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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유목민족의 뿌리, 고주몽은 하늘아들 선우활잘 쏘는 이름 주몽은 별명이며 상해가 본명이고 추모는 건국시조 왕의 특별 칭호이다.
박찬우 기민기자 | 승인 2019.06.10 17:43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②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름에 얽힌 비밀

 

고구려 시조는 주몽(朱蒙)이다. 「삼국사기」 설명에 따르면,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부여 말이다. 현대 우리 속어에 ‘제비’가 있다. 여성을 잘 꼬시는 얍삽한 남성을 빗대어 이르는 비칭이다. 마찬가지로 주몽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주몽이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오는 수렵도. 말위에서 뒤돌아 활을 쏘고 있다. 이른바 배사도라고 한다. 주몽(朱蒙)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부여의 속어이다. 

주몽의 실제 이름은 무엇일까?

「삼국사기」는 주몽의 또 다른 이름을 소개한다. ‘추모(鄒牟)’ 또는 ‘상해(象解)’이다. 둘 중의 하나가 실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먼저 추모를 알아보자. 《광개토왕릉비》도 주몽이 아닌 추모(鄒牟)로 쓴다. 참고로 북방기마족인 훈족(흉노)이 있다. 훈족은 왕을 ‘선우(單于)’라 칭한다. 선우는 ‘천자(天子-하늘의 아들)‘의 뜻이다.

그런데 「유기추모경(留記芻牟鏡)」(남당필사본)은 선우와 추모가 같다고 설명한다. 당시 여러 사람이 선우(單于)에 ‘대(大)’자를 붙여 ‘대선우’라 칭할 것을 건의하자, 주몽은 “선우는 곧 추모이다. 같은 말이며 글자만 다를 뿐이다.

선우는 하늘(天)로 여김이고, 추모는 신(神)으로 여김이다. 신이 곧 하늘이다. 어찌 선우라야만 된단 말이냐?(單于卽芻牟也 同語而異字 彼以為天此以為神 神卽天也 何必單于然後可乎)“고 반문한다.

다시 말해 추모는 고구려 건국시조에게만 붙여진 특별 칭호이다. 훗날 시조의 칭호가 시조의 이름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음은 상해이다. 「삼국사기」 건국신화에 따르면, 주몽의 생부는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解慕漱)를 자칭(自稱)한 인물이다. 북부여왕족 출신의 모수리(불리지)이다. 성씨는 해씨이다.

참고로 주몽의 생모 유화부인은 동부여 금와왕에게 재가한다. 그런데 「추모경」(남당필사본)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금와왕이 크게 기뻐하며 (추모를) 아들로 삼고 이름을 상해라 지으니 해(日)와 같다는 뜻이다.(蛙王大喜 取之為子 名以象解 如日之義)’는 기록이다.

상해는 태양을 뜻하는 주몽의 본명이다. 북부여왕족의 혈통(해씨)을 강조한 이름이다.

「태백일사(太伯逸史)」기록에 따르면 고리군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이들은 위만을 토벌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졌다고 하며, 불리지가 우연히 서압록(요하)를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고 불리지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장가를 들고, 유화는 고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상해를 놔두고 굳이 흔한 말인 주몽을 썼을까?

「삼국사기」의 원사료는 통일신라시기 편찬한 「(구)삼국사」가 기초이다. 「(구)삼국사」는 한반도의 최종승자인 신라인이 정리한 삼국역사의 기록이다.

승자는 역사기록에서도 여전히 승자이다. 패자인 고구려 시조의 여러 이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승자의 몫이다.

결론적으로, 주몽은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몽은 별명이며 상해가 본명이다. 추모는 건국시조 왕의 특별 칭호이다.

▲그림 「태백일사(太伯逸史)」기록에 따른 추모왕의 가계도


「유기추모경(留記芻牟鏡)」

東明七年庚寅 於是順奴國相加再思 卒本國相加延鳳 桓那囯相加桓應 黃竜囯相加于仁 沸流囯相加松讓 荇人國相加旺發等 上大單于之號于上 上曰 “單于卽芻牟也 同語而異字 彼以為天此以為神 神卽天也 何必單于然後可乎.”

동명7년 경인(서기전31년) 이즈음, 순노국 상가 재사(再思), 졸본국 상가 연봉(延鳳), 환나국 상가 환응(桓應), 황룡국 상가 우인(于仁), 비류국 상가 송양(松讓), 행인국 상가 왕발(旺發) 등이 대선우(大單于)라는 칭호를 상께 올리니, 상께서 이르길 “선우(單于)가 곧 추모(芻牟)이다. 같은 말이며 글자가 다른 것이다. 선우는 하늘(天)로 여김이고 추모는 신(神)으로 여김이다. 신이 곧 하늘이다. 어찌 선우야만 된단 말이냐?” 하였다.

