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 치욕의 역사 감추다.

 

실제보다 너무나 많이 부풀려진 당나라 역사...

 

<신당서>의 당나라 대종 때의 기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775년이 되면서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위구르 사신들의 불법 행위로 인해 위구르와 당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런 사례는 775년에 장안에서 홍려시를 빠져나온 위구르 사신일행이 백주에 동시(東市)에서 당나라 사람을 살해했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우두머리 강적심(康赤心)이 당조 관리를 상하게 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을 기회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자 위구르는 775년에 11월 기마병 1000기를 출동시켜 하주(夏州)를 약탈하는 등 구나적 위협을 가했다. 이에 당조의 주장 양영종이 오수에서 위구르를 격파했고 곽자의가 3천 군사를 파견했다. 이후 양국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위구르는 당조에 조공이나 호시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에 있는 위구르에 대한 기록에는 정반대의 기록이 있다.

<소그드와 당의 전쟁사> 를 쓴 B.F 미하젤스키 교수는 2008년 옴스크 쿠르간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로 된 위구르 원문에는 위구르가 775년에 3,000명의 기병이 출동해 장안을 단 시간 내로 습격하여 함락하고 황제 대종을 포로로 잡았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옴스크 쿠르간에서 출토된 두루마리의 기록은 당국의 유물 보존 사정상 러시아어로 번역한 번역본을 올림에 양해를 구합니다.>

Daejong поймали императора и занял 775 лет зимой 3000 кавалерийской атаки со стороны властей janganseong Вокруг ванны janganseong всей Daejong обе ноги и обе руки были связаны с уйгурами сети осетра были

Каган Daejong глазах вытащил boegi жевали и ждали, пока власти предлагают переговоры

Daejong boegi каган уйгурского и власти в 776 плодов и обещание торговли и дань вернуться к династии Тан послал меня.

해석 : 775년 겨울 당국을 3000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여 장안성을 점령하고 황제 대종을 사로잡았다. 위구르인들은 대종의 양 발과 양 손을 철갑사슬로 묶고 장안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욕을 보였다.

뵈기카간은 대종의 눈을 뽑아 씹어먹었고 당국의 협상 제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776년 당국의 태자는 위구르와의 교역과 조공을 약속하였고 뵈기카간은 대종을 다시 당나라에 보내주었다.

<신당서> 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775年冬皇帝がウイグルとの戦争で3,000の騎兵を撃退した。

776年3月、皇帝が突然目が見えない臣僚たちに文を代わりに読ませた。

해석 : 775년 겨울 황제께서 위구르와의 전쟁에서 3,000의 기병을 물리쳤다.

776년 3월 황제께서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아 신료들에게 글을 대신 읽게 했다.

시미즈 다카히로 <신당서 일본판> 籍原事. 1999. 10. 188~200p 참조.

▲가운데가 티벳의 토번제국 제왕, 송첸캄포칸이고 오른쪽이  당태종으로 알려진 당왕, 세민이의 딸 문성공주다. 당왕 세민이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활약하여, 명장반열에 오른 설인귀를 토번제국이 쳐들어오자 막으라고 보냈으나 대패해 버린다. 그래서 설인귀는 서인으로 강등되고 세민이는 토번제국에게 항복하고 그 조공물로 자신의 딸, 문성공주를 송첸캄포칸에게 시집보낸다. 이 때 불상을 함께 가져감으로써 티벳에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이 처럼 당나라의 전성기라고 알려진 당왕, 세민이 때에도 우리와 문화인류학적으로 같은 티벳의 토번제국의 속국이었다.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눈에 화살을 맞은  당왕 세민이에 이어, 당나라 대종도 우리와 문화적 친연성이 있는 위그르 군대에게 눈알이 뽑히는 운명이 되었으니, 그동안 중국역사의 중축으로 알려진 당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자랑스런 역사를 크게 두개로 압축하는데 당나라 세민이 때와 청나라 강희제 때라고 한다. 그런데 당나라의 실제 역사를 보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청나라는 사실상 우리계열의 역사지 중국역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역사는 알려진 것처럼 대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실체를 앎으로써 중화주의 사관에서 벗어 날 수 있다(사진설명: '삼태극' 국사광복단, 오종홍).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 캄파이의 첸 Kampayi சென் >

பேரரசர் 776 ஆண்டுகளுக்கு கட்சி கண்களில் அது இழக்க உய்குர் வெட்கம் ஒரு ஆச்சரியம் தாக்குதல் பிடிபட்டார்.

해석 : 776년 당의 황제가 위구르의 기습공격에 사로잡혀 눈을 뽑히는 치욕을 당했다.

