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은 겉으로는 신채호 좋아, 뒤에가서는 ‘유사역사학자’취급한다.

 

 

영원한 떡밥, 이문영 기득권이용 대국민 역사사기극 벌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재평양설 거부하면 유사역사학

단재 신채호 낙랑군 재요동설 주장, 단재도 유사역사가됨

식민사학계가 신채호 유사역사가라고 한적 없다고 변명

 

▲'뉴스톱'이라는 매체에 민족사학을 아전인수격으로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는 이문영 안내글. 뉴스톱 갈무리.

 

최근 이문영이 <뉴스톱>이라는 정체불명의 매체에 <신채호는 유사역사가가 아니다>라는 글을 실었다.

이문영은 유사역사학(민족사학)계에서, ‘식민사학계가 신채호도 유사역사학이라고 매도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식민사학계가 신채호도 유사역사학이라고 매도한다.” 라는 말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심기가 상당히 뒤틀렸나보다. 자신도 식민사학계에 속함을 고백한 것이 아닐까.

이어 이문영은 그게 아니라고 갖은 궤변을 늘어 놓는다.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계가 결코 신채호를 유사역사학자라고 한적이 없다고 미주알 고주알 항변한다.

표면상 이문영을 포함하여 어느 식민사학자도 신채호를 “유사역사가”로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신채호가 주장한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재요동설, 단군조선 대륙지배설 등을 부정한다. 이문영이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비난하는데 민족사학이 신채호의 이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저들에게 신채호도 유사역사가 아닌가. 꼭 죽었다고 해야 죽은 것인가. 돌아가셨다도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이런 말귀도 알아먹지 못하는 수준인가.

아니다. 알면서도 일반대중을 향해 민족사학을 매도하고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개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를 “또라이, 정신병자”로 비난했던 자가 있다. 이 자가 신채호 주장을 민족주의 사학으로 밀어붙이며 비난한다는 점에서 이문영 식민사학과 다르지 않다.

이문영은 ‘역사학적 방법론’이라는 말을 꺼내들고 있다. 그의 말대로 ‘유사역사가’란, 역사학적인 방법론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그가 내세우는 ‘역사학적인 방법론’은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계의 요술방망이다.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걸이다. 식민주의사관을 정당화, 합리화하는 도구이다. 말만 그럴싸하지 실상은 식민사관기준에 불과하다.

똑 같은 역사사실을 두고 서로 상반되는 증거가 있다고 할 때,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만 선별해서 그게 역사라고 한다.

살펴보면 하나같이 일제식민지 황국사관과 중국 동북공정사관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진실을 전하는 반대편 증거는 갖은 억지를 써서 믿을게 못된다고 던져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위치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쓰인 <사기>조선열전을 보면 낙랑군은 절대로 현재 평양에 있을 수 없다.

연나라가 진개가 아무리 조선땅을 동쪽으로 2천리를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연나라를 멸하고 들어선 진나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나라 동쪽 국경선은 진장성, 곧 소위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아무리 늘여봐야 현재 중국 하북성 산해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중국 1차사료들은 하나같이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 인근이라고 한다. 이 갈석산 인근이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고 한다. 또 거기에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낙랑군 수성현이 있다고 여러 중국 사료들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낙랑군 교치론이니 이치론이 하는 잡설이 끼여들 틈이 없다. 더구나 이문영이 떠 받드는 '미천왕의 평양 낙랑군 멸망설'은 사기극이다. 고구려 미천왕이 서기313년에 낙랑군을 '멸망'시키지도 않았다.

<삼국사기> 미천왕 해당조의 표현을 이문영은 눈에 불을 켜고 보기 바란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 때 낙랑군이 고구려 공격 받고 '멸망'하고 잔당이 요동으로 이사가서 새로운 낙랑군이 생겼다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낙랑군이 이사간 것, 곧 낙랑군 교치설이다. 끼여들 틈이 없다.

만리장성은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가늠할 수 있다. 진고공지상하장(秦故空地上下鄣)이다. 진나라 옛 공지 상하장이다. 여기에 나중에 위만조선을 세우는 위만이 정착한다.

