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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의 주인공, 온조와 비류 그리고 구태백제 시조신화 사실성에 담긴 역사의 굴절을 파헤치다.
박찬우 시민기자 | 승인 2019.07.23 12:13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⑧ 백제 시조신화 사실성의 속사정

 

백제시조 온조왕은 고구려 계통설, 비류는 부여계통

온조와 비류 생부, 구태왕은 중국사료에서 전해와

구태백제는 하북성 노룡현의 대방군으로 나타남

이 세력이 요서백제군, 진평백제군을 나중에 설치함

대방백제세력이 만세일계 일본 천왕가의 본류로 나타나

 

▲ 백제 시조신화는 북방계통의 천손신화와 난방계통의 난생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신성성(神聖性)을 배제한 사실성(事實性)을 선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백제 시조신화에는 적잖은 백제 역사가 굴절되어 있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출판,2018)

고대 동아시아 국가의 시조신화는 신성성(神聖性)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시조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북방계통의 천손신화와 알에서 태어나는 난방계통의 난생신화로 나눈다. 특히 소수의 북방유목민이 다수의 남방농경민을 지배하면서 천손신화와 난생신화가 적절히 결합한다. 삼국의 경우,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와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신화를 가지고 있다. 피지배층인 농경민을 배려한 신화체계의 구성이다. 그러나 백제는 신성성이 완전히 배제된 사실성(事實性)이 강한 시조신화이다.

백제의 시조는 3명이다. 온조와 비류 그리고 구태이다. 온조와 비류는 형제로서 계통이 같고, 구태는 두 사람과 전혀 다른 계통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편에 나오는 백제 시조(건국)신화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첫째 단락은 시조 온조왕 기록이며, 둘째 단락은 시조 비류왕 기록이다. 두 기록은 백제 건국이 동부여에서 홀본(*졸본)국으로 내려온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과 두 시조가 형제라는 점이 같다. ‘시조형제신화’이다. 다만 온조왕 기록은 두 시조의 생부를 추모로, 비류왕 기록은 우태로 설정한다. 어머니는 홀본국 왕녀 소서노이다.

통상적으로 온조왕 기록은 ‘고구려계통설’이고, 비류왕 기록은 ‘부여계통설’이다.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한다. 그래서 ‘정설’이다. 비류왕은 ‘일설’이라 하여 ‘이설’로 취급한다. 셋째 단락은 중국사서를 인용한 시조 구태왕 기록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편찬자는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놓는다. 한마디로 구태왕을 인정할 수 없다는 투다.

먼저 온조와 비류 두 시조를 알아보면, 두 사람은 3살 터울로 비류가 형이고 온조가 동생이다. 또한 두 시조의 생부는 우태이다. 추모는 양부이다. 참고로 우태는 소서노의 전남편으로 동부여 시조 해부루의 서손(北扶餘王解扶婁庶孫)이다.(*금와왕(2대)의 서자). 소서노가 추모와 정략결혼하며 역사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다만 『삼국사기』는 우태가 죽어 소서노가 재가한 것으로 나오나, [유기추모경]은 소서노가 살아있는 우태를 버리고 추모를 선택한 것으로 기록한다.(#1[추모경]기록) 우태는 역사기록의 희생양이다.

 

▲ [삼국사기] 시조신화는 온조왕의 백제 건국역사를 담고 있다.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한산에 올라 살만한 곳을 찾고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십제를 건국하며 형 비류가 죽어 미추홀 백성을 흡수한 내용 등이다. *출처 : 우정사업본부

다만, [삼국사기]가 두 시조의 생부를 추모로 설정한 점은 여러 해석이 있다. [삼국사기]가 백제의 기원을 의도적으로 고구려에 묶어두기 위한 장치일 수 도 있고, 또는 백제 스스로 고구려 기원을 선택할 수 도 있다.

그렇다면 백제시조는 형 비류가 아닌 동생 온조로 확정되었을까?

