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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독도강탈은 국제법으로도 무효독도는 일본제국주의 대 한국 강제점령 첫 희생물이다.
장계황 | 승인 2018.12.12 22:49

글: 장계황(한국역사영토재단이사장, 행정학박사)

 

장계황의 독도이야기 5

일본, 미국과 영국의 협조하에 독도에 대러 감시용 초소 세움

일본내무대신 카쓰라 다로 독도일본편입 내각회의요청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은 독도 강제 편입사실을

일제가 관보에 못 싣고 현보에 실은 것에서도 확인

 

▲ 강원도 관찰사 서리가 울릉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를 전재하여 참정대신에게 보낸보고서와 그에 대한 참정대신의 지령문.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보고서에서, '본군소속독도가'라고 하여 독도가 자신의 통치지역임을 명백히 밝히고있다. 참정대신은 '일본의 독도 영지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본주장에 항의하고 비판하였다. (서울대규장각소장)

일본이 독도를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것은 영토에 대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 아니다. 러일전쟁을 수행하고자 강탈했다. 러일 전쟁을 위해 독도를 무단으로 수용한 것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동해로 남하 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전략에는 일본의 단독진행이 아닌 러시아 동방정책을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협조아래 이루어 진 것이다.

일본 해군은 1904년 9월, 11월 등 수차례에 걸쳐 군함을 보내 독도에 대한 조사를 하고 러시아 군함이 독도부근에 표박해 있는 것을 확인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1905년 7월 25일 독도 망루공사를 시작 하했다.

8월 19일부터 관측병 등 4명을 상주 시켜 망루 가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은 울릉도-독도-마쓰에(松江)를 잇는 전선 부설을 동해에 완료하고 운용한다. 망루 요원은 러일 전쟁 종전 후 10월 24일 철수 했으며 해저전선은 1945년 패전 할 때까지 운용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 강제점령 첫 희생물로 독도 삼켰는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일본 군령부는 1904년 9월 24일 군함 니타카호를 독도로 출항시켜 망루 설치를 위한 사전 조사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함께 5일 후인 9월 29일에는 나카이 요자부로로 하여금 독도에 대해 강치잡이 '대하원'(貸下願)을 제출하도록 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군사시설물 설치를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인 1905년 1월 10일에는 내무대신이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를 요청했다.

일본은 이후 1905년 7월 25일 독도에 망루 공사를 시작하여 8월 19일부터 관측병 등 4명을 주둔시켜 군사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독도를 통과하는 해저전선부설도 완료하여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운용하게 된다.

이때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해 “다른 나라가 이 섬(독도)을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다”며 독도가 임자 없는“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有主地)임이 증명되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정부의 독도 영토 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실효적 지배론이나 지리적 지적학적 무주지가 아님은 너무나 많은 증거 자료가 있기 때문에 일본의 무주지 점유론은 국제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 몰래 독도를 비밀리에 침탈하는 내각회의 결정을 했으나 한국정부와 세계가 알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이를 관례대로 중앙정부의 <관보>에 고시(告示)하지 못해 당시 국제법의 영토 편입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영유권은 반드시 정부가 선언을 하여야 유효하다. 당시 동경에 주일본 한국 공사관이 활동하고 있어서 중앙 <관보>에 고시하면 이를 알게 되는 한국공사관이 즉각 항의하여 비밀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독도 영토편입이 무효화 될 것을 우려 일본 정부는 약1개월 고심하다가 이를 시마네 현의 <현보>에 1905년 2월 22일자로 고시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1905년 연말까지도 일본 정부의 독도 침탈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독도 침탈 결정 사실을 안 것은 1906년 3월 28일이다. 울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은 이를 알게 되자 「본 군 소속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되었다고 일본인들이 주장한다」고 강원도 관찰사에게 항의 보고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중앙 정부에 보고하여 이 항의 사실은 당시 한국의 주요 신문인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1일자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항의 보도하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강압적으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1년 후 일본은 군사전략지로 독도에 대해 '임의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치잡이업자의 청원으로 내각회의 결정에 따라 '무주지를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쿄 히비야공원 영토주권 전시관은 독도를 군사전략상 탈취한 사실을 숨기고, 어렵 업자를 내세워 영토 편입을 했다고 호도하고 있다.

이후 1905년 2월 22일 시네마현 고시 제40호를 통하여 일본은 영토 편입을 고시하고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국, 영국, 러시아의 묵인아래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국을 식민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하면서 첫 희생물로 삼은 것이 독도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동조 및 군수지원 아래 진행 된 것이다. 더하여 러일 전쟁 승리로 러시아 까지 묵인하여 대한국토를 강제합병 시킨 것이다.

장계황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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