이 곳은 진나라 국경선인 진장성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안에 나중에 문제가 되는 낙랑군이 들어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낙랑군이 설치된 위만조선이 이 안에서 일어났다고 <사기>조선열전에서 말한다. 이 당대 기록에 따르면 낙랑군은 아무리 양보해도 중국 하북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무수한 기록과 유적을 다 무시하고 중화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은 조선과 일제가 날조한 낙랑군 평양설을 앵무새처럼 대를 이어 전수하는 자들이 이문영과 같은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추종자들이다.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낙랑군 유물까지 조작하여 평양일대에 심어 놨다. 낙랑군을 평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세키노타다시(關野貞)라는 자에게 거액을 주어 북경 유리창에 가서 낙랑유물을 극력수집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갖다 놓게 했다.

‘그후’ 평양일대에서 낙랑관련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 고고학 발굴이라는 ‘쑈’까지 벌이며 마치 실제한 것처럼 발굴사진, 기록, 채집된 물건들을 역사유물로 남겨 놓아 지금 입장에서 보면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놨다.

평양일대가 한사군이라는 기록은 한사군(낙랑군) 설치 전후한 당대 1차사료 기록은 단 한 개도 없다. 모두 후대에 기록된 것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직접 평양일대를 가리키는 사료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중화사대주의 자들이 남겨놓은 몇백년안된 것들이 다다.

이렇게 명백한 문헌증거와 유물이 있음에도 이문영 같은 식민사학은 갖은 억지를 써서 무시하고 중화사대주의자들과 조선총독부가 날조, 조작한 후대 문헌사료와 유물을 신봉한다.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계는 이렇게 1차사료를 가지고 증거를 대도 민족사학을 유사역사학,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매도한다.

단재 신채호도 낙랑군 재평양설을 부정한다. 민족사학과 같은 견해다. 이러니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이 단재 신채호를 유사역사가로 보는 것은 불보듯 뻔한 것 아닌가.

이문영은 신채호를 “또라이”, “정신병자”라고 한 주장에 대해서도 “출전이 나오지 않는 일방적 주장”이라고 매도한다.

그가 지금까지 역사를 논할 때 보여준 방대한 자료수집능력을 감안하면 분명히 출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른 척하며 자기글을 본 반대편 민족사학이 증거를 내놓으라는 식의 압박글을 쓰고 있다.

여기서 출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전에서 역사연구를 하시는 신상구 선생께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권희영 원장이 공개석상에서 그 말을 한 것을 용감하게 언론에 제보하였다.1)

더 웃긴 것은 그 뒤의 반응인데, 권희영의 그 말을 듣고도 현장있던 많은 역사학자들이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그의 권위에 눌려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에 암묵적 동의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양쪽 다라고 생각된다.

한국학대학원 원장을 했고 한국학진흥사업단 단장으로 1년에 250억 원이라는 막대한 한국사 관련 예산권을 쥐고 있었던 권희영 같은 사람이 역사학계의 주류가 아니면 대체 누가 주류라는 것인가.

뉴라이트 쪽 역사학자들은 현대사(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다르고 표현이 거칠 뿐이지 신채호를 반대한다는 측면에서는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저들은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한 것이고 이문영과 같은 고대사를 하는 사람들은 가증스럽게도 아닌 척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은 다 같다.

이문영은 이렇게 말한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날 잘못된 것들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법이 자칭 실증사학이라는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의 방식이다. 그가 말한 ‘역사학적 방법론’이다. 이 따위식 논리라면 이문영의 주장하는 실증사학도 몇 마디로 유사역사학을 면치 못한다.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날 잘못된 것들이 있으며...”

여기에 이문영의 본심이 있다. 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이문영이 숭배하는 식민사관을 부수는 민족사관이다. 인정하면 이씨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마지 못해 신채호를 인정은 해야 겠고 그러나 주장은 받아 들일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말장난하고 있다. 이게 이문영이 말하는 거창한 ‘역사학적 방법론’이다.

