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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 좌정한 산신은 누굴까유교 성리학지배질서 강고하나 왕부터 선비까지 본 심성은 단군 유전자였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9.02.22 23:55

 

유교 성리학의 나라 리조선 민낯 이중성

유교 공자, 성리학 주자도 못들어 주는 것

산신각, 중악단에 가서 빌어 성취함

며느리와 싸웠지만 빌어 소원 성취하라고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써준 락은재 현판

 

▲조선개국 4352.02.09. 충남 공주시 계룡산 자락에 있는 신원사를 방문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2월 답사 2번째 방문지였다. 중악단은 신원사에 만 있는 궁궐규모의 산신각이다. 기운이 강해서 기도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조선개국4352.02.09.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 2월 역사문화답사가 있었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신원사新元寺였다.

답사 출발 1일 앞두고 뒤늦게 신청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필자와 고연희 선생이었다. 고연희 선생하고는 안면이 많은 터라 우스갯소리도 자주하고 친했다.

가지고 간 영상촬영장비를 고 선생에게 들게하고 ‘조수동무’라고 불렀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장비를 들고 있으면 힘들다. ‘조수동무’에게 맡겨서 사진 찍는데 힘을 덜었다.

고 선생이 장비를 제대로 안 들고 엉뚱한데 대고 있으면 “조수동무, 이거 안되겠구만, 똑 바로 못하갔네!” 라며 지청구를 했다. 물론 웃기라고 하는 소리였다. 함께 간 답사일행이 웃어 죽겠다고 한다. 답사가 그래서 더 즐거웠다.

▲ 신원사 입구에 설치된 매표소. 1인당 3천원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파랑색 잠바를 입고 촬영장비를 어깨에 메고 있는 사람이 '조수동무', 고연희 선생이다.

마침내 신원사 입구에 들어섰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마치 검문소를 설치해 놓고 통행세를 받는 것 같았다. 요새 서기1997년에 방영한 <임꺽정> 연속극을 보고 있다.

청석골에 근거지를 두고 탑고개에서 주로 부자양반들 짐을 털어 먹고 사는 도적들이 있다. 입장료가 꼭 탑고개에서 내는 통행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사찰 입구에 초소를 설치해놓고 입장료를 받았는지 답답했다. 같이 간 일행에게 ‘요새 절간이 수입이 없어 이렇게라도 해서 유지하는 것인가’라고 풍자했다.

입장료가 1인당 3천원이었다. 답사 간 일행이 40여명이다. 1십2만원을 입장료로 내야 한다. 단체라서 깎아준다고 했지만 너무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원사 바로 앞에 설치한 것도 아니고 한참 앞에다 설치하고 거기서부터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절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는 등산객도 돈을 반강제로 내야하는 모양새다.

전국 웬만한 사찰이 이렇다. 자비와 해탈을 목적으로 세워진 절간이 이렇다는 것에 씁쓸함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절간에 부처가 죽은지 오래고 불교인만 남았다는 얘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신원사 일주문. 매표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참을 걸어어야 신원사 본 마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서 신원사 본당에 들어섰다. 높은 계단 위에 위엄 있게 버티고 있는 사천왕문을 지나야 대웅전 절간 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절간에 들어서면 무조건 산신각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는 것이 버릇이다. 이 날도 산신각이 어디 있는지 표지나 건물을 찾았다.

입구에서부터 보았지만 본당에 들어서도 길가 주변에는 온통 무슨 기도행사를 알리는 펼침막이 즐비했다. 우리 민족의 기복신앙문화는 어디를 가도 눈에 띈다.

이날 답사 주 해설을 맡은 김병기 박사가 중악단을 소개했고 여기가 산신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중악단을 가리키는 화살 표지를 따라 올라갔다. 대웅전을 왼쪽으로 끼고 한참 올랐다.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문 세 개로 된 솟을 대문이 버티고 있다. 절간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양반집 모양새인데 마땅히 그렇지도 않았다. 고관대작 집 같기도 했다.

