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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의 요람, 미추홀의 슬픈 자화상미추홀은 경기 인천이 아니라 충남 아산이다.
박찬우 시민기자 | 승인 2019.07.17 14:56

수정: 서기2019.07.18. 21:56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⑦ 백제 초도 미추홀의 두 얼굴

 

비류백제가 시작한 곳, 미추홀의 위치비정

미추홀이 인천이냐, 아산이냐 다툼 대두

백제는 온조 백제와 더불어 초기 두개로 시작

 

▲ 인천시는 2018. 3. 20 ‘인천광역시 남구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제15499호)’을 공표하고, 2018. 7. 1 정식으로 미추홀구를 출범시킨다.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한다. 역사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도 새롭게 해석되며 또한 미래를 창출한다. *출처 : 구글이미지

2018년 7월, 인천시는 남구의 명칭을 미추홀구로 변경하고 정식 출범한다. 백제 초도(初都)인 미추홀을 인천시가 행정명칭을 통해 공식적으로 품에 안는다. 우리는 미추홀을 인천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렇게 믿는다.

정말로 인천이 미추홀(彌鄒忽)일까?

미추홀 지명의 시작은 백제 건국시조 비류와 온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형제가 고구려에 있을 때, 당시 고구려 유리왕(2대)은 비류,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3분할하여 통치한다. 이때 비류는 미추홀을 도읍으로 삼아 고구려의 북쪽과 동쪽을 담당한다.(#1고구려사략기록) 미추홀은 고구려 땅에 존재한 비류의 세력기반이다. 이후 어떤 사유로 3분할 통치가 갑자기 중단되고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한다.

패대의 땅이 기름지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지만 어떤 사유에 의해 그곳의 땅을 얻지 못하고 진번(진한과 번한) 사이의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게 된다. (#2태백일사기록) 대동강 유역과 예성강 유역에는 이미 한족 유민이 강력한 집단을 이루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구체적인 경로는 [백제서기] 비류왕 원년(서기전 18년) 기록에 나온다. 비류가 동쪽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온조는 남으로 가다가 패하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모였다고 되어있다.(#3백제서기기록) 이때 먼저 도착한 비류는 자신의 옛 도읍 명칭인 고구려 미추홀을 가져온다. 한반도 미추홀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 유리왕, 비류, 온조의 분할 통치는 1년을 가지 못한다. 사진은 비류와 온조의 남하 경로. 서기전17년 1월, 비류가 먼저 내려오고 후에 다른 경로로 온조가 내려오게 되어 미추홀에서 모여 비류를 왕으로 세운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2018)

그런데 미추홀의 위치를 놓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르게 비정한다.

먼저 [삼국사기]는 ‘금인주(今仁州)’로 기록한다.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의 인주(仁州)이다. 인주는 지금의 인천시가 맞다. 그러나 당시 고려 인종(17대)은 어머니 문경태후의 친정이 있는 곳이어서 특별히 ‘仁(어질 인)’자를 붙여 인주로 변경한다. 원래 이 지역은 고구려의 매소홀(買召忽-경기수원)이다. 통일신라시기 경덕왕이 소성현으로 개명하고, 고려초기 경덕군으로 불리다가 인종이 문경태후를 배려하여 인주로 승격시킨다. 당시 김부식은 고려왕실 사정을 고려하여 [삼국사기]에 매소홀을 미추홀로 적는다. 이후 조선의 [세종실록지리지]도 [삼국사기] 기록을 준용하여 매소홀과 미추홀을 병기한다.(#4세종실록지리지기록) 결과적으로 김부식의 판단으로 매소홀이 미추홀이 되고 또 오늘의 인천이 된 것이다.

▲ [삼국사기]<잡지> 신라 한주(漢州) 편이다.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慶原買召 一作彌趨) -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인주(今仁州)이다.(경원매소 또는 미추라고도 한다.) 동(同) <잡지> 고구려 한산주(漢山州) 편에도 買召忽縣(一云彌鄒忽) - 매소홀현(미추홀이라고도 한다) 로 기록한다. [삼국사기]는 매소홀과 미추홀을 병기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옥산사원본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인주(仁州)’로 기록한다. 일연이 지목한 인주는 지금의 충남 아산군 인주(仁州)면 밀두리(密頭里)이다. 충남 아산을 인주로 개명한 시기는 고려 초이다. (#5동사강목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되기 훨씬 이전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잡지>에 ‘단밀현(單密縣-경북의성)은 본시 무동미지(武冬彌知)’라는 기록이 있다. ‘彌’는 ‘密’와 같다.(*[고구려사략]은 고구려 미추홀을 밀산(密山)이라 함). 또한 ‘鄒’는 ‘頭’와 동음어이다. 따라서 미추(彌鄒)는 밀두(密頭)이다.