신채호는 한국현대사에서 뺄 수 없는 사람이다. 대중이 그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지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계는 그의 이름만 남기고 그의 학설은 부정하고 배척한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전문가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 어느 대학교수가 나와서 “신채호는 인정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라는 식이다.

앞서 밝힌 우리 역사의 머리요, 핵심인 단군조선 대륙설, 한나라 식민기관 재요동설 등을 이들은 이런 말장난으로 배척한다. 필자는 실제로 신경철 부산대 명예교수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2019.5.7.) 2)

그렇다면 역사학계에서의 신채호의 위상은 어떤가. 강만길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채호 사학 역시 일본 어용사학의 역사 왜곡에 정면으로 맞선 반식민사학자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지만 또 그 때문에 갖는 제약성도 많았다...단군시대를 하나의 왕조시대로 정착시키고 삼조선의 발전으로 연결시켰지만, 그 실증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강만길 <일제시대의 반식민 사학론>, 《한국사학사의 연구》 1985년, 244~245쪽

강만길은 실증성 문제 운운하며 신채호 주장을 배척한다. 이문영은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날 잘못된 것’으로, 강만길은 실증성 문제를 들어 신채호를 부정한다.

어떤 실증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가. 실증적이지 않으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신채호는 이전 역사서술의 그 누구보다도 실증적인 역사연구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조선상고사> 4장 ‘사료 수집과 선택’에서는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각 자료의 인용과 해석에 대해 밝혀 놓았으니,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또한 1973년 <허균의 개혁사상>을 발표하여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이이화는 이렇게 말한다.

“한사군을 조선에 두었던 식민지로 생각하는 견해도 잘못된 것이지만 낙랑군이 전혀 조선에 없었다고 보는 것도 과학적이지 못하다.”  -이이화, <이야기 한국사> 1권, 265~266쪽

이이화도 이문영, 강만길과 똑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표현만 다를 뿐 신채호 주장의 핵심 앞에서는 세명이 똘똘 뭉치고 있다. 식민사관 숭배, 바른역사 배척이다.

이이화는 낙랑군이 평양(조선)에 있었다는 식민사관을 역사로 밥벌어먹기 시작한 초기에 암기했나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횡설수설할 리가 없다. 한사군이든 그 중 하나인 낙랑군이든 조선인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역사 기초로 박혀 있다.

이는 공허한 형식논리로 옳음과 그름을 분별치 못하도록 가려버리는 전형적인 조선일보식 서술이다.

신채호는 중국 1차사료와 발로 뛴 고고학 탐사에 기초하여 한사군과 낙랑군을 조선(평양) 밖에 있었다고 증명했다. 그리고 한사군이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우리입장에서는 식민기관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도 이문영과 이이화 같은 조선총독부 식민주의사관에 중독된 자들은 아니라고 거품을 물고 있다.

이들은 역사학자 신채호를 인정하면서 그의 역사주장을 배척하는 따로국밥 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의 주장은 사실이든가, 사실이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신채호의 이름 석자는 이용해 먹고 싶지만, 그의 주장 세부내용은 인정해서는 안되는 식민사학자들의 고민을 읽수 있다.

신채호를 인정한다면 딱 한가지의 질문에 대답하면 된다.

“신채호는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설치된 적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인가, 거짓인가?”

대답은 다른 것이 없다. 셋 중의 하나만 있을 수 있다.

첫째, 신채호가 맞다.

둘째, 신채호가 틀렸다.

셋째,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두고 흑백논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사군 문제는 신채호사학의 변두리가 아니다. 가장 핵심이다. 신채호 사학에서 한사군 문제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빵에 앙코를 빼는 것과 같다.

신채호를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첫째가 맞다. 신채호를 부정하는가? 그렇다면 둘째가 맞다. 역사학에 관심이 없는가? 그렇다면 셋째가 맞다.

그러나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신채호를 사학자로서 존경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채호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세부내용은 우리가 새로 쓰겠다.”

신채호의 이름은 거부할 수 없으나 그 세부내용은 이어받고 싶지 않은 자들의 궤변이다. 매국노이나 독립운동 한 척해야 하는 자들의 모순이란 이런 것이다.

