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5.18광주학살이 세상에 바로 알려진 것은 잊혀진 두 성직자 덕분이다.

기사수정: 조선개국 4352.03.14. 15:45

글: 최재영(재미 목사, 자유기고가)

 

 

임기윤목사,

전두환의 5.18광주학살 항거하다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둔기로 머리가격당해 희생돼

조철현 신부,

전두환의 헬리기총소사 만행을 고발, 평생 진상규명위해 투쟁

서기2019.03.11. 고인 명예훼손혐의로

전두환 다시 법정에 세움

 

잊지 말아야할 두 분의 성직자

 

▲ 부산제일교회 고 임기윤 목사. 군사독재시절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편집자 말). 사진제공: 최재형  

먼저 부산제일교회 임기윤 목사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 설교시간에 전두환의 5.18만행을 증언하고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분실(삼일공사)로 끌려가 수사관들에게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1주일만에 숨졌다.

두번째는 5·18 당시 신군부가 헬기를 동원해 시민들과 빌딩들에 사격을 가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평생 진상규명을 위해 힘쓴 조철현 신부님(조비오)다.

지난 11일 전두환이 광주법원에 출두하게 된 것도 조신부의 덕분이다. 이분들처럼 참된 성직자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있었기에 전두환의 광주학살 만행이 서슬퍼런 시절에 그나마 조금이라고 세상에 알려졌다.

조신부는 그래도 세상에 잘 알려졌으나 임목사는 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전무후무한 인물인 개신교 목사에 대해 이제껏 개신교단내에서도 침묵하고 외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민주화운동 뿐 아니라 교계 내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었는데, 그의 죽음이 마치 사사로운 것처럼 잊혀져 왔다. 그 이유는 바로 임목사가 감신대나 목원대, 협성대 출신이라면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있다.

비록 감리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중앙신학교(현재 강남대학교)라는 당시 군소신학교를 나와서 학맥이 없어 쉽게 잊혀졌고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학연을 떠나서, 정의를 위해 사셨던 그분의 삶을 되새겨야 한다.

불의한 독재권력에 대해 끝내 순응하지 않았던 임기윤 목사.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올곧은 신앙은 그의 아들에게 이어졌다. 그의 막내아드님이 바로 서울대 음대를 나와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 유학하며 성악가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테너 임정현이다.

그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영결식을 계기로 결성된 아마추어 노동자 합창단 ‘이소선합창단’의 단장이기도 하다.

임기윤(林基潤)목사(1922~1980)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석정리에서 임찬하의 4남으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지도 아래 청년 운동을 하던 중 소련군의 체포령이 내려져 남하하게 되었다.

남하 도중에 소련군들에게 포위되어 일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이때 탈출에 성공하면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조비오(조철현)신부.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의 광주시민 학살 만행을 발벗고 나서서 알렸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헬기를 동원하여 기총소사까지 해 시민을 학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여 지난 3월 11일 광주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학살만행이 얼마나 반인륜 만행이었는지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말해준다. 조 신부는 서기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신부인 나조차도 손에 총이 있으면 쏘고 싶었다." 현장 있었으면 누구라도 총을 들고 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왜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말이다. 천주교 신부인 조 신부는 예수를 본받아 자신몸을 내어 줄 지언정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십자가 정신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런 이 조차도 죄없는 젊은 학생 포함 시민들이 얼마나 잔악하고 끔찍하게 살해 당하고 있었으면 자신 조차도 총들고 싸우고 싶었다고 했을까. 사실이 이런데도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6백년 이어오는 기득권 부왜숭미사대 매국세력은 5.18민주항쟁이 북조선 특수부대가 내려와 저지른 것이라는 소리에 반대하지 않는다(편집자 말). 사진: 최재영

