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공적을 띄우려고 3.1혁명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서기1918년 제1차 세계대전종료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풍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몽양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의 활약

3.1혁명 대폭풍, 기폭제 역할 조명

 

▲조선개국4352.03.16.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서울시의회 제2대회의실에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는 3월 강좌가 있었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3.1운동의 기폭제'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3.1운동이라는 대폭풍을 만들어 내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게 상해에 있던 몽양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이다. 파라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실제로 유일하게 대표를 파견한 조직이 여운형의 신한청년단이다.”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조선개국4352.03.16.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서울시의회 제2대회의실에서 이 같이 말했다. 몽양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3월 강좌였다. 

정 교수는 이날 ‘3.1운동의 기폭제’를 주제로 강연했다. 몽양 여운형이 3.1혁명이 일어나는데 결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의 강연요지다.

그는 여운형과 그가 조직한 신한청년단이 3.1혁명을 전후해서 맹활약을 한 덕분에 3.1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여운형의 출중한 능력때문이라고 풀었다. 여운형의 신속한 정세 판단, 과감한 행동력, 치밀한 교섭력을 꼽았다.

그는 먼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이것이 3.1혁명을 몰고온 결정역할을 한 듯이 주장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단을 만들어 이들을 이끌면서 3.1혁명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신한청년단의 우사 김규식의 뛰어난 지식과 자기헌신이 결합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대표파견이라는 큰일을 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거나 대표를 파견하려던 다른 단체도 있었다고 전제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도 서기1918년 12월,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을 대표로 파견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대표단은 파리강화회의 미국대표단과 미국무부의 저지로 좌절되었다고 밝혔다.

3.1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소앙과 김탕이 파리에 갔고, 미국에서도 여운홍이 일본, 한국, 중국을 거쳐 파리에 갔다고 했다.

유럽에 거주하던 이관용, 황기환 등도 파리로 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국민회의는 윤해, 고창일을 파리로 파견했다.

또 호서, 영남 유림들도 김창숙을 대표로 하는 수백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요구서를 김규식을 통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도록 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에 있었는데 이 때 승전국의 강자로 부상한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영구평화정신을 내세웠다. 이에 고무되어 우리도 독립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여운형이 이러한 흐름을 잘 읽고 미국에 일제로부터 독립시켜달라고 시도했다고 소개했다.

서기1918.11. 상해에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와 있던 찰스 크레인(Charles Crane)에게 청원서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활약을 했다고 한다.

청원 편지 서문을 보면, 1차세계대전은 미국 참전으로 승리한 것이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을 높이 칭송하고, 일본 제국주의는 인도주의 평화주의 국제연맹과는 맞지 않으며 조선침략 등으로 세계평화에 장애물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크레인에게 한국을 4천 2백년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라고 했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도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암 손병희, 무언 김교헌,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등 독립투사들이 거의 예외없이 투철한 민족사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몽양 여운형도 민족사관으로 무장하고 독립전쟁에 뛰어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역사비평>를 필두로 소위 민주, 진보입네 하는 세력은 이를 증오, 싫어한다. <역사비평>에는 우리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이 집단은 서기2016년 특집기사를 실어 민족사관을 사이비역사라고 맹 비난을 퍼부었다. 학위조차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자들을 내세워 단군과 민족을 증오하고 우리민족이 중국 한나라 식민지배를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4백년 이상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기경량, 안정준, 위가야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또 조인성의 경희대 역사관련 연구소와 합작하여 수차례에 걸쳐 <역사비평> 공간과 경희대 그 연구소를 넘나들며 민족사학 타도를 주제로 하는 모임을 가진바 있다.

몽양 여운형은 미국특사 크레인에게 보내는 청원서 본론에서도 미국의 마음을 사기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제가 105인 사건에서 보듯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고 성경교육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임을 염두에 두고 한 애원이다.

정 교수는 이런 것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게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었다고 보았다.

이런 우리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하는 미국은 어땠을까.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의 대표파견을 저지시켰다. 이게 미국의 뜻이었다.

이미 일본과 서기1905년에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우리나라를 일제에게 팔아먹은 미국이다. 일제의 한국강제병합은 미국의 승인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우리를 일제 식민지로 밀어 넣은 것이 미국이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당시 강대국 열강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충분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미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코 한국 독립을 시킬 뜻이 없었다.

이런 속내도 모르고 고종임금에 이어 우리는 미국을 구세주로 생각하고 마르고 닳도록 미국 바지 붙들고 애원했다.

몽양 여운형이 미국 특사 크레인에게 보낸 독립청원서를 보면 처참한 슬픔이 밀려온다. 미국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지금은 다를까. 우리를 구해줄 우방이고 마지막까지 지켜줄 혈맹국일까. 일본이 독도를 빌미로 전쟁을 벌이면 미국이 우리편 들까. 해방이후 우리 현대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날 강연장은 관심갖고 몰려온 시민들로 꽉 찼다. 본 강연에 앞서 서론을 풀고 있는 이화여대 정병준 사학과 교수.

