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소학교부터 늘 급우들이 조선인을 정벌하자 놀려댔다

글: 김달수(재일동포 고대사연구가)

일본 속의 한국1

일제는 허위로 가득찬 <일본서기>속

신화인물 신공황후를 역사사실로 교육

신라, 백제, 가야가 정복되었다고 날조

일본 유물, 유적, 성씨를 보면 이 땅에서

모두 이주한 사람들이 개척한 나라 증명

 

▲ 일본 나라현에 있는 동대사. 백제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나까노기미마로(國中公麻呂)도 참여했는데 백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위키백과

우리가 일본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그대로 마주하고자 함이다. 때문에 역사연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

일제치하 소학교시절의 내가 배운 소학교 국사는 다음과 같다.

맨 처음에 일본 시조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을 배웠다. 둘째는 신무천황, 세 번째가 일본무존, 네번째가 신공황후였다.

일본 제국 신공황후 편에 제14대 중애천황의 황후는 타고난 성품으로 씩씩하고 높은 덕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다. 천황대에 구마소(熊襲: 지방부족의 이름)가 복종하지 않아 천황이 황후와 함께 규우슈로 내려가 이를 정벌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정정한 천황이 죽었다.

이때 신라-백제-고려의 삼국이 있어 이를 삼한이라 불렀는데 당시 일본은 신라와 가까웠고 세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이 구마소도 신라가 부추킨 탓이라고 했다.

일본 신공황후가 신라를 굴복시키면 구마소도 저절로 평정되리라 여겼다. 다께시우찌노스쿠녜(武內宿禰)와 상의하여 친히 병력을 이끌고 신라정벌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860년이었다다.

군선을 몰아 신라로 쳐들어 가자, 신라왕은 놀라서 복종했다고 한다. 평소 동쪽 편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어 천황이라 불리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마다 공물을 바치겠다고 했다고 한다.

멀지 않아 백제 고구려 두 나라도 따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15대 응신의 대가 되자, 왕인이라는 학자가 와서 학문을 전했으며 베를 짜는 사람과 대장장이 등의 직인도 잇달아 건너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세력이 열도에 한층 더 퍼지게 되었다.

조선에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의 삼국이 있어 이를 삼한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구려를 일본에서는고마(고려)라 불렀다. 이것은 삼한은 아니다.

삼한三韓이란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진한,변한馬韓,辰韓,弁韓을 말한다. 이 삼한三韓이 나중에 백제百濟ㆍ신라新羅ㆍ가야加耶가 된다. 가야는 안라安那 등을 포함한 가야제국加耶諸國, 가라제국加羅諸國이라고도 한다.

때가 서기860년이었다고 하는 것은 소위 황기皇紀를 말한다. 이를 서력으로 고치면 서기200년 야요이(彌生)시대다. 아직 고분古墳시대도 되지 않은 때다.

야요이 시대에 제15대 응신대가 되자 백제로부터 왕인王仁이라는 학자가 와서 학문을 전했으며 베를 짜는 사람과 대장장이 등의 직인도 잇달아 왔다고 전한다.

야마토국도 경도도 열도로 이주한 백제, 신라인이 세운나라

동대사東大寺는 사찰의 대불이 백제계 이주민, 구나까노기미마로(國中公麻呂)등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 제1의 목조건물로 지금도 남아있는 그 대불전大佛殿은 신라계 이주민, 이나베노모모요 (猪名部百世) 등의 손으로 세워졌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곳은 한국이었다.

한층 더 강한 느낌을 받은 더 결정적인 것은 당초제사唐招提寺로부터 약사사藥師寺에 이르는 짧은 길목이었다.

기와가 너무 낡아 금방 무너질듯한 토담이나 그 주위에 보이는 나가야몽( 長屋門 : 양쪽에 행랑방같은 것이딸린 문)이 있는 민가의 구조 등 완전히 한국 그 자체였다.

그와 같은 민가는 관동지방 등지에도 있긴 하지만 그때까지 동경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유명한 법륭사法隆寺도 그와 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법륭사法隆寺에는 백제 이름 그대로 지닌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이 수백년동안 있었다.