남하 후 1951년 중앙신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를 졸업하였다. 신학과를 졸업한 후 제주도 조천 지방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 임기윤은 부산으로 이주하여, 1958년 부산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66년 기독교대한감리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1970년대 들어 임기윤은 본격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1년에서 1972년에 걸쳐 부산기독교연합회 총무를 지내는 한편, 1971년 7월부터는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75년 2월 임기윤은 개신교와 구교, 가톨릭의 목회자들로 구성된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계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중시하는 부산의 진보적 종교인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침례교와 성결교를 포함하는 개신교 목회자들로는 최성묵·김광일·심응섭·김정광 목사 등이 참여하였고, 가톨릭에서는 송기인(宋基寅)·오수영 신부 등이 참여하였다.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는 함석헌(咸錫憲)·서남동(徐南同)·문동환(文東煥)과 같은 인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 운동을 조직해 나갔다.

1976년에는 역시 신교·구교의 목회자들이 결성한 부산교회인권선교협의회가 창립되었는데, 회장에는 임기윤, 부회장에 송기인(宋基寅)과 최성묵이 취임하였다.

1979년에 임기윤은 부산신학교 운영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부산 지방 감리사를 맡았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임기윤은 함석헌 등 당시 재야인사들과 교유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는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대중(金大中) 등 정치범의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1980년 신군부는 5·16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부산 지역 민주 인사들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을 취하였다.

그간 김대중과 관련되는 활동을 하였거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은 연행하여 구속하였고, 임기윤과 같이 그동안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어 두었던 인사들에 대해서는 예방적 차원에서 이전의 활동에 대한 조사와 일종의 정신 교육 또는 순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 재산이 39만원 밖에 없다는 전두환. 그는 재판받으러 광주법원에 가면서 최고급 승용차에 국가에서 지원하는 최고 경호를 받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이거, 왜 이래'로 응수하여 광주학살에 대한 인간양심이 전혀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재판을 마치고 서울 모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재판받기 어렵다고 해 놓고,  골프를 치면서 정상적인 정신활동을 벌였다. 그가 죽음에 이를 나이임에도 이렇게 당당한 것은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남도의 민초들도 그가 믿는 구석의 하나이며, 특히 정치집단, 자유한국당과 같은 세력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편집자 말).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임기윤은 교회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설교를 하였는데, 며칠 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가 제일교회 교인의 이름으로 우송되었다.

설교 때문에 경찰이 찾아와 전두환(全斗煥)의 통치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이때 임기윤은 “정치 잘하고 있다고 말 못한다.”라고 응답하였다. 이 때문에 임기윤은 1980년 7월 18일 부산지구계엄합동수사단으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다음 날인 7월 19일에 임기윤은 국군보안사령부 부산분실에 출두하였다. 일명 ‘삼일공사’로 불렸는데 현재 부산지방 병무청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임기윤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 참고인으로 조사받던 중 7월 21일 12시 30분경 혼수상태에 빠져 부산 지구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후 부산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7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임기윤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국군보안사령부는 가혹 행위를 부정하고 고혈압을 원인으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족들은 평소 혈압이 80~150 정도였고, 혈압으로 인한 이상 증상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부인 최광명은 뒷머리 왼쪽이 3㎝ 가량 찢어져 피가 말라 붙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韓相範)]의 조사 결과, 합동수사단은 구체적인 범죄 혐의가 없는 임기윤을 3일 동안이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사를 계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쓰며 진술을 강요하는 조사관과의 언쟁으로 인해 평소 지병인 고혈압 증세가 순간적으로 악화되면서 뇌출혈로 운명하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유가족과 관계자들은 1999년 5월 국립 5·18 민주 묘지로 이장하기 위하여 유골을 수습할 때에 두개골 부분에 외부의 가격(加擊)에 의해 생긴 것이 확실한 금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묘소는 1999년 5월에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34번지 국립 5·18 민주 묘지에 마련되었다.

2011년 6월 24일에 중부교회에서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임기윤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민주 열사들에 대한 합동 추모 예배가 거행되었다. 또한 민주 공원 상설전시실의 부산 지역 민주 열사 존(zone)에 영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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