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유를 말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모른다.

 

글: 화륜華輪(민들레 대안 교회 목자)

 

 

산양과 같은 자유를

한국교회에서는 찾기 어려워

목사들이 사육하여

털을 제공하는 양들만 가득

 

▲산양들의 암벽타기. 산양들은 암벽을 타는 데 통달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찾아 암벽 이끼를 뜯어 먹고 있다. 워험하나 자유롭다. 가축으로써의 양들은 주인이 보살펴서 안전하기는 하나 고기와 털을 제공해야 한다. 기독교회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든다. 교회신도들은 목사에게 정신안위를 얻는 대가로 돈과 재물, 로동력을 바친다고 풍자된다(편집인 말). 사진: https://www.pinterest.co.kr/pin/207236020338450844/?autologin=true

어려서부터 인간의 손에서 자란 야생동물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도움으로 살수밖에 없는데

먹을 것 걱정 없고,

쉽게 병들어 고생하지 않고

다른 맹수들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낙원이라 할 수 있는데

왜 동물은 야생으로 돌아가야 행복하다고 하는 걸까요?

탈 식민 토착예수를 이야기하면서

야훼에게 너무나도 길들여진 사람들을 봅니다.

야훼에게 묶여있으면서

스스로 자유한다고 하고 그것이 자유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자유?

자유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서 그런 걸까요?

천만에 말씀, 종교에 길들여져서 그런 겁니다.

애굽에서 나와 배가 고프자,

사람들은 애굽에 두고온 고기 솥단지를 그리워 합니다.

그 그리움에 부응하여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 금송아지가 바로 지금은 교회입니다.

고난이 기다리는 삶이지만

삶으로 나오지 않고

종교 안에서 숨어서

"난 자유해~~ 난 사랑으로 넘쳐~~"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을 가축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교인을 양이라고 합니다.

가축인거지요.

개가 짖으면 몰려다니고

주인을 위해 풍성한 털을 소중하게 지킵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위한 털이 아니라.

주인님의 주머니를 불려줄 털이라는 겁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바윗돌에 살며

늘 맹수들의 위협 속에 살지만.

넓은 산을 뛰어다니는 산양의 삶은 모르는 겁니다.

제가

기독교에 목사로 남아 여전히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유는

절대 산으로 가지 못하는 양들 때문입니다.

자유하고 싶지만,

자유를 갈망하지만 단 한 번도 자유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없는 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털을 노리고 키우는 양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유의 삶을 누리는 날까지

전 울타리 밖에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고쳐 잡아라,

하느님 나라가 문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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