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조선은 극단의 성리학 유학사대주의에 매몰되어 멸망했다.

 

성리학만을 강제하다 다양성을 잃어버린 李조선

집권당 노론, 망한 명나라 끝까지 숭배 고집함

충현서원에 배향된 주인, 중국인 주자朱子와

좌우에서 섬기는 조선인 중화사대주의 유학자들

▲조선개국 4352.02.09. 충남 공주시와 계룡산 일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2월 답사가 있었다. 첫 방문지로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충현서원을 잡았다.

“주자朱子의 도는 하늘의 해와 같이 모든 사람이 받들어 모시었다. 중국이 오랑캐 세상이 되어 우리나라만이 도리가 남아 있게 되니 스승을 우러러 의지하고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한가.”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있는 <충현서원 사실 및 송선생 추향기(이하 추향기)> 중 일부다. 영조28년(서기1752.7.) 예조참판 윤봉조가 짓고, 대사헌 김봉삼 쓰고, 예조판서 조관빈이 두전頭篆을 썼다고 비문제작자들이 나와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 2월 답사에서 처음 들른 곳이다. 조선개국4352.02.09.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 공주에 10시경에 도착했다. 입춘이 지났으나 날씨는 아주 쌀쌀했다.

한 겨울 날씨에도 답사 신청자들이 많아 차량 좌석이 부족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더 큰 차를 확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40명이 넘는 인원들이 답사에 나섰다.

충현서원은 우리나라 유학을 상징하는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계 조선 5백년을 지배한 성리학을 응집해 놓은 곳으로 보였다. <추향기>비문이 말해준다. 주자(주희)의 도를 말하고 있다. 주자의 도는 하늘의 해와 같다며 추앙하고 있다.

▲ 충현서원 북쪽에 위치한 사우 중앙에 배향된 성리학 창시자, 주자. 그의 좌우에는 일곱명의 조선인 유학자들이 배향되어 있다. 물론 영정은 없다. 향로와 위패만 있다. 주자를 주인으로 양쪽에서 모시고 있는 모양새다.

주자는 남송나라 시절 유학자다. 그가 유가경전을 보고 해설해 놓은 이론이 주자학이다. 흔히 말하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성리性理는 성즉리性卽理의 준말이라고 한다. 이기론, 심성론, 경세론, 이기이원론과 태극도설 등이 주자학의 핵심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통상 접했을 법한 격물치지, 4단7정론이니 하는 것도 주자학에서 나온 것이다. 유교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리성계 조선은 이 사람의 사상과 학문체계가 지배한 나라다. 주자의 이론을 따르는 세력이 지배세력이 되어 통치한 나라다.

유학 한 줄기로 중국 명나라 왕양명이 주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것이 있는데 통치이념으로까지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리조선에서 주자학 보다 자립적이고 주체성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주자학을 극도로 섬긴 리조선 후반기 집권당, 노론이 매국대열에 앞장섰다면, 양명학을 따르는 유학자들은 대부분 만주 등지로 가 자주독립투쟁에 나섰다는 것에서 일면을 볼 수 있다.

▲충현서원을 관리하는 이우병 선생이다. 수십명이 몰려와 서원을 돌아보니 어느단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했다. 서원 안내 책자를 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충현서원 사우祠宇 가운데 주벽에 배향된 이가 주자다. <추향기> 비석 문에서도 확인되 듯이 성리학자들에게 주자는 하늘의 해와 같은 존재다. 그런 주자의 나라, 명나라가 망했다.

그것도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게 멸망했다. 리조선 유학자들이 사람으로 보지 않던 오랑캐다.

유학자들은 청나라 오랑캐를 인정할 수 없다며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 연호를 고집했다. 비문에서는 명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주자의 가르침은 우리나라에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승, 주자의 말씀을 굳건히 섬기면서 예를 갖추어 제사를 마땅히 지내야 한다고 맹세하고 있다.

충현서원 주 건물, 사우 앞에서 김병기 박사에 이어 덧붙이는 해설에 나선 이덕일 소장이 리조선 후기 집권세력의 실태를 지적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리조선 관련 유물에 숭정기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의 연호라고 했다.

의종이 살아있을 때는 ‘숭정 崇禎’ 몇 년이라고 썼다고 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죽은 의종 연호를 그대로 ‘숭정’몇년이라고 쓸 수 없었다. 쓰면 죽은 자를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숭정기원崇禎紀元’이다. ‘단군기원’, ‘서력기원’ 하듯이 썼다는 것이다. ‘숭정기원’을 쓰는 곳을 가보면 대부분 리조선 후기 집권세력인, 노론유학자들이라고 했다.