결론적으로 미추홀은 인천이 아닌 충남 아산일 공산이 크다.

특히 인천의 결격사유는 김부식이 매소홀과 미추홀을 혼용해서 쓴 점이다. 참고로 온조는 비류로부터 2단계 분립과정을 겪는다. 1단계는 미추홀에서 직산위례성(충남천안)으로,(#6삼국유사기록) 2단계는 직산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경기광주)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백제 ‘한성시대’를 개막한다. 따라서 김부식의 비정대로라면 온조는 처음 인천에서 천안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하남(광주)으로 올라와야 한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이동이다.

 

▲ [삼국사기]가 ‘금인주(今仁州)’로 표기한 인천 비정은 편찬당시 고려조정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김부식의 역사통찰 부족이 불러온 오류이다. [삼국유사]의 일연이 지목한 ‘인주(仁州)’ 즉 충남 아산이 실제 미추홀이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출판,2018)

최근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면서 지역내 과거 역사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다. 적잖은 유적이 재건되고 스토리텔링이 양산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칫 무리한 고증으로 역사 자체가 왜곡될 소지도 있다. 이제는 한번 정도 옳고 그름을 진중하게 따져올 때이다.

※ “패대의 땅”을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으로 설정하는 견해도 있다. (『환단고기』, 상생출판 저) 그러나 지금의 하북성 난하는 당시에도 낙랑군, 현도군이 건재한 시기로, 이주민이 자리잡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 [고구려사략]<광명대제기>이다. 三年甲辰 正月 以順奴艴奴爲沸流治 都彌鄒忽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 涓奴黃龍荇茶卑離上與召皇后治之 以慰召后之心. 3년(서기전17년)갑신 정월, 순노와 불노는 비류(沸流)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미추홀(彌鄒忽)로, 관노와 계루는 온조(溫祚)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우양(牛壤)으로 하였으며, 연노와 황룡, 행인, 구다, 비리는 상(*고구려 유리왕)이 소(召)황후와 함께 다스리게 하여 소황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2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이다. 高朱蒙 在位時 嘗言 曰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庚寅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南至帶水 東濱大海 半千里之土境 -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였다. “만약 적자 유리(琉璃)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고 경인년(서기전31년) 3월에 사람들로부터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辰番)사이의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10년을 살면서 밭을 사서 장원을 설치하고 재산을 모아 몇 만금에 이르니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으로는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는 대해(大海)의 끝까지 5백여리 땅이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소서노가 한반도를 선택한 이유는 한반도 진한과 번한 사이의 바닷가 외진 곳에 소서노가 미리 확보한 경작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3 [백제서기] 비류왕 원년(18년) 기록이다. 元年癸印 正月 沸流東行 南渡帶水 至彌鄒忽 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

蓴西南行 而渡浿河 亦會于彌鄒忽 立沸沸流王 - 비류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윈했다. 온조는 모간, 마려와 순서에서 남으로 가다가 패하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모였다.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4 [세종실록지리지] 인천군 편이다. 仁川郡 本高句麗買召忽縣(一云彌趨忽 一云慶原買召) - 인천군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이다.(미추홀이라고도 한다. 경원매소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기록과 같다.

#5 [동사강목] 고려 태조 신성왕(神聖王) 왕건(王建)원년(918년) 8월 기록이다. ‘고려가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초토사(東南道招討使)로 삼았다. 이때 고려 대신들이 안에서 많이 배반하여 웅주(熊州), 운주(運州)<운주는 지금의 홍주(洪州)로 고려초에는 운주라 하였다>등 10여 군현이 다시 진훤(甄萱)에게 귀부되니, 행도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지인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仁州諸軍事)<인주는 뒤에 아주(牙州)로 고침, 지금의 아산(牙山)>를 삼았다. 충남 아산이 인주(仁州)로 개명된 시기는 고려 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아산현의 건치연혁에도 아산현을 고려 초기에 인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6 [삼국유사]<왕력> 백제 편이다. 第一溫祚王 東明第三子 一云第二 癸卯立 在位四十五 都慰禮城 一云蛇川 今稷山 - 제1대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이라고도 한다. 계묘년(서기전18년) 즉위하고 재위는 45년이다.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박찬우 시민기자  horizon10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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