이중 삼문을 지나니 꽤 넓은 마당이 나왔고 전방에 거대한 본체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중악단이었다.

▲중악단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솟을삼문이다. 이 삼문 안족에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서는 스님의 끊임없는 기도소리가 흘러나왔다. 좌우 출입문에서는 신도들인지 일반 서민들인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무슨 복을 빌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일까.

궁금해서 옆문으로 가서 열어 봤다. 스님이 아예 확성기 장비를 머리에 쓰고 가운데서 끝없이 무엇인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좌우에는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들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제단 높은 곳에는 등으로 훤히 밝혀진 신 그림이 뚜렷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머리는 검었다. 왼쪽에는 익살스런 호랑이가 있고 오른쪽에는 동자들이 있었다. 가운데 명패에는 계룡산신위라고 쓰인 듯 한 글씨가 보였다.

이 신원사 역사를 보면 일반 다른 절간과 많이 다르다. 백제 마지막 의자왕 때 창건했다고 한다. 리조선을 개창한 리성계 때 와서 이 절간만의 특징이 나타난다.

리성계를 도와 리조선을 개창한 무학대사가 나온다. 그가 리성계에게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고 한다. 이날 중악단 출입문 안쪽 옆에서 기와시주를 받고 있던 중년 여성분이 중악단 내력을 안내 해 주었다.

그녀에 따르면 무학대사가 이 곳은 기운이 세고 좋으니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좋다고 하여 산식각을 지어 기도했다고 한다.

▲중악단 산신각 방문옆에 기도자들의 신발이 여럿이다. 무슨 간절한 소원이 있길래 귾임없이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 고종 때 명성황후가 기운이 세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기도하러 왔다. 그럼 나도 소원을 빌어야 겠다며 기도했다. 지금처럼 웅장하게 산신각을 전각의 크기로 지은 것이 이때라고 했다.

궁궐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건물로 들어오는 문부터 솟을삼문으로 3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 또 중간에 다시 3개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중악단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도 3개 구조로 되어있다. 중앙문, 중앙계단은 임금만이 가는 길이라고 했다.

지붕 사방에는 잡상이 올려져 있었다. 각각 7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는 11개가 있고 창경궁에는 5개가 있다고 한다. 궁궐 전각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중악단 첫 번째 3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머무는 방이 있다. 꽤가 큰 건물이다. 임금이나 황후가 오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문을 열어 보니 스님이 기도노래를 하고 있었고 수 많은 기도인들이 엎드렸다 일어섰다하며 절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 높은 대에 산신이 모셔져 있다. 명패에 '계룡산신위'라고 써 있었다. 이 산신은 원래 누구일까.

이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숨결도 묻어 있었다. 건물 입구 안쪽 중앙문에 현판이 걸려 있었다. 락은재樂隱齋라고 써 있다. 그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라고 했다.

그 증거로 왼쪽아래에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희미하지만 석파궁石坡宮이라고 새겨 있었다. 그녀는 석파가 흥선대원군의 호라고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간의 다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권력다툼이었다. 고종이 장성한데도 흥선대원군이 국왕 대신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명성황후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집권한지 10년 만에 권력을 내려놓는다.

이후 서기1882년 임오군란, 서기1894년 갑오개혁으로 위장된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때도 흥선대원군이 나타난다. 일본군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앞장섰다. 그가 권력욕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그가 며느리가 기도하러 오는 중악단 입구 문 현판을 썼다. 이름도 락은재樂隱齋다. 좌우에 있는 행랑채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즐거움이 고요히 스며든 집이라는 뜻으로도 풀 수 있다. 이하응이 아끼던 신하가 낙향할 때 써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썼다는 '락은재' 현판. 락은재 좌측 하단에 희미하게 흰 글씨로 '석파궁'이라고 써 있다. 석파는 이하응의 호라고 한다.