야마토국은 원시일본이 탄생한 고향

당초 왜국倭國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훗날 효덕孝德천황시절(645~654)에 대화大和(야마도)로 바뀐 뒤 일본의 총칭總稱처럼 되었다. 왜국의 왜도 야마또라고 소리난다. 야마또國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가장 유서깊은 문화지대이며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있다.

때문에 석기시대로부터 유적이나 궁적宮跡, 제릉帝陵, 고분古墳 등이 풍부하게 남아 그 당시의 문화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야마또 분지盆地는 四方山으로 에워싸여 內部통일이나 자위自衛에 편리했다. 또 분지盆地의 中央에서 오오사카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야마또 江(大和川)이 세또(瀨戶)내해를 지나 오오사카로 오는 길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야마또가 일찍부터 열려 있었음을 말한다.

당시는 귀화인인 한씨漢氏, 진씨秦氏가 많았고, 그들의 대다수는 남쪽 야마또의 다께찌(高市)군에 거주하며 문서기록을 맡은 사부史部가 되어 조정朝廷에 출사했다.

불교가 전래되고 부터는 아스카의 땅은 더욱 번영하여 많은 대사원 세워졌으며 급기야는 도읍이 이곳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그 후 수시로 야마또 땅으로 천도遷都할 계획이 있었지만 아스카세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이것이 아스카지방에 많은 궁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들 귀화인은 나라조정 말기가 되어 다께찌군의 인구 8~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야마또의 가쯔라기(葛城)지방에 있던 하타씨(秦氏)가 이끄는 이주민은 나중에 야마시로노구니(山城國 현재의 京都지방)에 자리잡고 재력을 쌓았다. 이에 따라 나가오까(長岡) 혹은 헤이교안(平安京)으로 천도했다.

「당시 漢氏 秦氏의 귀화인이 많았고」 「귀화인은 나라조정 말기가 되어도 다께찌군 인구의 8~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를 두고 귀화인라 말할 수 있을까.

그곳에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귀화인이라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국가설립이전의 이주민이라 부르고 있다. 다께찌군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고대국가인 소위 야마또 조정이 성립된 곳이다.

그리고 701년 나라의 헤이안교(平城京)로 옮겨가기까지 그곳이 고대일본의 수도였던 아스카 중심지였다.

이를 기초로 볼 때 다께찌郡은 이마노고오리(今來郡)으로 나중에 군郡으로 바뀐다. 군郡은 일본어 소리로 ‘고오리’다. 이는 우리 말 ‘고을’을 뜻한다. 우리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마노(今來)란 「나중에 새롭게 온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온(後來)도 있을 것이다. 또 이마노(今來)가 있다면 당연히 「앞서온」 (先來)과 후루끼(古來)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야마토 심방探訪이란 책자 「歷史」 항목에 적힌 것이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인용되고 있다. 거기서 말하는 아야씨(漢氏)가 사실은 한반도의 신라, 가야계加耶系 이주민이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후 일본 역사 특히, 고대사에 커다란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일본천황통치 권위와 전통을 설화형식으로 구성한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도 새롭게 읽으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도 오래된 <고비군사吉備郡史> 등에는 「야마또란 사실상 한씨漢氏의 나라」 야마시로(山城)란 사실상 진씨秦氏의 나라로 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소위 「귀화인歸化人」인, 곧 내가 말하는 이주민은 야마또의 나라나 교오또(京都)의 야마시로에만 퍼져 있었던게 아니었다. 관서關西나 관동關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전국의 가는 곳마다 어디에나 거의 다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글쓴이 김달수金達壽(서기1919생-1997몰)

경남 창녕출생, 1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졸업,  언론인, 고대사연구가, 평론가, 작가로 성장한 재일동포. 저서: <일본속의 조선문화 12권>, <김달수 평론집>, <김달수 소설집>

이 글은 그가 서기1985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 중 초반부 것이다. 본 기사가 난해하고 일본어투가 많이 섞여 이해하기가 어려워,  우리 어법에 맞게 모두 다시 다듬어 쉽게 옮긴 것임을 밝혀둔다. 또 일본용어가 아닌 우리용어로 바꾸었다. 이를태면 '도래인'을 '이주민'으로 고쳤음을 밝힌다. 본지에서는 그의 글을 연재할 예정이다.

자료제공 : 이대구 선생(고대사연구가)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