온조가 정착한 하남위례성에 답이 있다. 온조는 비류와 함께 미추홀로 남하하여 2차례 이동과정을 겪는다. 1차는 마한으로 땅을 얻어 미추홀에서 직산(충남천안)위례성으로 이동하고, 2차는 어머니 소서노의 죽음과 함께 직산위례성에서 하남(경기광주)위례성으로 이동한다. 하남위례성은 초기백제의 도성으로 온조의 세력기반이다. 온조 후손집단 역시 하남위례성이 본거지이다. 따라서 선조 온조의 시조 확정은 당연한 수순이며 절차이다. 만약 미추홀이 초기백제의 정착지였다면 비류가 최종시조로 확정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백제서기]는 백제시조를 온조가 아닌 비류로 기록한다. (#2[백제서기]기록)

다음은 세 번째 시조 구태(仇台)이다. [삼국사기]가 중국사서를 인용한 또 한 명의 시조이다. ‘『북사(北史)』,『수서(隋書)』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3[삼국사기]기록) 특히 [삼국지]<위서>(동이전 부여)는 구태를 후한(後漢)말 중국대륙에서 활동한 위구태(尉仇台)로 소개한다.(#4[삼국지]<위서>기록)

위구태는 누구일까?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위구태는 고구려 태조왕에게 패해 요서지역에서 서자몽(西紫蒙-베이징 북쪽)으로 본거지를 옮겨 ‘서부여’를 창업(122년)한다.(#5[고구려사략]기록) 위구태는 서부여의 시조이다. 다만 부여왕족 후손인 위구태가 처음 어떤 사유로 요서지역에 뿌리를 내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온조와 비류의 생부인 우태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선비족에게 밀려 다시금 서자몽에서 요서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때 두 세력집단으로 분화한다. 하나는 대방(하북성 노룡현)세력이고 또 하나는 녹산(백랑산-하북성 건평현)세력이다. 이 중 대방세력은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서남부지방을 장악한다. 특히 백제 국호는 이들 대방세력의 이동과 관계가 깊다.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100개 가(호)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줄임말에서 유래한다.(#6[당회요]기록) 또한 요서지역에 잔류한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한다.

참고로 한반도로 이동한 대방세력은 옛 본거지인 요서지역 대방 땅에 ‘요서백제군’을 설치하며, 이후 녹산세력인 서부여를 전연(前燕-모용황)으로 밀치고 ‘진평백제군’을 설치한다.

 

▲ 부여기마족은 위구태의 서부여를 기원으로 한다. 서부여는 대방세력과 녹산세력으로 분화되며, 대방세력은 바다건너 한반도 서남부지방으로 이동하며 백제 부여씨왕조를 건설한다. 그리고 옛 본거지인 대방지역에 요서백제군을 설치하며, 또한 녹산세력을 밀쳐내고 진평백제군을 추가로 설치한다. 소위 ‘대륙백제’로 이해되는 요서지역 ‘백제군’의 실체이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출판,2018)

그렇다면 대방세력과 백제는 어떤 관계일까?

훗날 한반도로 건너온 대방세력(부여백제)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깨져 일본열도로 망명한다.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가 주창한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의 주인공이다. 4세기 중후반 퉁구스계통의 북방기마민족이 일본열도로 건너와 오사카일대에 야마토(대왜)를 건국한 주체세력이다. 참고로 이를 좀 더 보완한 서양학자가 있다. 레드야드(Gary Ledyard)와 코벨(Jon Carter Covell)이다. 두 사람은 이들 북방기마민족을 ‘대륙의 부여 전사(戰士)들’로 이해하고, 그 실체는 ‘4세기 중후반 한반도 서남부를 거쳐 일본열도를 점령한 백제세력’으로 규정한다. 바로 대방세력은 오늘날 만세일계 일본 천왕가의 본류인 부여기마족이다.

