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지휘소가 있었음에도 왜곡되거나 알려지지 않았다.

동학혁명을 바로 조명하는 사업회 발족

보은의 동학혁명 역사 묻혀진채 왜곡

충북차원에서 발굴하여 재조명 활동예정

집강소에 앞서 보은서 민회 1년여간 활동

지상낙원, 이화세계 실현이라는 평가 나와

 

 

▲ 서기2019.01.19. 충북 보은문화원 대강당에서 동학혁명북접사업회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충북도시자, 보은군 의장 등 각계인사가 응원을 하는 가운데 출범한 동학혁명북접사업회는 향후 보은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혁명을 널리알리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서기2019.01.19. 충북 보은에서 동학혁명북접사업회가 공식 출범했다. 여러해 동안 보은 일대에서 동학혁명관련 행사를 진행하면서 역량을 쌓아왔다. 인력과 재원 및 이를 이끌 규범인 정관을 확정하여 본격 활동에 나섰다.

동학혁명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고 지역도 전라도가 그려진다. 이를 가능케 한 다른 동학혁명 역사는 소외받고 있다.

전봉준을 위시로 하는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전쟁을 가능케 한 곳은 보은일대다. 이곳에 전쟁 총지휘부격인 대도소가 차려졌고 이곳의 명령에 따라 동학혁명이 불타올랐다.

중심에 해월 최시형이 있었다. 동학 2대 교주로서 동학혁명군을 이끌었다. 전봉준은 물론 3.1혁명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도 해월의 명령을 받았고 혁명군의 주요 지도자로 임명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보은동학혁명북접사업회 위원들이 북접사업회 창립총회를 축하하는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보은은 동학혁명 처음과 끝을 장식한 곳이다. 동학혁명 처음과 끝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에도 보은은 동학혁명사에서 잊혀진 곳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손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북접사업회 추진위원장 자격으로 특별강연을 했다.

강연에서 그는 잊혀지고 왜곡된 동학혁명사를 바로잡고 알리고자 동학혁명북접사업회가 출범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날 강연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동학혁명의 주된 역사성은 집강소執綱所활동이다. 동학혁명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다. 전주성 전투를 기점으로 관군을 제압한 뒤 설치된 민이 주인되어 운영된 민간자치기구다.

전주화약 이후 설치되었다고 하니 서기1894년 6월이후다. 리조선이라는 왕조국가안에서 정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직접민주정치를 실현시켰다. 왕조정치체제안에서 이를 거부한 독립자치를 벌인 정치체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손윤 이사장이 동혁혁명 진실을 알리는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보은에 형성된 동학민회공동체 실체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독재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 왕조국가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125년전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이었다. 민족사에서는 물론 세계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민이 주인된 역사다.

그런데 집강소 활동이 있기전에 이미 충북 보은에서 또 다른 집강소가 활동하고 있었다. 보은취회, 보은민회로 불린다. 전라도 집강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해월 최시형이 주도했다.

전라도일대의 집강소는 활동기간이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보은에서는 1년 넘게 이루어졌다.

손윤 이사장의 이날 특별강연에 따르면 해월이 서기1893년 3월에 ‘민회’라는 이름을 붙여 실행했다. 해월 최시형이 서기1893.03.10.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순도일을 맞아 전국의 동학도를 보은에 모이라고 했다.

이것이 민회인데 도를 지키고 최제우를 존경하고자 하는 것이 첫째 이유다. 또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왜와 서양세력을 쳐 내는 것도 목적이었다.

▲보은읍 보은문화원에서 창립총회를 마치고 장내리로 이동해 북접사업회 현판식을 가졌다. 공터에 놓은 콘테이너상자를 사무소로 삼았다.

해월의 소집령에 따라 모인 인원이 최소한 2만 7천명이라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8만명이라고 나온다고 한다. 보은 장안면 장내리가 중심지였다.

장내리에는 속리산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고 마을 가운데 커다란 천이 흐르고 있다. 일대는 보기드물게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평균 3만명 이상이 모여 1년여 동안 직접민주정치를 했다. 당시 인구규모나 밀집도를 볼 때 거대한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만명이 모여 중앙정부 통제를 받지 않고 1년이 넘는 기간 민간자치를 한 것이다. 이 민회공동체를 이날 손 이사장은 ‘신앙촌’으로 빗대었다.

맞는 말이다. 동학이라는 도를 가지고 교도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손 이사장은 거대한 공동체가 1년이상 활동하는데는 반드시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조정미 북접사업회 사무국장이 동학민회공동체 흔적이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다. 여러겹의 돌무더기가 줄지어 옥녀봉 산 아래 있었다.

해월이 내놓은 규범이었다. 내용을 보면 규범이라고 하기보다는 동학윤리도덕으로 평가된다. 유무상자有無相資정신이 대표사례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함께 나누어 살아가자는 뜻이다.

당시 모여든 동학교도는 리조선 유교 성리학지배체제가 만들어 놓은 신분과 귀천으로 형식상 구별되었다.

이를 뛰어 넘어 민회공동체 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동학이 제시한 평등사상이 실제 구현되었다. 유학자도 있었고 농사군도 있었으며 짚신을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도 있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을 서로 나누며 민간자치를 이어갔다. 또 ‘삼경三敬’이라는 규범이 공동체를 이끌었다.

삼경은 하늘을 존경하고 사람을 존경하며 사물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이 규범을 보면 흔히 말하는 ‘이상사회’가 구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물까지 존경하라는 것을 보면 민회공동체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사물에는 짐승도 있고 돌맹이 같은 물건도 있다. 길에 나뒹구는 돌맹이 조차도 결국 하늘처럼 대하라는 뜻이다.

