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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하다동학혁명 집강소 옛터에서 장소의 혼으로 개벽을 톺아본다.
강주영 객원기자 | 승인 2019.09.29 17:24

 

글: 강주영(건축기술사)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끝 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전주에서 거주하며 건축기술사로 활동하고 있는 강주영선생. 또 '게스트하우스다락채'에서 근무하고 있다.

1. 개벽 - 장소의 혼 집강소를 찾아서

동학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면서 동학혁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 방송극으로 ‘녹두꽃’이 방영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동학혁명 호남대도소가 설치되고 세계 혁명 역사상 유례가 없는 민중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지금의 근대와는 다른 근대를 꿈꾸었던 개벽의 고장 전주는 동학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전라감영은 알아도 집강소는 알지 못한다. 많은 경우 그저 탐관오리와 외세에 대항한 운동으로만 안다. 도시 공간은 인문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건물도, 길 이름도 없다.

객사로, 충경로, 감영로는 있고, 집강로, 녹두로, 개벽로는 없다. 도시 재생에 ‘동학혁명’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개벽을 생각하는 이들이 할 일들 중에 하나가 공간 개벽이다. 공간이 없다고 ‘장소의 혼’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장소의 혼’을 찾아 전주 팔달로(八達路)를 걸어 집강소 옛터로(전라감영) 간다. 그대와 나, 천하 개벽운수의 사통팔달을 바란다. 천하가 막힘없이 동서고금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하기를 꿈꾼다.

1907년 일제가 전주부성의 성벽을 헐고 8m 넓이의 신작로를 뚫었다. 팔달로는 원래 풍남문에서 감영에 이르는 길이었다. 신작로를 내던 고통과 치욕을 표현한 노래가 오늘까지 전한다.

“치마끈 졸라 메고 논 사노니 신작로 복판에 다 들어가네.” 하는 남원 길쌈 노래가 있다. “애깨나 낳는 년 유곽으로 팔려가고, 힘께나 쓰는 놈은 신작로로 간다”는 노래도 있다. 공사판의 고단함과 민족의 서러움이 절절하다.

‘십이칸 도로’ 팔달로는 1960년대에 이름이 붙여졌다. 1칸은 대략 2미터이니 12칸이면 넓다는 뜻이겠다. 경복궁 강연전이 11칸이라 한다.

전북 지역 문인인 신귀백 선생이 전주부성을 허물고 신작로를 만들던 이야기(「전주편애」 128쪽)를 하면서 노래를 인용하였다. 그 인용이 절묘하다.

구닥다리 사랑 노래 뽕짝으로나 치부했던 노래였다. 맞는 자리에 옮기니 뜻이 전혀 달라진다. 1958년에 작곡되었으니 전주부성이 헐리던 아픔의 노래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니 인용이 절묘하다. 남녀의 노래가 민족의 아픔을 담은 노래가 된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

끝 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

아아 꿈에도 잊지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

풍남문에서 걸어서 2분인 곳에 전라감영 옛터가 있다. 전주성은 감영과 임금에게 삭망례를 올리던 객사가 북쪽에 있고 그 남쪽 왼편에 감영이 오른편에 전주부 기관이 위치했다.

옛 전주부성지도를 보면 위쪽에 객사가 있고 아래쪽에 좌우로 감영과 전주부성 기관들이 있는 품자형 도시이다. 중앙에 조정을 두고 동문, 남문(풍남문), 서문(패서문), 북문(공북문)을 두었다.

동서남북문 앞에 시장을 두었다. 남부시장, 동부시장, 중앙시장이 여전히 손님을 맞는다. 성안은 정치요 성밖은 경제이다. - 신귀백 「전주편애」 참조 편집 인용 -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를 관장하던 호남 제일성 전라감영과 전주부성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지금은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2. 감영인가, 집강소인가

‘전라감영’인가? ‘집강소(執綱所)’인가? 집강소는 1894년 5월 8일(음력) 동학혁명 당시 전주화약으로 설치한 농민군과 왕조지배기구의 관민상화 기구이다.

그해 6월 21일 일본이 고종을 핍박하여 친일정부를 구성했다.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7월 6일 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회담을 하고 집강소를 확대 강화한다.

주류와 비주류가 만났다. 주류와 비주류가 서로 사통팔달했다. 동학혁명군이 구체제를 완전히 일소하지 않고 공동의 지방정부를 구성했다. 구체제를 폭력적으로 완전히 일소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동학혁명군이 나라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상황에서 ‘관민상화’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홍계훈이 이끄는 토포군이 완산칠봉에 진을 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가을의 2차 봉기에서도 동학혁명군의 무력이 우월했다. 이때 지배계급을 학살했다면 그 원한이 지금도 후손들 사이에서 깊고도 넓을 것이다. 불과 125년 전의 일이다.