특히 대방세력 중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가지 않고 한반도에 잔류하며, 이후 백제왕실을 아예 접수한다. 백제 부여씨왕조를 개창한 비유왕(20대)이다. 이로서 백제는 온조계열의 해씨왕조를 마감하고 구태계열의 부여씨왕조가 들어선다. 물론 부여씨왕조는 백제 멸망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이런 까닭으로 구태는 백제 세 번째 시조로 자리매김한다.

▲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컬럼비아大 교수)이다. 원래 그녀는 일본미술사 전공자이나,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라고 규정할 정도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분이다.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 Japan’s Hidden History』(Hollyn인터내셔날,1984)를 통해 일본인의 역사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남긴다. 1996년 그녀 사후, 김유경이 일본 천황가의 실체가 부여족이며,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일본의 고질적인 역사왜곡의 근원 등을 학문적으로 파헤친 62편의 논고를 편역하여 『부여기마족과 왜倭』(글을 읽다,2006)로 정리한다. 코벨은 우리 역사학계가 일제식민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홀로 우리 한국역사의 자존과 진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역사학자이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출판,2018)

참고로,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편의 건국신화 말미에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百姓)이 즐겨 따라왔기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7[삼국사기]기록) 이는 온조의 기록이 아니다. 국호 백제(百濟)와 성씨 부여(扶餘)는 구태와 연유된 기록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를 시조로 확정하면서 구태 기록을 온조 기록에 편입시켰을 뿐이다.

백제 시조신화는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신화와 달리 사실성이 매우 강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든가 또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 신성성이 강한 천손, 난생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백제 시조신화에는 적잖은 역사가 굴절되어 있다.

시조신화 기록은 실재한 역사적 사실보다 각색한 승자의 진실을 선택한다.

#1 [추모경]권3. 임오년(서기전39년) … 소서노는 구태(仇台)와 정분(情分)이 나서 좋아하다가 딸 아이(阿爾)를 낳았으나, 구태가 졸본의 세족(世族)으로 미려(美麗)하여도 용맹(勇猛)함이 없어 점차 애정이 식기에 이르렀다. 이에 소서노가 추모에게 개가(改嫁)하고자 사람을 시켜서 구태에게 자살(自殺)하라 권하고서 지아비가 죽었다고 칭하였다. (召西與仇台情好生女阿爾 仇台以卒本世族美而無勇遂至爱衰 召西奴欲改嫁于芻牟使人勧仇台自殺而稱丧夫)

#2 [백제서기] 시조 비류왕. 원년(서기전18년) 1월,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烏干), 마려(馬黎)와 순서(蓴西)에서 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모였다.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元年癸卯 正月 沸流東行 南渡帶水 至彌鄒忽 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 蓴西南行 而渡浿河 亦會于彌鄒忽 立沸流爲王)

#3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4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요동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군에 속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와 선비(鮮卑)가 강하였는데, 공손도는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게 종녀(宗女)를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5 [고구려사략] 태조황제기. 11년(122년) 2월, 상이 다시금 마한(馬韓), 구다(勾茶), 개마(蓋馬) 등 3국의 군사를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려(勾麗)를 쳐서 빼앗았다. 요광(姚光)은 달아나다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구태는 서자몽(西紫蒙)으로 피해 들어가서 서부여(西扶余)를 자칭(自稱)하였으나, 후에 우문(宇文)씨에게 쫓겨났다. (十一年壬戌 二月 上復引馬韓勾茶盖馬三國兵 伐川西勾麗 拔之 姚光逃走 為其部下所殺 仇台逃入西紫蒙 自稱西扶余 後為宇文所逐) 이 내용은 [삼국사기] 태조왕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6 [당회요]. 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 마한(馬韓)의 옛 지역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백가제해(百家濟海)하였는데 백제(百濟)의 국호는 이에 따른다. 동북쪽으로 가면 신라에 닿는다.(百濟本 夫餘之別種 當馬韓之故地 其後 有仇台者 高句麗所破 以百家濟因 號百濟 東北 至新)

#7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박찬우 시민기자  horizon10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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