▲ 동학혁명을 지휘한 보은 장내리에는 1년여 동안 활동한 동학민회 공동체 흔적이 남아 있다. 돌무더기 축대가 세월의 녹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동학혁명의 숨결을 따라 온 후손들을 말없이 맞이고 있다.

이날 손 이사장은 당시 일어난 구체 사례까지 제시했다. ‘침을 함부로 뱉지 마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함부로 침을 뱉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대변은 물론 오줌을 싸도 흙으로 묻게 했다고 한다. 철저한 위생관리가 있었다.

70~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에서는 뒤간에 대변소변이 가득했다. 통상 덮어놓지 않아 파리와 고자리가 끓었다. 악취가 풍겨났다.

대소변까지 땅에 묻으라고 한 것을 보면 생활 속 아주 상세한 것까지 규율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지배세력의 학정으로 헐벗어 백성들의 생활상이 처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소변을 싸고 방치한 것을 엿볼 수 있는데 몸 행동 거지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동학을 이끄는 해월이 보기에 동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과 달라야 했을 것이다.

▲북접사업회 회원들이 사무소 현판식을 마치고 장내리 일대를 돌아보고 있다. 동학혁명군 활동을 알려주는 안내판과 비석이 곳곳에 있었다.

대규모 공동체가 정부 통제를 벗어나 한 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했다. 중앙정부에서 보면 체제를 뒤집어 엎을 세력이다. 이를 알아보러 중앙에서 어윤중이 선무사로 내려왔다.

당시 상황을 보고한 기록이 전해 오는데 민회공동체 활동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고 한다.

어윤중은 보고서에서 동학민회공동체를 후하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있지만 자체 규율로 이상적인 세상을 꾸려가고 있었다는 평가다.

손 이사장에 따르면 ‘위생관리’라는 말이 나온다. 어윤중이 민회공동체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은에 모여든 사람들이 동학이라는 도를 닦고 있었다. 또 이 도를 생확 속에서 실천했다. 이는 우리 고유 가치인 홍익인간, 이화세상 부활로 평가된다. 꿈 속의 일 같은 일이 한 세기 조금 넘은 세월 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민회활동기간에 황해도서 동학접주로 활약한 백범 김구도 왔었다고 한다. 물론 의암 손병희도 있었다.

▲동학민회 공동체 흔적을 찾아 마을을 둘러 보는 북접사업회 회원들.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이 125년전 한국 근대사를 바꾼 동학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 꿈 같은 세월은 약 1년을 지속하다 끝난다. 일본군이 침략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해월은 보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국의 동학지도자들에게 무장봉기를 명한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이다. 전쟁은 캐틀링 기관포,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일본군을 지원한 관군의 압도하는 화력으로 화승총, 죽창, 기타 농기구로 무장한 동학농민 대학살로 끝난다.

보은은 동학군의 마지막 희생지가 된다. 보은 북실 일대에서 패퇴하여 몰려든 동학농민군 2천여명이 희생되었다. 12월 칠흑같은 어둠, 살을 후비는 추위, 눈보라 속에서 흰 눈밭에 붉은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이날 창립총회는 보은 민회 위원들의 공연으로 문을 열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의 원혼을 달래는 곡조가 울려퍼져 장내를 숙연케 했다.

충청북도 이시종 도지사가 환영사를 보내왔는데 고근석 문화체육관광국장이 대신 발표했다. 또 보은군 의회 김응선 의장도 나와 북접사업회 발전을 기원하며 군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고근석 국장에게 충청북도 차원에서 북접사업회를 지원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없다고 했다. 다만 3.1혁명 1백주년 행사를 하면서 3.1혁명이 동학에서 나왔기 때문에 간접 지원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북접사업회 활동을 보면서 특정해서 지원도 가능다하는 뜻을 내비쳤다. 이어 최재한 추진의원이 사업회 설립에 일으기 까지의 경과를 보고했다.

▲ 보은 장안면 장내리 개간된 공터위에 북접사업회 사무소 건물이 컨네이너상자로 자리잡았다. 사무소 내부다. 아직 정리가 안된 상태라 어수선하다. 이날 사무소 현판식과 축하잔치를 위해 '구현령' 북접사업회 회원의 가족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2부에서는 창립총회가 있었다. 조정미 북접사업회 사무국장이 안내하는 가운데 정관승인, 임원선출, 기타 안건을 처리했다.

본 행사를 마치고 보은농협건물에 위치한 한우식당에서 점심시간을 가졌다. 이어 장안리로 이동해 북접사업회 현판식을 거행했다.

민회공동체가 있었던 현장에 있는 사무소 건물에 현판을 달았다. 철제콘테이너상자를 사무소로 삼았다. 도로옆 공터에 놨다. 현판식과 함께 민회회원들이 마련한 떡과 막걸리 등으로 북접사업회 탄생을 축하했다.

이어 민회공동체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 곳곳을 찾았다. 조정미 사무국장이 안내했다. 옥녀봉 산자락 앞에 길게 늘어선 돌축대가 남아 있었다. 또 마을 길 옆을 따라 무데기 돌들이 있었는데 이것도 흔적이라고 했다.

보은동학혁명북적사업회는 이날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다. 보은에 사업회 본부사무소를 두고 서울에 처음 분사무소를 둔다. 사업이 진전되면 다른 지역에도 사무소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한다.

▲충북 보은군 문화원. 이곳에서 동학혁명북접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반쪽짜리 동학혁명역사를 바르게 조명하고 알리는 가운데 이 시대에 필요한 동학가치를 구현하겠다는 목적으로 출범했다. 빈부귀천이 없고 평등의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구현한 민회가 대표사례다. 동학혁명당시 직접민주정치를 실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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