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입장에서 기록한 역사를 우리는 우리역사로 믿고 있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심백강 박사,

역사는 역사가가 채택한 자료만 역사로 남아

중국은 중국역사를 쓴 것이지 우리 역사 쓴 것 아냐

중국사료를 기준으로 우리역사 찾으면 안돼

중국 관찬사서는 당나라 때 부터 시작

우리역사 조직적으로 은폐, 왜곡한 전형

▲서기2018.10.16.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대동재단이 주최한 정기역사강좌에서 심백강 박사가 고구려 안시성위치와 관련해서 강연을 하고 있다.

“안시성 전투 영웅, 양만춘 중화족 눈치 보느라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징기스칸 다음으로 큰 영웅이었다.”

“남북조시대 중원대륙은 작은 나라들로 난립했고, 서양은 동서로마로 쪼개져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세계최강이었다.”

이 같은 발언을 서기2018.10.16. 대동재단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심백강 박사가 쏟아냈다. 이 날 강연은 대동재단이 매달 사회 저명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자리였다. 심 박사는 이날 최근에 개봉한 영화, ‘안시성’ 관련해서 위치 고증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먼저 안시성 규모가 5천 명 정도를 수용하는 크기로 알려진 것을 바로 잡았다. 이렇게 알려진 것은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우리는 약소국이라는 세뇌교육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안시성 당시 싸움 상황도 당나라는 최신 전투장비를 갖추고 고구려는 거의 비무장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데 이것도 중화사대주의에 뿌리를 둔 잘못된 세뇌교육 때문이라고 허탈해했다.

그는 요동성 규모와 비교하여 안시성 수용규모를 산출해 냈다. 요동성이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안시성도 최소한 이 정도 규모는 되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야 당나라 대규모 군대를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 중화사관에 오염된 지금의 역사지식을 말하면서 서양 역사학자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했다.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된 자료만 역사가 된다’는 문구다. 그의 말을 통해 역사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지 비판했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가 지금 아는 역사라는 것이 고대로 갈수록 소수가 남겨놓은 사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잊혀진 역사는 남겨진 역사보다 비교자체가 안될 만큼 많다. 그래서 발견되지 않은 다른 역사기록이 나오면 기존의 역사는 수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새로운 역사기록이 나오면 모두 이단, 위서 취급받아 역사로 편입이 거부된다. 역사기득권으로 이권을 갖고 있는 세력들이 특히 더하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은 역사를 우리 스스로 정립하지 못했다. 나라가 망하면서 일제가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일제가 만들어준 것을 역사학으로 삼아 해방 후 73년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이 새로운 역사기록을 반겨할리 만무하다.

이날 심백강 박사는 이를 비판하는 것을 기조삼아 강연을 풀어갔다. 이날 강연에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역사자료를 제시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중국 정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화사관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객관성을 상실했는지 꼬집었다. 특히 당나라가 들어서기 전 까지는 모두 개인이 기록한 역사서뿐이라고 지적했다.

또 당나라에 들어와서는 관찬사서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운을 뗐다. 관찬사서는 철저히 중화사관에 따라 썼기 때문에 주변국의 진실 된 역사를 찾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따라서 이 책들속에서 우리역사 진실을 찾기는 무리라고 잘라 말했다. <삼국지> 이후 남북조시대 역사서가 모두 당나라가 지은 관찬사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역사 특히 고구려 역사 진실을 찾으려면 당시 개인이 남긴 문집 등 기록을 보는 것이 낫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당시 있는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유다. 관찬사서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은 넣고 불리한 것은 빼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중국이 실패한 전쟁은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했다고 보았다. 또 실패한 왕조인데도 위대한 왕조로 기록해 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역사권력이라고 했다.

▲심백강 박사가 중국역사왜곡을 질타하고 있다. 중국 한족은 한족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해 놨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사료 기준으로 우리 역사를 풀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중국 역사 권력 중 사마씨 집안이 있는데 특히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써서 중국 서주시대 부터 약 1천2백년 역사를 기록했다고 했다. 이는 역사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중국에는 역사권력이 있는데 특히 사마씨를 예로 들었다.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는 동양역사의 전범이 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세한 역사기록을 담은 <자치통감>도 사마광이 썼다고 지적했다.

일제 조선총독부 관제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 있다. 이른바 ‘락랑군 교치론’이다. 북한 평양에 있던 한나라 식민기관 락랑군이 서기313년에 고구려 미천왕 공격을 받고 요동으로 쫓겨 가서(교치) 거기서 다시 이어졌다는 식민사관이다.

이것을 총독부사관을 추종하는 국내강단식민사학계가 그대로 정설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료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다. 그러나 락랑군은 북한 평양에서 요동으로 교치된 적이 없다. 락랑군은 처음부터 현재 중국 하북성 난하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중국 모든 1차사료가 증언한다.

심 박사는 중국은 이런 역사 권력을 잘 살려서 2천년 이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각성을 촉구했다. 이어 그는 지금 고구려 역사 진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당나라의 관찬사서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고당전쟁 기록이 왜곡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가 걸핏하면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믿을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기본이 6백년이상 가는 나라였다. 그동안 중원에서는 십수 개로 쪼개진 조그만한 나라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득실 거렸는데 어떻게 이 조무래기 나라들에게 맨날 조공하고 머리를 조아리다 볼일 다 보는 역사였겠느냐는 것이다.

