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는 의암 손병희와 백범 김구 빼놓고는 쓰기 힘들다.

 

의암 손병희,

동학농민전쟁, 3.1혁명 주도

경세가로 새로 건설될 국가 기틀 설계

고문으로 죽는 순간까지 독립투쟁격려

백범 김구,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가 아닌,

그것이 바른 길이냐 그른 길이냐가 기준

백범 민족주의 침략배제, 끝없는 민족문화발전

 

▲서기2019.01.20.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옆, <광화문아침> 의백학교에서 심화학습 강연이 있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의백정신과 자주혼'을 주제로 수업을 이끌고 있다. 그는 군사독재정권 때 당한 고초로 몸이 불편하여 이날은 앉아서 진행했다.

“나는 이 나라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간다. 너희들은 실망하지 말고 노려하라. 일본인들의 도량으로는 도저히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먹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못 보아도 너희들은 보게 되리라. 신념을 잃지 말고 힘차고 줄기차게만 나가라.”

의암 손병희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임종을 앞두고 한 말이다. 3.1혁명 만세독립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조선총독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일제는 병보석으로 내보냈다.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의암의 말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일본인들의 도량으로는 도저히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먹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의암은 혁명가, 독립투사이기에 앞서 동학, 천도교인이다. 동학을 닦은 도인이다. 아마도 도인의 직관으로 이런 말이 나온 듯하다.

일본이 무력만 클 뿐 정신능력은 우리나라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무력은 한시적이나 정신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흐름은 백범 김구에게도 발견된다. 백범은 문화국가론, 민족국가론을 내세웠다. 백범은 전쟁, 침략, 무력, 경제 지배, 독재를 배격한다.

언론자유를 통한 국민의식을 깨우는 것을 강조한다. 민주국가가 여기서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속에서 문화국가, 민족국가가 나오는 것으로 풀고 있다.

지금 민족주의는 아주 부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첨단을 달리고 세계가 하나가 되는 시대에 민족주의는 이에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백범의 민족주의는 침략을 배제한다. 또 끝없는 민족문화 발전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세계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한 공동체가 마땅히 가져야 할 고유개성을 말한다.

세계라는 것이 각자 고유한 개성과 가치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때 백범이 주창하는 민족주의는 대내외 방면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다.

서기2019.01.20.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옆 <광화문아침> 의백학교 심화학습 강연이 있었다. 이날 두 번째 시간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맡았다.

김 전 관장은 의암과 백범 정신과 민족혼을 설파했다. 이들을 심층분석, 조명하는 시간이었다. 앞서 의암과 백범 정신 한 면을 살펴보았는데 이날 김 전 관장이 밝힌 것이다.

그는 먼저 의암을 소개했다. 의암의 아버지가 청주목의 아전을 지냈다고 하니 중인집안 출신이다. 백범도 신분이 상민이었던 점을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이끈 두 거목이 모두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암 성장과정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는데 혼인하는 과정이 눈길을 끈다. 충북 청원에 살던 의암에게 청주 북면 청하리에 있는 곽씨가 딸 신랑감을 찾아 의암집에 온다.

서자庶子라는 것을 알고 바로 돌아간다. 의암이 길을 가로 막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외친다.

“선 본 값을 내든지, 혼인을 승락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내 주먹맛을 한번 보고 가셔야 합니다.”

곽씨는 황당했지만 의암의 의기가 가상하여 혼인을 승락했다. 승락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서 의암이 무릎을 끓고 자신의 무례함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김 전 관장은 의암이 기골이 장대했고 마음 씀씀이도 범인이 아니라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의암의 자비심과 이타심이 묻어난다.

이러한 인물이었기에 동학혁명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고 전민족 민중 봉기인 3.1혁명도 기획, 주도 할 수 있었다고 풀었다.

김 전 관장은 의암을 동학혁명을 이끈 주요인물로서 전쟁을 이끈 혁명가로 정의했다. 또 개벽, 개화, 인내천, 만인평등을 펼친 종교지도자로 보았다.

또한 3.1혁명을 주도한 독립투쟁의 선각자라고 했다. 그의 선각자 모습은 그가 펼친 삼전론三戰論에서도 확인된다.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이다.