이문영은 조동걸, 박찬승, 이기백 등의 자료를 인용하여 그들이 신채호를 존경하고 그 사학을 기본으로 하여 현대 대한민국 사학이 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들이 식민사관의 핵심, 낙랑군 재평양설을 신주단지처럼 숭배하는 한, 조동걸, 박찬승, 이기백 사례는 이문영의 대국민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신채호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세부내용은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그렇게 신채호를 존경한다면 삼조선설은 어찌 그리 무시하며, 또한 연개소문이 북경을 점령하였다는 사실은 어찌 그리 무시하는가.

그들이 그렇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신채호 사학의 세부내용은 당시에는 사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된 연구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며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일제가 사료를 수거해 가기 전, 신채호는 오히려 우리보다 더 많은 사료를 볼 수 있었다.

이문영은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한다며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라고 비꼬고 있다.

이어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며 독자들을 농락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거꾸로다. 강단사학자들이야 말로 흑백논리에 가장 많이 사로잡혀 있다.

신채호는 그 껍데기만 남고 알멩이는 다 이용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병도의 학설은 겉으로는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그대로이고, 신채호의 학설은 겉으로는 존경하는 듯 모시지만 실상은 가장 배척받고 저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36쪽에서 송호정이 말한 바 “고조선이 국가형성과 동시에 곧바로 멸망에 이르렀다”이다. 이것은 식민사학의 대전제인데, 송호정은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감출 뿐이다.

이것은 고조선은 위만이 잠시 세운 정권일 뿐이고, 한민족은 식민지 상태에서 청동기/철기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에 이르렀다고 하는 “타율성론”의 결정체이다.

그 상태에서 요동에서 너무나 많은 유물(비파형 동검, 세형동검)들이 발굴되니, 그것을 무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 이른바 “중심지 이동설”이다. 이쯤 되면 눈 가리고 아웅도 정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은 어찌 신채호에 대해서는 “여건이 안 되어서~” 혹은 “당시의 상황이 한계가 있어서~”라는 억지로 배척하면서 이병도에 대해서는 “조선사편수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또는 “이병도는 최근의 고고학 자료를 보지 못해서~”라며 이병도 식민사학을 배척하지 않는가.

또한 이문영이 말한 바, 20세기 투라리즘과 같은 유사역사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채호가 유사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만주원류고>나 <요사>, <금사>, <남제서>의 비한족(漢族)계 사서는 왜 위서 취급하는지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신채호는 참으로 위대하지만 왜 위대한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온 세상이 알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뉴라이트 권희영은 차라리 솔찍하게 자기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신채호를 ‘또라이’, ‘정신병자’로 보았고 그것을 그대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문영과 같은 식민사학자들은 요즘 경제침략을 일삼는 일본 황국사관 신봉자, 아베같은 자들의 습성도 이어 받았는지 뒤통수를 친다.

앞에서는 아니라고 하고 뒤에서 신채호를 ‘유사역사학자’, ‘사이비역사학자’ 취급한다. 아주 교활하다.

이문영은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주장은 모두 비과학으로 처리하여 박제시켜 놓고 신채호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와도 닮아 있다. 김정은 앞에서는 친구니 좋아한다느니 해놓고 대북제재 더욱 좋여야 한다고 변태짓을 벌이고 있다. 이문영이 신채호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돌아서서는 '잘못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자유한국당이 아베경제침략 와중에 ‘토착왜구’, ‘친일파’라는 것이 드러나자, 이를 감추려고 갖은 괴상한 짓을 다 하고 있다.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눈물겨운 자기검열을 늘어놓고 있다.

이문영은 식민사학계가 단재 신채호를 유사역사학이라고 한 적이 없다며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그는 “신채호는 우리역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라며 자기결백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문영과 이들이 하는 짓이 어찌 이리 닮을 수가 있나.

 식민사학계의 서자, 이문영이 아무리 그래봤자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이니다’는 궤변에서 벗어날 수 없다.

 

1) “디트뉴스,”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573

2)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5

※ 본문의 작성은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 김상태 저 의 72p.~101p.의 글을 인용, 참고했습니다. 저자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