3. 집강소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모시는 개벽체

관민상화의 집강소 체제는 세계 혁명 사상 유례가 없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모시는 개벽이었다. 할 수 있으면 학살 없는 평화 혁명이 최고가 아닌가?

집강소가 활동하며 개혁을 진행한 내용은 자세히 전하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안다. 기간도 서너 달로 짧았다. 다만 밑바닥 농민이 나주와 운봉 정도를 빼고는 지방정부의 핵심권력을 운영했다.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를 쓰고, 소설 「나라 없는 나라」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이광재는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집강소의 농민 대표와 각 고을의 수령이 고을의 운영에 관하여 협의하고, 이를 도집강에 선임된 농민군 대표 송희옥과 전라감사 김학진이 총괄하는 새로운 형식의 자치제도가 출현한다.

‘관민상화(官民相和)’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데, 기존의 행정력과 백성이 협력하여 새로운 자치체제를 만들어 냈던 바, 이것이 바로 ‘관민상화’였던 것이다.

실로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자치행정체계가 바로 이곳 호남에서 태동했다는 사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관민협치니, 거버넌스니 하는 말들이 운위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관민상화’가 얼마나 위대한 지역자치의 모델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 이광재 -

전라감영 옛터를 가면서‘장소의 혼’을 되새김질한다. 투표로 합법성을 얻은 공적 권력인 국가가 있다. 1987년 민주화 이래로 본격적인 시민사회가 구성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와 실시와 함께 시민사회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사기업에는 사외이사로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거버넌스(governance) 또는 협치(協治)는 유행어이자 필수로 되었다. 끝없이 권력에 들자고 하는 욕망이거나, 진심의 비판과 견제이거나 상관없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서로 간섭하고, 대립하며, 동맹하고 합종연횡한다. 대등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국가와 기업이 훨씬 쎄다.

점수를 줘 본다. 수치를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공이과팔(功二過八)이다. 공은 둘이요 허물은 팔이다. 여전히 선거동맹을 벗어나지 못한다. 망국적인 성장우선주의를 깨지 못했다.

지역 적폐를 없애지도 못했다. 지역을 재구성하지도 못했다. 개화동맹이지 개벽동맹이 아니다. 유유상종하는 동맹이다. 그게 무슨 협치라 하겠는가?

전주는 전주답지 못하고, 울산은 울산답지 못하다. 세상에 자랑할 본보기가 없다. 서로 서로가 닮고 하는 일도 같은 짝퉁 동맹이다. 여전히 주류들끼리의 거버넌스이고 협치이다.

오늘날의 협치는 1894년의 ‘집강소’,‘관민상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교수는 있되 농민은 없다. 전문가는 있되 노동자는 없다. 박사는 있어도 쌀가게 아저씨는 없다.

컨설턴트는 있어도 주민은 없다. 그러니 지배동맹이고 선거동맹이라 한다. 시민사회는 반영해도 민중사회는 반영하지 못한다.

더구나 ‘민중’이라는 말과 ‘시민’이 뭐가 다르냐며 ‘민중’을 폐기하려 하는 이도 있다. 시민은 공적 권력 체제에 직간접으로 진입했다. 민중은 아직 그러지 못하다. 이 상태에서 ‘민중’의 폐기는 기득권의 배타적 논리이다.

대만 작가 진순신이 말한 것처럼 개벽파 전봉준과 개화파 김옥균이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만났다. 관민상화(官民相和)를 이루었다.

1894년의 조선 왕조의 전라감영과 동학혁명군의 집강소가 이룬 관민상화의 이중권력체가 있었다. 관민상화의 우리 역사를 제끼고 어디서인가 수입한 거버넌스(governance)가 유행한다.

검은 머리 백인들이다. 많은 경우 거버넌스는 선거동맹, 개화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문명과 사회 조성의 원리를 바꾸는 개벽동맹이 아니다. 거버넌스라는 것은 현재 주류들의 시대를 연장하는 지배동맹이다.

전라감영과 집강소의 관민상화를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감사(김학진)의 머리는 해 아래에 매달리고, 적괴(전봉준)의 시체는 달 아래서 찢길 것”이라며 저주했다.

오늘의 민주파들은 조선 말의 황현은 아닐는지. 그의 우국은 양반 세계의 우국이었을 뿐이다. 집강소의 관민상화는 동아시아적 민주화와 새로운 천하체제의 길을 보여 주었다.