캄파이의 첸은 토번의 역사가 기록되있는 책이다. 현재 이것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을 때 이 책을 가지고 갔다 한다. 지금은 델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란 소그드 조화>

وحشت در 775 سال را دیدم به عنوان یک زندانی یک افزایش بزرگ

برداشت.اما امپراتور به دولت بازگشت و از برف انتخاب شد.

해석 : 우리는 775년에 당황제를 포로로 잡았고 큰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황제가 눈이 뽑힌 상태로 돌려 보내졌다.

중국의 <신당서>에 기록되있는 부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송나라가 당나라의 치욕을 감추기 위해 고의적인 왜곡을 했던지 아니면 당나라 대에 너무 치욕스러워 왜곡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거기까지이고 그 이후에는 동네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처세술. 당나라를 배우자. 이런 류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돌아다니고 있다. 당나라에게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기마민족들에게 뜯김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부분을 배우자는 것인가? 당나라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안사의 난과 위구르에 당한 대종의 치욕, 토번에 당한 덕종의 치욕등을 읽어보고 평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럼 위구르는 어떤 나라인가?

高句麗의 兄弟국, 突厥의 위구르 통치에 대한 硏究1)

1) 필자의 2011년 하반기 학술논문

(중략)...

우리와 피를 나눈 단군의 후예들로써 이들이 분포하며 살고 있는 유라시아와 협력교류 해야하는 외교적 배경이 “兄弟”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터키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친밀하게 다가온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돌궐(突厥)2)은 흉노(匈奴)의 후예로써 단군의 후예이고 돌궐(突厥)의 전신인 흉노(匈奴)는 고구려(高句麗)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으며 5호16국의 중원 혼란기 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연합하여 후연(後燕)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북제(北齊)의 시조인 고환(高歡)은 흉노(匈奴)의 선우출신이자 고구려(高句麗)의 고위관직인 대모달을 역임했던 인물로써 그의 아들 고양(高洋)이 북제(北齊)를 세우고 북방을 통일할 때3) 고구려(高句麗)의 평성태왕(平成太王)4)이 군사를 보내어 돕게하는 등 남다른 우애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2) Türkei Mittelschule Geschichte Lehrbuch : mouxri Geschichte 1984. 127p

3) 北齊書 日本販 飜譯本 : 고환「고구려 열전」1973. 13p

4) 北齊書 日本販 飜譯本 : 고구려의 양원왕의 이름이 평성이다. 이것을 북제에서는 고구려의 연호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고구려 열전」1973. 16p

552년 흉노(匈奴)의 일파이자 유연(柔然)의 복속민족인 돌궐(突厥)이 흉노(匈奴)의 각 부족들을 통합하고 아흘타이(ahltaiy)5)의 회맹을 거쳐 몽골초원과 화북지방의 패자6)가 되었다.

5) 아흘타이(ahltaiy) 회맹 : 몽골의 쿠릴타이(quliltay)의 원조로 신라의 화백화의와 흡사하다. 8명의 수장이 원 탁에 앉아 회맹을 가지는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6) 돌궐突厥을 피해 달아난 유연柔然과 에프탈 훈의 성공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서돌궐腺厥의 타르두(달두達頭) 카칸이 AD 575-AD 576년 사이에 비잔티움의 사신 <발렌티노스>를 쿠차 북방의 율두즈 강 상류에서 접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 서로 조약을 맺은 사실에 관해 질책한 말이 이 같은 정황들을 매우 잘 설명해준다.

그리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서방으로도 진출하여 이란북부의 이스파한과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에 이르렀으며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돌궐은 서돌궐이라 했고 오르콘(Orkhon)강 유역을 본거지로 몽골 지방을 지배했던 돌궐은 동돌궐이라 했다.

서돌궐의 역사를 기술했던 사산조 페르시아(Sasan Persia)의 Ephthalite toumun 14권에 의하면 이렇게 기술이 된다.

[원본]

552 ترکها بی تردید انعطاف پذیر مغولستان زمانی که او شکست خورده بود و تحت سلطه دو نفر از غرب نگه داشته استفاده می شود که هون نیز ناپدید شده است. برادر ساکنان ساخته شده در اطراف 565 بر اساس ایران و اتحادیه را فتح با در نظر گرفتن موضع است. "

[해석본]

「AD 552년 틀림없는 투르크계 돌궐(突厥-부민土門 카칸)에게 유연(柔然-아나괴 카칸)이 격파당하면서 몽골리아를 지배하자 柔然의 서방을 지켜주던 [Ephthalite hun]도 사라져버렸다.7) 부민Bumin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가 준가리아Jungaria를 중심으로 세운 腺厥을 바탕으로 AD 565년 페르시아(사산조)와 연합하여 정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동돌궐이 당(唐)에게 멸망8)을 당했고 동돌궐의 남은 유민은 고구려의 멸망 후 발해에 흡수되었다. 북방의 철륵(鐵勒)9)중 하나인 설연타(薛延陀)가 위구르지역에 침공하여 그곳을 지배하였고 셀렝가강(江) 방면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나 A.D 646년에 당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10)