중악단의 전체 분위기는 그녀가 설명했듯이 궁궐구조를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때는 고종재위 시기인 서기19세기 후반이다.

또 고종23년 서기1885년 관찰사 심상훈이 중건했다고 한다. 산식각, 중악단도 이 때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약 130년이 된 고건축물이다. 절 이름도 이 시기에 바뀐다.

원래는 신원사神院寺다. 신령이 거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불교와는 많이 다른 냄새가 풍긴다. 당시 나라가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나라가 새롭게 잘 되라는 염원을 담아 신원사新元寺로 고쳤다.

또 중악단中嶽壇이라고 고친 것도 이 때라고 한다. 묘향산에 상악단을 설치했고 지리산에 하악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중악단은 그 중간에 있어 그렇게 지은 것이다.

원래는 계룡단鷄龍壇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원래 우리 고유냄새가 풍긴다. 절 이름에서부터 산신각 이름에 이르기 까지 우리 것이 사라져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병기 박사가 중악단을 뒤로 하고 중악단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악단에 좌정하고 있는 계룡산신은 누구일까. 산신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 흔히 보이는 흰머리 산신령은 아니다.

왼편에는 익살스런 범, 호랑이가 있다. 오른편에는 동자 두명이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따르면 이 산신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이 처음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 도읍을 하고 나중에 백악산 아사달로 옮긴다.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인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장당경으로 다시 옮긴다. 나중에 아사달로 숨어들어 산신이된다(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지금 무당들 신당에 가보면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다. 단군을 원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무당내력>을 보아도 첫장에 태백산과 단군이 나온다.

무당들은 영험한 기도터를 찾아 전국 명산대천을 찾아가 기도를 하는데 기도 대상이 산에서는 산신이고 그 산신이 원래는 단군왕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을 백두산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말로 신무산神巫山라고도 한다. 신령스런 무당산이라는 뜻이다. 한웅천왕도 산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단군왕검만이 아사달로 숨어들어 산신되었다고 <삼국유사> 고조선기에서 고기를 인용해서 전하고 있다.

리조선은 강고한 유교 성리학 지배질서로 통치된 사회다. 유교 성리학 이념이 국시였고 정치였으며 사회 지배문화로 군림했다.

그러나 태조 리성계이래 왕, 유학자들 심연에는 단군 유전자가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결정 순간에 영험함이 있다는 단군이 산신으로 좌정한 산신각이나 무당 굿을 빌어 소원을 성취하고자 했다. 이 때는 유교 공자나, 성리학의 주자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한 듯 하다.

그러면서 단군을 모시는 무당 굿을 탄압했다. 또 단군을 중국인 기자의 들러리로 경시했다. 철저한 유교주의자, 면암 최익현은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끌려서 굶어 죽는 순간에도 중국인 기자가 와서 도를 전해 이 나라가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 되었다는 식으로 시를 썼다.

의암 유인석은 또 어떤가. <의암집>을 보면 단군은 기자위해서 앞서 온 들러리로 보고 있다.  유교 양반, 리조선 왕조의 이중성, 위선을 감출 수 없다.

지금도 이런 이중성, 위선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기독교, 특히 미제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 등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을 보면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배권력이 된지 수십년이다.

그런데 이들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교회를 운영하면서 결정 순간에 무당을 찾아가 물어본다고 한다. 무꾸리다. 언제 교회를 팔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신도가 많이 몰려올지 물어본다. 돌아서서는 무당은 미신이라며 탄압한다. 단군도 함께.

중악단 마당에 있는 복전함에는 천원짜리로 채워져 있었다. 마침 가지고 있던 1천원짜리 한 장을 넣었다. 다음 답사 장소로 이동했다(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답사 2부 끝 제3부에서 계속).

▲신원사 안에 즐비하게 걸려 있는 기도행사 안내 펼침막. 이외에 오르는 길 목에도, 중악단 들어가는 입구에도 무수한 기도행사 펼침막이 있었다. 사연도 간절하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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