도전은 민족의 정신문화교육을 뜻하고, 재전은 경제, 산업을 키우는 것을 말하며, 언전은 대외관계로써 외교론으로 풀이된다.

의암은 서기1902년 일본에 망명하여 4년여동안 일본을 탐색하고 많은 교훈을 얻는다. 교육 중요성을 자각하고 인재들에게 선진교육을 시킨다.

또 학교를 세우거나 수많은 학교에 찬조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또한 언론 중요성을 인식하고 <만세보> <천도교월보> 창간해 국민계몽투쟁도 벌인다. 아울러 <보성사>라는 출판사도 차린다.

동학은 서기19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민족사 대사건으로 평가된다. 가혹한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안으로는 부패세력을 일소하고 민권이 보장받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밖으로는 침략해오는 서양제국주의 세력과 일본을 내쫓고자 일어났다. 막강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이를 원조한 관군의 무력앞에 좌절되었다.

동학혁명을 이끈 해월 최시형이 잡혀 처형되는 고난을 겪었으나 의암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은 여전히 암중모색으로 기회를 노렸다.

▲동학혁명을 의암 손병희와 함께 주도한 이용구. 그는 이후 항일의병장으로도 활동했으나, 친일파로 돌아서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 그는 '일진회'라는 단체까지 만들어 매국에 적극 나섰다.

이러던 중 배신자들이 나타났다. 배신자들은 동학접주를 지낸 이용구를 중심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앞장서서 나라를 일본에게 갖다 바치자고 선전, 선동하고 다녔다.

오늘날 마치 성조기(태극기)부대가 자유한국당과 합세하여 한미동맹을 외쳐대며 미국에게 우리 운명을 내맡기자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용구 일당은 일본이 청일전쟁에 이어 서기1905년 러일전쟁 마져 이기자 대세는 끝났다며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치고 일본보호를 받자고 선언서까지 내놓으며 일본을 고무시켰다.

이에 힘받은 일제는 서기1905.11.17.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하여 나라 손과 발에 해당하는 외교권을 뺏어갔다.

손과 발이 잘려 나갔으니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은 것은 매국조약서류를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의암은 배신자들을 동학에서 축출했다. 이날 김 전 관장은 이용구 세력이 동학내에서 갖고 있던 기득권이 상당했음을 암시했다.

서기1907.09.23. 출교자 명단과 출교 이유를 <만세보>에 올렸다. 이용구를 비롯한 축출당한 인원이 62명이나 되었다. 김 전관장은 이들의 축출로 천도교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밝혔다.

대부분이 의암 손병희 손과 발 같은 인물들이라고 했다. 이들이 교단의 동산, 부동산, 재정 등 주요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일본군을 축출하자고 동학혁명이 일어난지 10여년 만에 동학 주요지도부가 친일파로 돌아선 것이다. 이 상태로 이어졌다면 근대사에서 동학이 갖는 의미는 치명적으로 저평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 의암 손병희가 천도교 기둥이 뽑힐 정도의 개혁을 단행한다. 사실상 동학을 재건하는 결단을 내린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동학의 주요위치를 자치하고 있던 배신자들 62명을 잘라 버린다. 이어 삼전론을 바탕으로 학교를 세우고, 출판사를 만들고 신문을 창간한다. 이런 사업을 통해서 교단 재건에 성공한다.

이어 1차대전이 끝나면서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읽고 평화와 민족자결주의 세계흐름을 이용하여 3.1혁명을 구상한다.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의암은 “지금은 사람과 물체가 개벽하는 때”라고 정의했다.

3.1혁명을 성공시킨 의암은 일제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갖혀 온갖 고문을 당한다. 고문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병보석으로 내 보낸다. 의암은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긴다.

“여러분 수고했소이다. 나는 이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오. 우리 교회에서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 뒷일은 청년들에게 부탁하오.”

‘오심즉여심’, 이는 수운 최제우가 만난 한알님이 수운에게 한 말이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자의 자기고백이다.

이 깨달음을 자세히 풀어서 내놓은 것이 <용담유사>, <동경대전>이다.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수운식 표현이다.