「추모경(芻牟鏡)」

昭陽大淵 暮春之月 四月五日,鳳凰来鳴,天香滿地天樂下空 芻牟誕生 氣骨英異 蛙王大喜 取之為子 名以象解 如日之義

소양대연(계해-서기전58년) 모춘지월(늦봄)인 4월 5일에 봉황이 와서 울고 천향(天香)이 땅에 가득하며 천악(天樂)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추모가 태어났다. 기골이 유별나게 특출하여 금와왕이 크게 기뻐하며 취하여 아들을 삼고 이름을 상해(象解)라 지으니 해(日)와 같다는 뜻이다.

「태백일사(太伯逸史)」

槀離郡王高辰解慕漱之二子也 沃沮侯弗離支高辰之孫也 皆以討賊滿功得封也 弗離支嘗過西鴨綠 遇河伯女柳花 悦而娶之生高朱蒙

고리군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이들은 위만을 토벌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졌다. 불리지가 우연히 서압록(요하)를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불리지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장가를 들고, 유화는 고주몽을 낳았다.

※ 참고하여
남당필사본은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해온 삼국의 역사서와 개인 문집 등 총 86권의 서책이다. 이 중 고구려편은 『유기추모경留記芻牟鏡』,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개소문전蓋蘇文傳』, 『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천강태후기天罡太后記』이며, 백제편은 『백제왕기百濟王記』, 『백제서기百濟書記』이고, 신라편은 『신라사초新羅史抄』, 『위화진경魏華眞經』, 『상장돈장上章敦牂』, 『화랑세기花郎世記』 등이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남당의 후손 박인규가 소장하고 있는 유고서책 일부를 촬영하여 보관중이다.

참고로 살펴보면 추모왕의 일대기를 정리한 남당필사본은 3종류가 있다. 「유기추모경」, 「추모경」, 「추모경연의」이다. (아래 사진 참조) 유기추모경과 추모경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추모왕의 생부인 북부여 모수제(「북부여기」에 나오는 고모수)부터 추모왕까지의 기록이다. 남당은 유기추모경에 대해서는 고려 전기 문신 황주량이 편찬한 사실을 책 첫머리에 밝히고 있다.

(아래사진) 추모경은 저자는 밝히지 않고 내용만을 전한다. 남당이 따로 따로 필사본을 나눈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다만 유기추모경은 원고지에 필사한 내용이고, 추모경은 정서한 내용이라고 한다.

(아래사진) 작가의 소견은 남당이 먼저 추모경을 발견하고 정서한 후에 추가로 유기추모경을 발견하여 급히 원고지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황주량이 고려 때 편찬한 유기추모경이 원본이고 추모경은 이후 누군가가 유기추모경을 참조하여 별도로 추모경을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유기추모경이나 추모경이나 내용이 거의 동일하니 같은 계열의 사서임에는 틀림없다. 추모경연의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일종의 소설이다.

초기부분은 맞으나 뒷부분은 다르다고 한다. 특히 일본어로 가필된 부분이 있어 일본인을 쓴 것을 남당이 필사해 온 것인지 아니면 남당이 직접 일본어를 첨하며 쓴 것인지 확실치 않다. 

▲ <유기추모경> -황주량. 앞부분 해석 ‘추충진절문덕광국 공수태보특진 겸 문하시중 판성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인 신 황주량이 칙명을 받들어 엮음. (*일종의 관찬사서)

황주량(黃周亮)은 (출처 다음백과)
1004년(목종 7) 문과에 급제했으며, 1013년(현종 4) 시어사로서 최항(崔沆)·김심언(金審言)·최충(崔沖) 등과 함께 수찬관이 되어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 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024년 어사중승이 되었으며, 이어 태자소첨사·형부시랑·국자좨주·한림학사 등을 거쳐 1030년 태자우서자·중추부사가 되었다.

1032년(덕종 1) 중추사로서 수국사가 되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七代實錄〉 36권을 완성했다. 1033년 판어사대사·호부상서를 지냈으며, 1034년 정당문학·판한림원사를 거쳐 이부상서가 되었다.

그해 정종이 즉위한 뒤 예부상서·참지정사를 역임했다. 1038년(정종 4)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고, 1043년에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 칭호를 받았다.

그해 수태보 겸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임명되고, 상주국 훈위를 받았다.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지공거를 겸해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 선종 때 개부의동삼사에 추증되었으며,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문이다.

▲<추모경>. 남담 박창화 선생이 남긴 고구려 역사를 담은 사료.
▲<추모경연의> 남당 박창화 선생이 남긴 고구려 사료.
▲ <화랑세기>등 일본 궁내성에서 우리 고대사 희귀사료를 필사해서 국내로 들여온 남당 박창화 선생

박찬우 기민기자  horizon10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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