 7~80년대 마을은 송리산 초등학교에 학생들 수백명이 북적거렸을 것이다. 

이 마을이 한 세기하고 120여년전에는 수만명의 동학도들로 가득찼다. 해월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마공동체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동학도들로 한개의 시를 방불케 할만큼 큰 공동체를 이루어 동학의 도에 따라 생활했다. 

공동체를 다스리는 대도소가 있었고 협의, 회의를 하는 큰 공간 마당이 운동장 처럼 별도로 대도소와 나란히 한 쪽에 세워져 있었다. 둘레는 돌담으로 울타리를 치고 깃발을 꽂았다. 

전국에서 동학도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공간이 부족해 마을을 가로지르는 내가에도 초막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대도소나 동학회의 광장이 실제 존재했었다는 물건도 나왔다고 한다. 서기1993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조사발굴을 했는데 대도소 흔적을 나타내는 기와조각과 광장을 둘러친 돌 무더기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 서기19세기 후반 해월 최시형을 지도자로 한 동학공동체가 장안리에 세워졌다. 비록 1년여 동안 존재했지만 동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동학공동체를 나타낸 안내판.

유무상자有無相資, 사인여천事人如天 등 동학의 가르침에 따라 동학도들은 당시 리조선 체제와는 사뭇다른 공동체를 건설해 운영한 것으로 나타난다.

집강소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앙집권식 수직적 지배질서가 아니라, 자치에 기초한 공동체 구성원이 운영 주체가 됐다.

유무상자有無相資는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서로 나누며 생활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내고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은 기술을 제공하여 공동체를 이끌었다.

"길 바닥에 함부로 침을 뱉지 마라.", "대소변을 보고 반드시 흙으로 덮어라." 등의 말이 전해진다. 공중보건위생에 철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은 함부로 침을 뱉고, 대소변을 보고 방치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동학 공동체는 동학정신을 현실생활에 적절하게 응용하여 적용하고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동학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운동장 같은 큰 광장이 있었다는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 동학공동체 안내판 제작을 주도한 조정미 동학민회 사무국장이 안내판과 실제 위치를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정부에서는 동학도 수만명이 장안리에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감시하면서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선무사를 파견하여 해산을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동학 지도부에서는 조정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위하고 도움이 되는 공동체라고 설득을 했다고 한다.

동학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광장에도 일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로운 집단임을 공동체 외관으로도 보여주고자 했다.

또 혹시 모를 관군이나 일본군이 들이 닥칠 것에 대비하여 옥녀봉과 지방도와 내 맞은 편에 있는 동산에 경계병을 배치하여  수 킬로미터 까지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손윤 동학민회 대표가 수년간 이곳 동학공동체를 연구한 내용을 실제위치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날 모인 동학민회 회원들은 미리 준비한 장안리 동학 공동체를 그려 새긴 안내판을 옥녀봉 아래에 나 있는 길가 옆에 세웠다. 125여년 전에 세워진 동학의 지상낙원 도인 셈이다.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그렸다.

동학민회 사무소에서는 방정환 학교를 열어 속리초등학생들이 방과후에 들러 공부도 하고 휴식도 하면서 장안리 동학역사를 알도록 이끌고 있다. 동학공동체 안내판도 아이들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방정환 학교는 모든 것이 무료다. 사무소 안에는 작은 도서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책들로 빼곡했다.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마련하는 취사 부엌도 있었다.

아이들 부모들의 호응이 폭발적이라고 했다.  지난 1년동안 활동을 담은 사진을 진열해 놨는데 방정환 학교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동학공동체가 실재 했음을 나타내는 표지판. 취회는 동학도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조정미 동학민회 사무국장은 방정환 학교가 없을 때 아이들이 갈 곳은 뻔하다고 했다. 일 나간 엄마 아빠 없는 집에가서 휴대폰이나 들여다 보고 오락이나 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방정환 학교가 생기면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 곳이 생겼고 부족한 과목을 무료로 보충할 수 있고, 책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독서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날 총회를 기념하면서 잔치도 벌였다. 정성스럽게 빚은 시루 떡과 술, 돼지 고기를 나눴다. 마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음식을 나눴다. 마을 회관에 노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빈 집은 여기가서 나눠줬다. 노인회장 아주머니는 직접 산에가서 턴 상수리, 도토리로 쑨 묵을 보답으로 주었다.

▲동학민회 사무소. 이날 동학민회는 총회를 이곳에서 열었다. 또 동네 주민들과 함께하는 잔치도 벌였다. 왼쪽 깃발에 서로 나눈다는 뜻의 유무상자라는 글이 보인다. 집 뒤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동학민회는 장안리 동학역사를 알리고 동학의 방정환 학교를 열고, 때 마다 잔치를 함께 동네 분들과 나누고 있다. 이는 사라져 가는 지역공동체의 정신을 다시 찾고, 동학이 꿈꾼 지상낙원을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

동학민회는 앞으로도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더욱 발전시켜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고 동학정신이 곧 우리 정신임을 알려 나가겠다고 밝혔다.

▲ 방정환 학교 푯말이 걸려 있는 동학민회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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