이들 나라는 인구수가 많아 봤자 2백만도 안되었다. 제국 수준의 고구려가 이들 나라에게 조공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열 난립한 중원 조무래기 나라들에게 조공하고 머리 조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 나라는 황제라고 써놓고 고구려는 왕이라고 써 놨다. 이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중국사는 동이족이 지배한 것이 진실인데 중원 왕조들이 종이위에다 자신들이 승리한 역사로 탈취해 갔다고 고발했다.

그는 고구려 위치와 관련해서 중국 정사라는 사료와 이를 베낀 수준인 우리 <삼국사기>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고자 했다. 특히 평양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또 고대 요수도 바로잡았다.

<삼국사기>에 남평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북평양도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王巡下平壤’ 이라는 기록이 보인데 기존학자들은 ‘평양으로 순행해서 내려갔다’고 해석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해석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평양으로 순행했다’고 해석해야 정확하다고 못 박았다.

태왕이 머무는 서울, 평양으로 순행해서 내려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게 이유다. 따라서 남평양이 있었으면 북평양이 있었을 것이고 하평양이 있었으며 상평양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통전>에 나오는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평양이 현재 하북성 난하, 노룡현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고구려 연개소문 맏아들 연남생, 곧 천남생 묘비문도 활용했다. 비석에 ‘요동평양인’이라는 문구에 주목했다. 당시 요동은 현재의 요동이 결코 아니라고 못 박았다.

▲ 이날 심백강 박사가 고증한 평양의 위치다. 빨강색 화살표 지역이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략 명령서에서 말한 요수와 갈석, 당나라 이세민이가 요수와 갈석에 죄를 묻겠다고 한 곳이다. 당나라 이후 중국 사료들은 평양이 옛 기자조선 땅이고 위만조선 땅이며 한사군이 설치된 곳이라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한사군 중 하나인 락랑군이 저 곳 언저리로 파악되는데, 이전의 기자, 위만 조선도 저 곳으로 논리귀결된다. 그러나 중화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일제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북한 평양을 고대 평양이라고 하며, 여기에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인 락랑군이 있었다고 날조하고 있다.  이것을 현재 국내 역사학을 장악한 제도권 식민사학계가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고려대 사학과, 연세대 사학과 등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들이 주류를 이룬다. 단체로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하일식 연세대학 사학과 교수)'가 있다. 

요동은 요수 동쪽을 말하는데 요수는 어디냐는 문제가 생긴다. 심 박사는 수양제가 쓴 고구려 토벌 명령문에서 찾았다. “지난해 출병해서 요수와 갈석에서 죄를 묻겠다. 요수에서 관병식을 가졌다.”는 문구에서 요수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갈석은 현재 난하 동남쪽에 있다.

따라서 요수는 현재 요하가 될 수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당나라 이세민이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지은 시에도 나온다. 달빛이 ‘요갈’을 비춘다고 한다. 여기서 ‘요갈’은 ‘요수’와 ‘갈석’을 말한다. 수양제가 말하는 ‘요수갈석’과 같다.

수양제와 당나라 이세민이 말한 이 문구들은 그들이 직접 말한 것이 때문에 떼 타지 않은 1차사료다. 결국 요수는 현재 난하로 비정될 수밖에 없다. 이 요수 동쪽을 요동이라고 했다.

<통전>에서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했고, 천남생 비문에 요동평양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평양은 난하 동쪽 어디엔가 있었다고도 해석된다.

이날 심 박사는 요수를 더 중국 내륙으로 끌어들였다. 중국남북조시대 학자가 쓴 고구려라는 시를 통해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시에 나오는 역수를 당시 요수로 보았다. 이러면 요수는 중국 북경 서남쪽 하북성 호타하근처가 된다.

심 박사는 이런 자료를 근거로 최소한 남북조시대는 고구려가 세계최강대국이었다고 확신했다. 이 시기는 서기 4~5세기다. 당시 서양은 로마가 동서로 갈라진 상태였으니 고구려가 세계최강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시기와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또 중권 북조왕조 중에 북연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고구려 후예 고은이 세운 나라였다고 밝혔다. 더구나 서기6세기 중반까지 중원 통일한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고간 정도면 고구려 국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날 심 박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현 주소를 밝혀 충격을 주었다. 중국 당국은 현재 일본 극우파 학자들의 연구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인 극우파 학자, 다나까토시아키(田中俊明)의 통계를 끌어다가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만 했으니 절대 독립국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신라왕도 조선반도에서 당나라 지방행정관원었다고 한다. 이제 신라까지 중국사로 편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 박사는 이 같은 역사 왜곡과 날조는 우리 내부에서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입장에서 보아야 되는데, 중국 입장에서 역사를 본다고 질타했다. 현재 우리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사학 추종세력을 겨냥한 비판으로 풀이된다.

한편 이날 강연회를 주최한 대동재단을 대표해서 허신행 전 농림수산부 장관이 인사말을 했다. 재단을 만든 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그러나 재단 설립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기고 앞으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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