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로 세워야 혼돈과 분열의 지옥조선,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글: 신종근(의사, 고대사 연구가)

 

 

가야전에 뜸금없이 북쪽에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 '대방군'이 왜 나오나

또 가야를 말하는데 뜸금없이 가야 이전 마한, 진한, 변한이 왜 등장하나

모두 고대판 총독부, '임나일본부'를 깔기위한 사전 포석 작업임이 드러나

같은 시기 역사 말하는데 일본서기에 임나등장, 고사기에는 전혀 안보여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은 일본극우파 사관 추종자들이 일본사 전시한 꼴

가야전을 일본에서 똑 같이 할 예정, 일본의 대한민국 지배 공인하게 돼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야역사를 전하는 전시관에 그려져 있는 고대 지도다.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과 대방군을 황해도 평안도 일대에 그려놓고 있다. 마한 진한 변한도 새겨놓고 있다. 모두 본 전시 주제인 가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다. 이 전시를 담당한 국립중앙박물관과 배후에 있는 관련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하고 있음을 말한다.

- '낙랑군'과 '대방군'

위 그림을 보면 한반도 북부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중국의 1차 사료는 단 한 권도, 단 한 줄도 없다. 이 기획전을 준비한 사람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서기>

또한 이 기획전의 제목이 '가야'인데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가야를 얘기하면 당연히 동시대의 백제, 신라가 있어야 하는데 왜 이들은 백제, 신라를 빼고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그렸을까?

이들은 지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部說)'을 그림에 표시한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임나(任那)라 불리는 지역이 4세기 후반부터 일왕의 직할지로 편입되었고 일본부(日本部, 일종의 조선총독부)라는 관리 기관을 두고 관료가 그곳에 파견되어 대리 통치하였으며 이후 562년 신라가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200년 동안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임나'라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는 한 구절도 없고 오로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만 나오는 글귀다. 이 기획전을 준비한 사람들은 <삼국사기>를 인용하지 않고 <일본서기>를 근거로 지도에 그려넣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일본서기>는 어떤 책일까? 도대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사서(史書)이길래 대한민국 역사학자, 고고학자, 박물관 학예사들이 이처럼 철석같이 믿고 따를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은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다. 그런데 720년에 다시 새로운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나온다.

이미 <고사기>라는 역사서가 만들어졌는데 왜 8년 만에 새로운 역사서 편찬을 추진했을까? 그 이유는 두 사서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서기>가 <고사기>보다 10배 가까이 분량이 많고 한반도 관계 기사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백제와 '임나(任那)' 관계 기사가 대부분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편찬 목적을 알려줄 만한 서문(序文), 발문(跋文), 상표문(上表文) 등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712년에 편찬된 일본 최고(最古)의 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라는 단어조차 단 한 번도 없고 '임나일본부설'을 추정할 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임나'라는 단어가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백제와 '임나' 기사가 커다란 비중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온전이 드러나는 것이다.


- 정사(正史)란?

국가가 편찬한 사서(史書), 즉 정사(正史)의 경우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편찬하고 국가 차원에서 정보 수집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류들이 적고 그래서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매우 이례적인 경우가 바로 <일본서기>와 <고사기>이다.

<일본서기>에는 중국 정사(正史)라고 하는 위서(魏書), 진서(晉書), 삼국지(三國志), 한서(漢書), 수서(隋書),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거의 모든 시기의 중국 기록들이 마치 일본의 역사인 것처럼 도용되어 사용되었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접한 편찬자들이 실제 역사를 몰라서 <일본서기>라는 허무맹랑한 사서(史書)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실제 역사를 기록할 목적이 아니라 가공의 역사(僞史)를 만드는 것이 애당초 책의 편찬 목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차태헌, < 일본에서 찾은 가야.백제.신라 이야기>, 마고출판사, 2017.)


- 고대한일관계사와 식민사학자 그리고 <삼국사기> 불신론

그러면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대해서 뭐라고 했을까? 여기서 '고대 한일관계사(古代韓日關係史)'에 관한한 대한민국 최고 권위자인 최재석교수의 책을 보자.