정 교수는 이어 신한청년단 창설과 활동을 전했다. 20세이상 40미만으로 하는 유능한 청년들을 당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기1919.01. 경에 조직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눈에 띄는 것은 조직도가 총재-이사장-이사-직원으로 되어 있는데 총재자리는 비워두었다고 한다. 이사장은 김규식으로 두었다.

총재에 의암 손병희를 추대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총재로 의암 손병희를 생각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정 교수는 몽양 여운형이 3.1혁명의 기폭제, 대폭풍우를 몰고 왔다고 했다. 3.1혁명 뒤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는데 주요 구성원이 몽양의 신한청년단 회원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몽양이 없었으면 3.1혁명도 없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의암 손병희와 천도교가 없었으면 3.1혁명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기획부터, 독립선언서 인쇄, 자금조달, 민족대표 끌어모으기 등 의암 손병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정 교수도 이날 의암 손병희와 천도교가 3.1혁명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피해갈 수 없었다.

몽양과 신한청년단이 3.1혁명에 절대 기여했다면서 강연 내내 칭송을 이어갔지만, 천도교 역할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는 신한청년단 활동에 자금이 필요했다고 한다. 자금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고 한다. 개신교측의 이승훈, 조만식 등을 거쳐서 독립운동자금모금이 추진되었다.

이는 신한청년당원 선우혁의 부탁으로 진행되었다. 같은 당 김철은 서기1919.02.서울에 잠입해 천도교 측과 접촉해 독립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받았다. 또 의암 손병희가 3만원을 송금하기로 했다고 한다.

몽양의 신한청년단 활동의 기반이 되는 독립운동자금에 실제로 돈을 준 것은 천도교라고 정 교수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다른 세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금을 주었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뜻이 좋아도 이루기 힘들다. 실행력을 보장하는 것이 돈이다. 천도교가 몽양 여운형의 신한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실상이 이러한 데도 이날 정 교수는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주최 강연이어서 인지 지나치게 여운형을 강조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그는 여운형을 ‘교회오빠’로 비유하며 찬양을 넘어 추종자 수준의 모습을 보였다.

잘 생기고 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도 잘하고 연설도 잘하고 기독교인이서 요즘 말로 하면 ‘교회오빠’소리 들을 만한 출중한 위인이었다고 찬양했다.

이날 강연은 여운형의 일대기를 알리는 자리와도 같았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모스크바에 고려공산당 대표로 참석한 일화도 소개했다.

이러한 몽양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방면 경험이 해방공간에서 균형잡힌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날 이승만의 민낯도 밝혀졌다. 파리강화회의에 재미 한국인단체에서도 대표를 파견하려고 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명단에 들어가 있었지만 독립청원해 봤자 소용없다고 보아 파견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대신에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이 아니라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해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정 교수는 이승만을 주제로 박사학위 받았다면서 이승만의 기회주의 행태를 꼬집었다. 그는 몽양과 신한청년단이 3.1혁명을 전후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것 등 사진을 안 남겨놨다고 아쉬워 했다.

반면에 이승만은 무슨 일을 하기전에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 놓는다고 비꼬았다. 연미복 같은 옷으로 멋있게 차려입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놓는다고 비판했다.

▲ 정 교수가 몽양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의 활약을 소개하면서 의암 손병희 천도교가 독립자금을 지원한 것을 알리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여러 질문이 나왔다. 그 중에 요즈음 자유한국당 원내총무라는 인물의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을 일으켰다’는 발언이 도마위에 올랐다.

여운형의 독립투쟁을 주제로 한 강연 목적이 다시는 일제치하 같은 망국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새기기 위함이 아닌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일제치하와 하나 다르지 않다. 독립된 국가라고 볼 수 없다.

국민세금이 투입되는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유력정당 원내대표 입에서 일제 조선총독부에서나 나올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고 있다.

정 교수는 근현대사를 다루는 학자다. 진보를 자칭하는 역사학자들이라면 모여 성명서라도 내놔야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타성 질문이었다. 이에 정 교수는 뭐 그렇게 까지 할 필요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 강연 이후 이 같은 질타 때문인지 며칠전에 역사학계에서 '반민특위가 국론분열' 운운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성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 이날 강연에 앞서 이부영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라며 모임의 취지에 맞는 행동을 강조했다.

이날 주최 측에서는 기자의 영상취재를 거부했다. 정 교수가 영상촬영을 원하지 않아서 그런다고 했지만 주최측의 뜻으로 보였다.

중간 중간에 사진촬영은 허용했지만 조금이라도 영상촬영을 하는 것으로 보이면 뒤에서 감시하고 있다가 ‘내리라’고 쏘아 부쳤다.

몽양 여운형을 적극 알리고자 취재간 것인데 성명서 발표에 시큰둥한 것에 이어 이런 대접을 받으니 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몽양도 이 상황이었다면 찍지 말라고 윽박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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