이 궁극의 깨달음이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하는 의암 손병희의 입에서도 나왔다. 혁명가, 경세가, 독립투사 이전에 그가 도통한 선인仙人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서기1922.05.19. 만물이 생명력으로 솟구치는 봄날 새벽 3시에 눈을 감는다. 의암은 62세의 파란만장한 육신 삶을 뒤로 하고 돌아갔다.

천도교 3대까지 이어진 ‘오심즉여심’ 도통은 지금도 이어지는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이런 선인仙人이 지금 천도교단에 있는가.

▲이날 의백학교 심화학습이 끝나자 방청석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가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서류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박용규 연구교수.

이어 김 전 관장은 백범정신을 파고들었다. 그는 백범정신의 ‘진수’를 찾는다는 소제목까지 붙여 백범정신 또한 의암 못지않게 거룩했음을 전했다.

그에 의하면 백범은 초지일관한 정신력으로 자신을 다스렸으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고 이끌었다. 그는 이것을 정도론이라고 표현했다.

백범이 철저하게 거짓 길을 배격하고 바른 길을 택했다고 강조했다. 백범70평생 왕조시대, 망국, 독립투쟁, 임시정부, 해방, 분단, 신탁통치, 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한번도 민족운명과 개인운명을 나누지 않았다고 꾹꾹 눌러 밝혔다.

한번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타협하거나 비껴가지 않았다고 힘주어 알렸다. 가는 길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바른 길이냐 그른 길이냐만 백범의 안중에 있었다고 재차 외쳤다.

그래서 분단을 앞에 두고 유명한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이는 그가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외친 말이다. 김 전 관장은 “원칙이나 정도를 헌신짝 버리듯이 하면서 권세를 쫓는 정상배들, 소 갈길 말 갈길 가리지 않고 양지 쪽만 찾는 지식인들에게 백범 생애는 여전히 ‘마침표’없는 바른길 표지판이다” 라고 꾸짖었다.

이명박근혜 정권들어서 리승만을 우상화하고 ‘건국절’ 논란을 일으킨 짓을 질타했다. 리승만과 부왜매국노들을 ‘건국 지도자’로 떠받들고 백범 같은 민족 지도자이자 독립투사들을 조선총독부에서나 나올 법한 ‘테러리스트’라고 능욕했다며 분노했다.

이어 백범이 내세운 문화국가론과 민족주의를 알렸다. 백범의 문화국가론과 민족주의는 <백범일지>나 <나의소원>‘민족국가’에서 엿볼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민족주의가 눈길을 끌었다. 백범의 민족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나 나치즘, 파시즘에서 추구한 민족주의가 아니다. 침략을 배제하고 끝없는 민족문화 발전 추구다.

하늘이 내려준 그 민족의 고유한 개성, 자질을 꽃피우는 것으로 풀이된다. 백범 민족주의는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바탕이다. 그 안에는 자유보장이 기본이다.

마지막으로 김 전 관장은 5만원권 화폐 인물이 정해지던 과정을 전했다. 로무현 정권때 5만원권 신권발행을 준비했다. 당시 여론조사를 해보니 백범이 1순위로 나왔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율곡 이이의 엄마, 신사임당으로 바뀌어 발행되었다. 그는 “수구세력은 백범의 독립정신과 자주혼이 두려웠던 것” 라며 부왜매국세력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로써 우리 강토를 ‘반도’로 가두고 중국 식민통치기관 한사군을 이 땅에 박아놓은 중화사대주의 정권, 리조선 유학자들과 그 아류들로 우리나라 모든 종이화폐를 도배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신사임당만 빼놓고 모두 이씨다. 사임당師任堂 이름도 중국 주나라 문왕 부인,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師任)에서 나왔다. 골수 중화사대주의 집안임을 알수 있다.

화폐를 사용하면서 화폐인물을 날마다 보는데 여기서 나오는 주술적 힘은 가늠하기 어렵다.

심화학습이 끝나고 방청석에서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이날은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이자, 한글학회 연구위원도 참여하여 관심사항을 질문했다.

서기2019.01.26. 토요일 의학교 마지막 심화학습을 남겨 두고 있다.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이 ‘의백의 철학과 지도력’를,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이 ‘한국사회주의 운동사’를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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