동학은 몽골제국의 고려 오백 년과 중화제국 성리학의 조선 오백 년을 ‘다시개벽’한 일이었다. 다시개벽 동학혁명이 진압되면서 조선은 일본을 통해 이식된 서구식 근대로 끌려갔다. 잘못 꿴 단추였다. 좌절된 동학혁명의 결과이다.

신시가지로 도청이 옮겨가고도 구도청은 상당기간 보존되다가 전라감영 복원이 현실화되자 2017년 철거되었다. 전라감영 옛터는 통치기구였다가 집강소로 바뀌었다.

‘주류와 비주류’가 서로 같이 이룬 천하이다. 그러니 개벽의 터이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를 꿈꿀 만한 곳이다.

지배동맹, 선거동맹의 좁은 거버넌스를 버리고 밑바닥과 윗바닥이 온전히 만나는 관민상화를 도모할 만한 곳이다. 개벽세로 갈 만한 장소의 혼이다.

동학농민군이 고부봉기 때부터 제시한 폐정개혁안은 여러 개다. 집강소 시절에 제시한 12개조 폐정개혁안은 널리 알려져 있다.

①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⑤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⑦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⑨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이다. -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오늘날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굳이 오늘에 견주어 말할 일도 아니다. 다만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은 한 마디 보태야겠다.

이는 최근의 미투(me too)운동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옛적에 허울뿐인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청춘과부의 자결을 은연 중에 강요한 명예살인이 한 둘이었을까?

1894년 신분제 사회, 그것도 질식할만한 가부장 사회에서 ‘청춘과부의 개가’는 과부와 그 자식의 먹고 사는 복지에서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개가는 젠더(Gender)라는 성을 넘어 곧 신분제와 가부장 타파, 남성 권력 사회의 타파까지를 의미하는 구호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류와 비주류가 만났을 때 협치가 되고 관민상화가 되는 것이다. 같은 지배세력인 여야가 서로 좋은 의미에서 타협정치를 할 수는 있지만 협치라 해서는 안 된다. 협치의 진정한 의미는 소수자, 비주류를 존중하고 권력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감영의 모습을 알 수는 없다. 18세기에 이르러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하여 감사의 처소인 연신당(燕申堂), 감사 부친의 처소인 관풍각(觀豊閣), 감사의 가족 처소인 내아(內衙), 예방비장(禮房裨將)의 집무소인 응청당(凝淸堂), 6방 비장의 사무소인 비장청(裨將廳), 감사의 잔심부름을 맡아 하는 통인청(通人廳), 하부 실무자들이 일하는 곳인 작청(作廳), 정문인 포정루(布政樓) 등 25개의 시설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4. 개화도시로 갈 것인가 개벽도시로 갈 것인가

감영에서 집강소로, 다시 감영으로 되돌아갔다. 일제의 조선 총독부 지방관청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전라북도 도청이 들어섰다. 1943년에는 선화당·작청·진휼청·통인청만 남았다.

1951년에는 당시 경찰서 무기고에서 폭발이 일어나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건물이 불에 탔고, 지금은 선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회화나무만 옛 도의회 마당에 남아 있다.

폭발이 있은 이듬해 그 자리에 전라북도청사가 들어섰고 이후 의회 및 전라북도경찰청 건물이 들어섰다가 2017년에 철거되었다.

전주를 ‘왕의 도시 민의 도시’라고 민선6기 전주 시정은 이름하였다. 왕과 민을 이어서 생각한다. 말로는 민이 왕인 시대이다. 민은 무엇으로서 왕이 되고 누릴까?

전주의 정치에서 왕과 민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왕의 도시 민의 도시’가 시민에게 공명하여 공진하지 않는다. 전주 관광의 홍보 카피에 머문다.

오늘의 풍패는 무엇보다도 전주 정신, 아니 전라도 정신의 다시개벽에서 나올 일이다. 왕의 도시라니! 이성계는 살지도 않았으며 단지 본관이 전주라는 것 말고는 없다. 임금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민은 너무나 멀다.

최명희 선생의 소설 「혼불」에서 '꽃심'을 빌려와 전주시는 2016년 6월에 전주정신으로 선포했다.

‘꽃심’ 정녕 아름다운 말이다. '꽃심'은 포용의 정신 '대동'과 멋스러움과 품격의 '풍류', 의로움의 정신 '올곧음', 전통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신'의 정신을 모두 품고 있는 말이라는 뜻으로 전주시는 썼다. 최명희 작가의 원문을 옮겨 본다. 아름다운 문장이다.