그는 “극도의 사대주의를 추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전국에 숭정기원이라는 말을 쓰는 곳이 많은데 대개 노론계열이 이렇게 쓴다. 다녀보면 노론지역들이 숭정연호를 쓴다.” 며 노론의 행태를 꼬집었다.

▲서원 사우로 들어가는 삼문이다.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주희(주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개념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리기론理氣論을 주장하고 있다. 리는 보이지 않는 것, 기는 보이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는 리와 기가 상호작용하여 우주가 생겨난 것으로 풀이한다. 또 삼라만상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곧 음과 양의 작용과도 같다. 양태극 문양은 이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어 “강화도에 하복 정제두鄭齊斗 묘가 있는데 그 묘에는 조선국이라고 쓰여 있다.” 며 노론과는 다름을 전했다. 통상 유학자들의 비석 첫 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고 써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풀이된다.

정제두는 처음에는 성리학을 했다가 나중에 양명학으로 전향한다. 이 때문에 이단으로 배척당한다. 나중에 강화도로 들어가 강화학파의 시조가 된다.

충현서원은 서기1581년 고청 서기 선생이 ‘공암서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다. 서원은 북쪽에 사우祠宇, 중앙에 박약당博約堂, 동족에 진수제進修齊, 서쪽에 천리제踐履齊, 그리고 삼문三門과 교직사를 갖추고 있다.

사우 중앙에 주자가 배향되어 있고 좌우에 7명의 리조선 성리학자들이 배향되어 있다. 동벽에 우암 송시열이 맨 나중에 배향되었다.

<추향기>비문은 “송시열 선생은 굳은 지조와 바른 정신으로 대의를 밝혀서 세도世道를 붙드는 것을 한결같이 주자의 법도를 따랐다.” 하여 송시열을 배향하게 된 이유를 새기고 있다.

주자 가르침을 송시열 만큼 떠 받든 학자가 보기 드문데 비문을 쓸 때까지 서원에 배향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내용이다.

이날 안내소에서 연세 지긋한 집사인 듯한 노인한 분이 나왔다. 갑자기 수십 명의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우 마당에서 답사 인도자의 안내를 받고 있는 것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자신을 이우병이라고 소개했다. 서원 개괄 안내지를 주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역사단체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서원 내력을 물었다.

그는 서원 시초를 고려말로 끌고 갔다.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을 탄핵하다 죽은 석탄 이존오가 시조라고 했다. 이어 인조 임금한테 충청 우도에서는 처음으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라고 자랑했다.

향사는 봄, 가을 두 차례 봉행한다고 했다. 이 때는 공주시장 등 지방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여 기린다고 했다.

답사할 곳이 많아 충현서원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곧 바로 다음 답사지인 계룡산 신원사로 향했다.

▲문희상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얼마전에 미국 의회 하원의원장, 낸시 플로시에게 덕담 형식으로 건넸다는 한문글귀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쓰여져 있다. 중화사대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끝까지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글귀 오른쪽에는 세로글씨로 영어, "DEAR PELOSI" 라고 되어 있다. 미국영어는 세로글씨 쓰기가 없다는 점에서 저 글씨를 받는 팰로시가 어떤 생각했을 지 궁금하다. 온갖 고급스러움과 현학스러운 자존심을 뽐내려다 웃음거리가 돼 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문희상 국회의장이 미국 의회를 방문하여 하원의원장, 낸시 펠로시에게 준 한문글귀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글귀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다.

흔히 중국 황하는 수없이 꺾이고 꺾이더라도 결국 동쪽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충신의 굳은 절개는 결코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얼마 전에 중국 대사로 가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노영민씨도 중국 대사 신임장 제정식 때 습근평 주석이 보는 방명록에 이 글귀가 들어간 문구를 썼다고 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중화사대주의 자들이 중국에 대한 충성맹세로 쓰인 것을 감안하면 썩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듯하다.

중국인 주자를 하늘의 태양처럼 섬기던 우암 송시열이 충현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송시열이 생명처럼 여긴 중화사대주의 망령이 리조선이 망한지 1백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고급스런 자존심’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명나라가 망한지 수백 년이 흘러도 숭정기원을 쓰던 노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답사였다(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2월 답사 제1부 끝, 제2부에서 이어짐).

▲답사일행이 충현서원, 사우 앞에서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역사답사는 '생활사료'를 만난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생활사료' 용어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임재해 명예교수가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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