7) 서쪽으로 달아난 [에프탈 훈]과 합친 유연柔然의 일부가 헝가리 지역에서 새로운 몽골계 칸국을 세우고 두 각을 나타내며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 바로 [아바르Abar]이다(비잔티움 사가史家 테오필락투스 Theophylactus 시모카테스*Herrmann). 그는 <앗틸라>를 따르던 유목부족이었던 쿠트라구르와 우투르구 르라는 <훈족>들을 패배시킨 다음 포용하여 전력戰力을 가다듬었다. 볼가에서 다뉴브를 거쳐 오스트리아 초원까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다음 AD 565년에 뒤를 이은 계산이 빠르고 영민한 군주가 아주 특별하게도 <바얀Bayan 칸>이라는 몽골계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펠리오Pelliot).

8) 630년 당(唐)의 이세민(李世民)에게 정복되었다. 舊唐書 本紀 高祖 日本販 1988. 28p 참고

9) 수(隋) ·당(唐) 왕조의 중국인이 돌궐(突厥) 이외의 투르크계(系) 여러 부족을 일컫던 말.

10) 646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육도독부(六都督府) ·칠자사주(七刺史州)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舊唐書 本紀 太宗 日本販 1988. 76p 참고

이후 위구르 지역은 당의 기미정책(羈縻政策)11)가 본격화되자 남은 토속민인 돌궐(위구르)인들은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가고 발해와 당, 이슬람세계와 중계교역으로 인해 부유해졌다. 서돌궐이 당의 토벌에 멸망 후 突厥第二帝國 (682~745)12)이 다시 부활하자 위구르는 그들에 항복하여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13)

11) 기(羈)는 말의 굴레를, 미(縻)는 쇠고삐를 뜻하므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견제 ·통제의 의미를 가진다. 전형적인 형태는 당나라 전기에서 볼 수 있다. 명목상으로는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부주현(府州縣)을 두고, 외 족(外族)의 왕 ·추장을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 등에 임명하여 자치에 맡기고, 보호령으로서 도호 부(都護府) 등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번창할 때는 기미부주(羈縻府州)가 856개나 되었다고 한다. 북서의 돌궐 ·위구르, 북동의 거란,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로부터 남서의 티베트와 먀오족[苗族]의 땅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하였다.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도 없고, 직할령으로 만들 수도 없는 주변 민족들에 대해서 취해진 정책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2) 동돌궐의 부활, 682년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 였다.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13)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문학과지성사 2005, 20~22p

740년 돌궐의 약화를 틈타 바스밀(Basmil)과 카를룩(Qarluq)등이 위구르영토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시 바스밀(Basmil)이 세력을 차지하나 위구르는 다른 여타세력들을 제압하고 몽골고원과 현 신강성,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 부근을 차지하였다.

이후 위구르는 안사의 난(755~765)14)때 당을 도운 것을 기회로 당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몽골 초원과 카자흐스탄 지역 등에 한정되어 있던 지배영역을 좀 더 확대하게 하기 위해 서방에 대한 활발한 진출과 오아시스 지역의 경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유목제국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15)

9세기 전반까지 발전을 구가하던 위구르는 830년대 말 키르기스족의 공격을 받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 몽골초원을 떠나 신강성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초원을 중심으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이어지는 고대 투르크 유목민들의 세계는 중앙아시아의 전반적인 사적 전개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대 투르크 세계의 전개 특히 9세기 중반에 발생한 위구르의 붕괴는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까지 엄청난 정치, 사회, 문화적 변동을 가져와 현재와 같은 인문지리적 환경을 형성하는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16)

또 한가지, 이로 인해 위구르와 돌궐이 우리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4) 안녹산의 과거 : 출생한 해는 703년이 유력하며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란계(系) 소그드인(人)의 무장이었던 안연언(安延偃:일설에는 양아버지라고도 함)이고, 어머니는 터키족 돌궐(突厥)의 무녀(巫女) 아사덕씨(阿史德氏)이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가 돌궐족의 장수와 재혼하였다. 안 (安)이라는 성씨는 계부의 성(性)이며 자식이 없었던 계부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당시 안녹산의 집안은 이민족으로 당나라 한족들로부터는 잡호(雜胡)로 간주되었다. 그는 6개국의 말을 구사할 줄알아 젊었을 때 영주(營州: 北京의 북동쪽)에서 호시아랑(互市牙朗: 무역의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安祿山事蹟」1951. 15~40p

15) 정재훈, 「위구르 유목제국사」문학과지성사 2005, 163~173p

16) 송동건. 「고구려와 흉노」진명출판사 2010. 182~221p

 

글 : 세르게이정(북방고고인류학 연구소 교수)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