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 고려의 국력에 시기, 질투하다.

 

소중화, 사대주의에 물든 유학자들, 소동파를 찬양하다...

“얼마 후 동산에 달이 떠서 북두성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는데,

흰 이슬이 강을 비껴 떠 있어서 물빛이 하늘에 이어졌다.

한 조각 작은 배 가는대로 맡겨 아득한 만경창파를 타고 가는데,

넓고 넓어 허공에서 바람타고 가는 듯 멈출 곳이 어딘지 모르겠고,

가볍게 나부끼니 나 홀로 속세를 떠나 날개 달린 신선이 된 듯하다”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馮虛御風. 而不知其所止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위 시는 소동파 소식(蘇東坡, 蘇軾 1037-1101년)의 적벽부(赤壁賦) 한 구절이다. 그는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능했으며, 적벽부를 지은 자로 더 알려져 있다. 당송(唐宋) 팔대가(八大家)이며, 구양수(歐陽脩)와 비교되는 대문호였던 소동파, 그러나 그는 고려 극열 배척논자였다.

당시 직에 있던 소동파 소식은 고려 사신이 송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1089년 11월 論高麗進奉狀), 고려 왕래 금지와 대각국사 의천이 불교전적을 수집하자 이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여타 서적을 고려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상소문(1090년 8월 乞禁商旅過外國狀, 1093년 2월 論高麗買書利害箚子三首)을 7차례나 올리기도 했다.

▲해양제국, 고려는 현재 밝혀지고 있는바, 북으로는 연길지역과 서로는 요녕성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고려제국은 중상주의 국가로써 바다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아라비아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국력을 바탕으로 거란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세계제국 몽골을 상대로 30년이 넘게 전쟁을 수행하였고 세계최고의 출판대국을 이룩하였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상용화가 이를 뒤받침해 주었다. 고려가 정도전, 이성계등 유교사대주의자들에게 망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먼저 개항 및 근대화하여 현재 세계5대강국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세계제국, 고려의 해상경제무역 활동지역).

또한 송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 하여 고려로부터 온 서신을 돌려보내는 등 다섯 가지 고려 해악론을 주장하며 극력 배척했다. 그 이유로는 고려의 공물은 무용지물이고 그들에게 주는 사여품은 백성의 고혈이며, 사여품은 거란(契丹)에 흘러 들어가 이용되고, 송의 정보가 그들에게 건내진다는 것이었다. 또 고려는 의를 사모한다 하나 실리를 추구하고, 허실을 엿보고 정보 유출을 주의해야 하는 점을 들었다.

그는 또 고려를 직설적으로 오랑캐라 부르고, 금수(禽獸)와 같다고 했다(王子不治夷狄論).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화에 대한 우월적 사상, 고려에 대한 시기심과 열등의식이 있음이 엿보인다.

그는 필화사건을 일으키는 등 정쟁에 말려 유배형을 받고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던 중, 강소성(江蘇省) 상주(常州)에서 죽었다. 현란한 문체와 서체는 감히 따를 자가 없어 1천 8백 년 세월 그의 문체를 섭렵하는 자 스스로 고고한 듯한 모양새를 뽐내고, 문생좌주(門生座主)인양 자처하며 앞장서 왔던 양 대에 걸친 사대부들의 행태를 보였다.

주머니의 송곳(囊中之錐)처럼 화려한 문장 뒤에 비수의 칼날을 세워 고려를 괴롭혔던 소동파, 적벽부 한 구절처럼 허공에서 최후를 마쳤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속의 배우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과장(科場)의 과거 공부를 익히느라 풍월(風月) 익힐 틈이 없다가, 과거에 합격한 후에야 바야흐로 시 짓기를 배우게 되는데, 더욱 동파의 시를 즐겨 읽으므로 해마다 방(枋)이 나붙게 되면 사람들이 ‘올해도 동파가 30명 나왔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그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26권 答全履之論文書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규보는 “그렇다면 이 역시 동파이니, 동파를 보는 듯이 공경함이 옳지, 어찌 꼭 비방하겠습니까. 동파는 근세 이래의 부섬(富贍)하고 호일(豪逸)하여 시(詩)에 뛰어난 사람으로, 그의 문장은 마치 부잣집에 금옥(金玉)과 전패(錢貝)가 창고에 가득하여 한이 없는 것과 같아, 비록 도둑이 훔쳐 가더라도 끝내 가난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 표절한들 어찌 해롭겠습니까?” 라고 극구 찬양했다.

훗날 조선조 대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시(詩)는 그 격률(格律)이 무려 세 번이나 변하였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전적으로 만당(晩唐)의 풍조를 답습하였고, 고려 중엽에는 전적으로 동파(東坡)를 배웠다”라 하여 소동파만이 그 대안이었음을 말했다.

또 그에 대한 추앙심은 극에 달해 김부식(金富軾)과 부철(富轍) 형제가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을 따다 쓴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서긍(徐兢, 1091~1153)이 “일찍이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其弟富轍。亦有詩譽。嘗密訪其兄弟命名之意。蓋有所慕云).”라고 고려도경 인물 편에 썼다

고려조의 이규보를 비롯 이제현(李齊賢), 조선조의 기대승(奇大升), 송시열(宋時烈), 정약용(丁若鏞) 등 대부분 대학자들이 그들의 문헌 東國李相國文集, 東文選, 高峯集, 宋子大全, 茶山詩文集 등에 거의가 인용되고 찬미되었으나, 소동파의 고려 배척 건에 대해서는 일고의 소회도 없었음은 왜 일까?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소동파의 글씨 중에 조금 큰 글씨는 전해지는 것이 매우 드물다. 작년에 수방재(嗽芳齋)에서 서첩 하나를 보았는데, 해서도 아니고 초서도 아닌 것이 전아(典雅)하고 좋았다. 십 년 뒤에 그 서첩이 세간에 흘러 다녔는데, 잠시 다시 보고서 더 없는 감회를 느꼈다.’고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소동파의 진적(眞蹟)에 썼다.

왜 그들은 소동파의 고려배척 건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여야 만 했던가? 국정을 전단하며 한 시대를 주름잡고 풍미했던 자들, 모화사상에 의한 사대주의로 일신상 자기 안위에 안착했을 그들에게 오히려 시대를 탓하고 연민의 정만을 느껴야 할 것인가? 차라리 제 조국을 위해 고려를 배척하며, 염장을 질러대던 소동파만 못한 것은 아닐까.

 

글 : 한문수(성균관석전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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