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는 본래 우리역사 앞마당이나 지금은 우리집단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글: 공관(동북중앙아시아연대의장)

 

단재 신채호,

‘단군 이후에 한 번도 완전한 통일,

부여 고토 회복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인식과 기억이 나라를 흥하게 해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반도국가지만 바다를 이용해

강대국으로 성장,  한 시대를 주름잡아

우리는 근세조선이후 압록강 이남에 갖혀 옛 기상 사라져

 

▲단재 신채호 영정. 단재는 일제역사침략에 맞서 역사전쟁을 벌였다. 사상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여 역사를 잃는 것은 미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가 대표 저작이다.

■19세기 말, 청·일. 러·일 전쟁기의 조선의 운명

지금으로부터 120년여 전, 섬족 왜국이 승세를 탔다. 한반도 강점/식민지화를 위해 용과 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들의 뒷배는 미·영의 앵글로색슨족이었다. 1895년 그들은 인구나 영토가 열배와 스무곱이나 되는 만주족 청국에게 도전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10년 후인 1905년, 슬라브족 제정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두 전쟁 모두 한반도 지배를 두고 싸운 전쟁이었다. 왜족은 기고만장했다.

그들은 1904년 조선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했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했다. 조선의 운명은 이미 기울었다. 한반도가 사실상 섬족속 왜국에 넘어간 것이다.

이제 병탄만 남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1.2.차 영·일동맹(1902.1905)을 맺어 영국은 인도를, 왜국은 한반도를 지배하기로 했다.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밀약(1905)과 루트-다카하라 협약(1908)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식민지로 하기로 합의했다. 섬족속 왜국은 큰 틀에서 놀았다.

■단재의 조선 망국 원인 분석과 한민족 부흥을 위해 쓴 혈사 「독사신론」

그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사신론」을 썼다. 자강론적 민족주의(*1) 입장에 서서 사론史論을 펼쳤다.

선생의 나이 28살이던 해였다. 그의 초기 저작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일보〉에 1908년 8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연재했다. 「발해의 존망」까지 연재했다. 무슨 사정인지 완결 짓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한민족이 대륙 고토를 회복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잡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 원인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발해사’를 기재하지 않은 데 있다고 했다.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로서 북방 강역 단군의 부여고토가 우리겨레의 집단기억/인식 속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따라서 압록강 이내가 한민족의 변경할 수 없는 터전으로 굳게 인식/고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토회복의 기회가 왔어도 압록·두만강을 넘어 가 확보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대국이 소국이 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되었다.”(*2)고 통탄했다.

“신채호가 보기에 가장 커다란 역사의 왜곡은 실제로 만주의 영토를 상실한 그 자체보다도 한국이 만주를 점령했던 기억/인식 자체를 삭제해 버린 일이었다.” (*3)

그 결과 우리겨레는 부여고토(만주)에서 한반도로 밀려 갇힘으로써 근세조선에서 망국에 이르렀다.

그 때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21세기 현재도 우리겨레는 조그만 한반도 안에서도 남북으로 갈라져 길항하고 있다. 남북한 동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는 없어지기도 하지만 민족의 집단기억/인식은 영원하다.

그 민족에 있어 역사의 기억/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재는 일찍이 갈파했다.

그의 사상사적 변화진보가 아나키적 민중사관에까지 이르렀지만, 그의 조선독립정신/운동과 사상/역사관의 중심에는 항상 북방 부여고토가 자리하고 있었다.

앙드레 슈미드는 단재를 이렇게 평했다.

“신채호가 보기에 신라를 비롯한 고려와 조선 왕조는 완전한 통일이 아닌 반쪽의 통일로. 완전한 통일(만주 회복)은 단군 이후 없었다.…한국사에서는 단군 이후에 한 번도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기에, 민족의 통일은 여전히 수행되어야 할 과제였다.”(*4) 고.

역사/정치에서 어떤 기억/인식과 어디를 중심으로 해서 보느냐에 따라 지리공간의 의미/정의는 달라진다. 그 역사적 기억/인식과 사상적 자원은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예컨데, 14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19세기 유대인의 ‘시오니즘운동’이 그랬다.

또한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슬람교도들(무어인들)을 완전히 몰아낸다.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재정복운동)의 결과다. 이로써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민족통일국가을 이루었다. ‘아사비야’가 충만했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이베리아반도의 서남쪽 끝의 좁은 영토에 자리한 약소국이었다. 살아갈 방도를 찾았다.

당시 동서교역을 오스만 튀르크가 독점하고 있었다. 비싼 값이 나가는 향신료와 도자기를 대서양과 인도양을 통해 직접 확보하기로 했다.

범선에 총과 대포를 탑재한 전인미답의 해양진출의 대전략이었다. 그 방략은 엄청난 모험과 위험이 따랐다.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한 ‘해양진출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신대륙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약탈했다. 한 세기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사에 해양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인류에게 지구 단위로 생각하는 것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레콩키스타’운동은 인류의 문명사를 바꾼 포르투갈과 스페인 인민의 사상사적 자원과역사적 기억/재해석의 결과다.

그 영향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활과 말을 이용한 기마전술은 한때 역사의 무대에서 밀렸다.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기까지 그랬다.

우리겨레의 지난날에도 좋은 예가 있다. 993년 거란의 1차 고려 침공 때였다. 고려의 서희는 유약한 할지주화론割地主和論자들을 누르고, 거란의 소손녕과의 담판했다. 고려가 고구려와 그 고토의 정통 후계자임을 당당히 내세웠다. 물론 복합적 내외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역사적 기억/인식이 거란에 먹혔다.

또한 압록강 하구 동쪽 전략 요충지 ‘강동6주’를 획득했다. 그로인해 후일 강감찬 등의 찬란한 귀주대첩의 대승리가 있었다. 현재의 국가간의 국경분쟁도 역사적 기억과 지정학적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재 신채호가 쓴 '하늘북' 시가 새겨진 비석

참고

(*1:최홍규 『신채호의 역사학과 민족운동』 일지사, 2005, 57~119쪽)

(*2:『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上』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1998. 형설출판사. 510쪽

(*3: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정여울 역. (주) 휴머니스트, 2007. 527.528쪽)

(*4: 위의 책 527쪽)

(*5: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上』 512쪽)

2019.06.18. 인릉산 아래. 빈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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