오천 년 역사 속에 단 몇 십 년 하찮게 꿈틀거리다 죽은, 후백제라는 지렁이가 아직도 여전히 전라북도 전주부 완산정(完山町)에 동네 이름으로 살아서 묵묵히 그 혼이 용틀임하고 있는 것이야.

아직도 전주 사람들은 완산에 산다. 저 아득한 상고(上古)에 마한의 오십오 개 소국 가운데서 강성한 백제가 마한을 한나라씩 병탄해 올 때, 맨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전라도 지역 원지국(爰池國)의 수도 원산(圓山), 그 완산, 전주, 그리고 빼앗겨 능멸당해 버린 백제의 서럽고 찬란한 꿈을 기어이 다시 찾아 이루겠다고 꽃처럼 일어선 후백제의 도읍 완산. 그 꿈조차 짓밟히어 차현 땅 이남의 수모 능욕을 다 당한 이 땅에서 꽃씨 같은 몸 받은 조선 왕조 개국 시조이신 이성계.

천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또 천 년이 가도,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꽃심 하나 깊은 자리 심어 놓은 땅.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 꿈꾸는 나라. 결단코 잊지 않고 잃지 않고 맨 처음 나라 받은 그 마음을 밝히면서 아직도 귀순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순결한 넋으로 옛 이름 옛터를 지키는 전주 완산, 완산정, 완산 칠봉, 완산다리 ‘그 이름을 들으면 눈물이 나.’ - 최명희 「혼불」 -

‘꽃심’, 문학적 서사로 정녕 아름답다. 산뜻하다. 우리끼리는 그렇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난다. 전국으로 유라시아로 꽃심이 갈 수 있는가?

전주는 동방의 역사문화도시인가. 전주만의 역사문화도시인가? 아니면 무색무취의 아파트도시인가?

동서가 만나 소통하는 도시인가? 짬뽕이나 잡탕이 나름 뿜어대는 퓨전도시인가? 예향이라 말하지만 거리의 간판은 전깃불만 빛나 거리풍경을 압도한다.

예향 분위기는 없다. 동학혁명기의 전주화약 으로 설치된 집강소, 호남대도소가 있던 곳이지만 그 ‘장소의 혼’은 인문으로는 없다. 고속도로 입구의 ‘호남제일문’은 쓸쓸하다.

옛날 전라도의 영화를 씁쓸히 토해낸다. 이렇게 바꿔 쓰고 싶다. ‘다시개벽호남제일문’이라고. 하지만 다시개벽의 풍경은 없다.

호남제일문 옆의 혁신도시의 아파트만이 바벨탑처럼 하늘로 오르고 있다. 이곳이 동학혁명의 고장이었다는 풍경은 없다. 개벽성은 사라지고 근대성만 난무한다.

기억하는데 80년대 전주 다방에서는 고로(故老)들이 그 나름의 시대를 말하고 예술을 논했다. 고로들은 조심스레 동학 옛이야기를 말했다.

대학의 청춘들이 한국판 브나로드(V narod)를 외치며 민중 속으로 갔다. 촌스러움이었던 농악풍물과 굿과 소리를 불러내었다. 대동을 불러냈다.

80년대의 전주는 민중문화 부흥의 중심이었다. 막걸리 집에서 신청년들이 들끓었다. 마르크스보이/걸들, 청년 전봉준들, 모던보이/걸들이 어우러지고 싸우고 뭉쳤다. 이제 모두 사라지고 그들은 ‘개벽파’에서 ‘민주파’가 되었다.

동학혁명지소 전주, 전북, 전라도의 상징은 무엇인가? 변방의 마을에서 개벽을 들고 천하로 가야겠다. 전라도는 정여립 이래로 변방의 서자였다. 중심의 속지였다.

경제로나 정치로나 그렇다. 그렇지만 대대로 생명의 땅이고 개벽의 그리움이 서린 곳이다. 천하로 사통팔달하는 다시개벽시대를 꿈꾼다. 두보의 추흥팔수 중 한 구절을 떠 올린다.

“변방에 풍운이 일어 땅을 뒤엎고 / 강물을 뒤틀어 하늘에 용솟음하리( 塞上風雲接地陰 새상풍운접지음 / 江間波浪兼天龍 강간파랑겸천용)”

변방이 썩은 중심을 구원하는 개벽 전주인, 개벽 전라인을 만들 일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만나는 오늘의 집강소를 꿈꾼다.

 

*이 글은 <개벽신문> 7월호에 게재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강주영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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