"고대 한일관계사 왜곡의 큰 틀을 만든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는 <일본서기>에 있는 백제 중심의 기사를 야마토왜(大和倭) 중심으로 고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 및 경성제국대학 소속이었다가 일제 패전 후 '임나(任那)'의 강역을 전라도 및 충청도까지 확대시킨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1904~1992)도 <일본서기>에 대해 '구진적(求眞的, 진실을 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대하면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된다."고 실토했다.

또한 스즈키 다케주(鈴木武樹)는 <일본서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이 하나도 감추어지지 않았다고 갈파하였다.

이들의 말만큼 '일본고대사'와 '고대한일관계사'의 실체를 알게 해주는 말도 찾기 힘들다.

이들에게 역사는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한민국 점령을 합리화 하려는 전제에 꿰어 맞춘 정치선전에 불과했다는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고대 한일관계사(古代韓日關係史)'에 대해서 <일본서기>의 시각으로 보는 것과 <삼국사기>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크게 다른 경우가 많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큰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불신론(不信論)을 창작해서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는 사서(史書)로 격하시키고 <일본서기>만을 가지고 일본고대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를 서술해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민국 침략을 합리화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 후에도 이런 비학문적인 정치선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한민국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병도를 필두로 김철준, 이홍직,이기백, 이기동, 문경헌을 거쳐 김현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왜곡시킨 한국고대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를 거의 그대로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 극복에 앞장서야 마땅한 한국사학계에서 오히려 일본 식민사학을 추종하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고칠 까닭이 있겠는가?"(최재석,<삼국사기 불신론 비판 >, 만권당, 2016.)


- 일제의 고고학적(?) 도굴 조사

만약 200년 동안 '임나(가야)'가 일왕 직할지로 다스려졌다면 거기에는 뚜렷이 증명할 만한 어떤 확실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 이것을 밝히기 위해 일본은 엄청난 인력과 재정을 상당한 기간 투여했다.

일본의 주도 아래 고고학적(考古學的)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주요 인물들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아츠이 세이치(谷井濟一), 이마니시 류(今西龍), 구로이다 가츠미(黑板勝美),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와 하라다 요시토(原田淑人) 등이다

이들의 중점 조사 대상은 고분(古墳)이었으며 주된 지역은 고령, 김해, 선산, 달성, 성주, 김천, 함안, 창녕, 경주, 경산, 청도, 양산, 상주, 동래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단 한 점의 고고학적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발굴 조사에 참여했던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는 1921년 발표한 '조선의 고적조사'라는 글에서 '지금 갑작스럽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 임나(任那)라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보는 선입견은 이제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실토했다.

또한 고고학을 전공한 도지샤(同志社)대학 모리 고이치(森浩一, 1928~) 교수는 1959년, 로마의 영국 출병과 일본의 한국 출병설(出兵說)을 비교한 다음 '전자는 문헌이 없다고 하더라도 허다한 유구나 유물을 통하여 명백히 알 수가 있었다'고 갈파했다.

만일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출병을 하였다면 전사자의 무덤, 제사 유적, 주둔지, 거주지로서의 성(城) 등이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거꾸로 일본열도 내에서는 한반도 계통의 문물을 여기저기에서 얼마든지 찾아진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차라리 일본열도가 한반도 계통 국가의 식민지였다고 단정하여도 무방하다.


- 고대 일본의 수준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해 최재석교수의 말을 더 들어보자.

"기본적으로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日本王의 王權의 정도, 日本의 官位 시행년도, 일본의 강역, 日本의 조선.항해 수준 등)을 올바르게 파악만 한다면 '일본고대사'나 '고대한일관계사'는 왜곡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고대사를 왜곡한 사람들 가운데 고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이 사정은 알 수 있을 것이다".(최재석, <고대한일관계사 연구 비판 > , 경인문화사, 2010.)


-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교주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왕들은 대부분 가공 인물이며 연대(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들과 비판해가면서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이번 '가야기획전'은 오로지 <일본서기>의 기록만을 진실로 받아드리고 전시한 것이다. 이들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절대불변의 진리만을 말하는 교주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시를 마친 다음에 일본에서도 똑같은 전시를 한단다. 자신들의 엉터리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속으로 얼마나 좋아할까? 또 얼마나 업신여길까?

#가야특별기획전 #낙랑군 #임나일본부설 #일본서기 #삼국사기불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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