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제국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말없이 후손들을 맞이했다.

 

 

익산가는 답사차안 정암 박사 도상지리답사 꿀맛

익산 왕궁리 오층탑 백제사찰 위용 말없이 웅변

복원개방 앞둔 익산미륵사지석탑, 대백제 위용과시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이 5층석탑의 실체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대규모 유적터가 있고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이다.

지난 9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전북 익산으로 달렸다. 아직 한낮에는 여름 그대로였다. 달리는 차 안에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답사에 참여한 다양한 답사객들로 가득했다. 모두 ‘이번 답사는 어떤 역사현장이 펼쳐질 것인가?’ 호기심으로 가득찬 얼굴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침 7시 넘어서 출발했는데도 차가 막혔다. 답사일정 시간에 맞게 답사 진행이 되지 않겠다는 예상들이 나왔다. 익산에 도착 예정시간보다 늦는 것은 분명했다.

긴 이동시간을 이용하여 정암 박사가 답사 지역을 중심으로 지리분석을 해주었다. 물길과 정맥이 색깔별로 표시된 지도를 보며 익산에 어떻게 거대한 사찰들이 들어섰는지 분석해 나갔다. 크게는 백두대간에서 금남정맥, 금북정맥으로 갈려 나간다.

답사지, 익산과 군산은 이 두 정맥 안에 포위되어 있다. 여기에 금강이 한 겹 더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또 이 지역은 평야가 가장 발달하여 있다. 물산이 풍부하다 보니 삶이 풍요롭고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지리환경이 백제 역사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국의 위용을 뽐내듯이 익산 미륵사 같은 절이 웅장하게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왕궁리 5층석탑 유적터에서 이번 답사 주해설사로 나선 김병기 박사가 유적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익산에 도착하여 익산 왕궁면 왕궁리 5층 탑을 첫 번째로 들렀다. 대규모 역사유적이어서 인지 이미 관광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넓은 주차장과 드넓은 앞마당과 전시관이 세련되게 갖추어져 있었다. 답사 일행은 곧바로 오층석탑으로 향했다. 멀리 구릉에 높게 선 오층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탑 앞에 가니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고 그 위용도 대단했다. 정교하지 않은 투박한 탑이었지만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었다. 탑 높이가 9m에 이른다니 그 앞에서 있는 나그네야 얼마나 초라할까.

탑 뒤로는 아직도 발굴 중인 곳이 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게 커다란 파란 막으로 덮여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절터 길이는 가로 약 290m, 세로 약 450m라고 빨간 양산을 쓰고 안내를 해 주는 해설 아주머니가 알려주었다. 발굴한 학자들은 왕궁리라고 이름 붙여 왕궁터라고도 한다.

또 탑 뒤로 한참 가면 위쪽에 디귿자형 물길이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다면서 꼭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에 쫓겨 가보지 못했다. 이 정도 규모 절이라면 보통 절이 아닐 것이다. 이 5층 석탑은 서기 1965년에 해체했다가 보수해서 다시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탑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나왔다. 사리장엄구하고 종이 같은 금동판, 여러장에 금강경을 새겨놓았다고 한다. 또 금동여래입상도 나왔다.

▲ 왕궁리 5 층 석탑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불입상과 기본 개념이 같다. 불꽃 무늬 광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금동여래입상 모양을 보면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과 흡사하다. 특히 손 모양이 똑같고, 광배 기본개념도 똑같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가 두 입상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다만 왕궁리5층석탑에서 나온 불상 광배가 더 사실감에 있게 망처럼 조각되어 불꽃 모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경남 의령에서 나온 것이다. 백제권이라고 하는 전북 익산과는 한참 멀고 신라 또는 가야권 지역이다.

그런데도 두 입상은 너무나 닮았다. 연가7년에서 연가는 고구려 태왕 연호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까지 고구려 강역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지역이 고구려 세력권 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물론 충북이나 황해도 지역서 발견된 불상에서도 고구려 태왕 연호가 새겨져 있다.

불상을 불꽃무늬 광배로 장식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잠들어 있는 생명 기운이 활성화된 것은 아닐까.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을 닦아 이른바 깨달음에 이른 존재를 나타낼 때 보통 이런 상징을 사용한다. 다른 말로는 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전에 불을 피우거나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은 신이 내려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말로 득도했다는 것이며 우리 사료인 <안함로 삼성기>에 따르면 성선成仙, 곧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평양은 선인이 머무는 곳이라고 나오는데 통상 이 선인은 단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단군이 도를 통한, 깨달은 존재로서 선인이었다는 것이다.

백제 지역서 발견된 입상과 경남 의령서 발견된 입상 기본구조가 같고, 후자에서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시간에 쫓겨 다음 답사지로 이동했다.

▲ 익산미륵사지 석탑으로 가는 입구에서 바라본 미륵사지 전경.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멀리 미륵산이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 입구에 들어서자 한참 박물관 공사로 어수선했다. 국립박물관으로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다.

미륵사지 입구에 들어서면서 입이 벌어졌다. 아담하고 평범한 통상의 사찰지를 연상했다. 그런데 입구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생각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미륵사 탑이 아득히 멀리 있었고 그 근처에 오가는 관광객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였다.

그만큼 미륵사 절터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었다. 축구장으로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적용이 쉽게 되지 않았다. 좌우, 후방을 산과 산줄기가 감싸고 있어 오히려 작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크기를 가늠하고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절터 전체를 담으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좌우 전체를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얼마나 뒤로 물러나야 다 담을 수 있을까.

한참 걸어서 복원을 완료하고 개방만 남겨둔 미륵사 서탑 구조물로 향했다. 흔히 사진에서 보았던 미륵사지석탑이었다. 해체 뒤 복원 전까지는 일제가 발라놓은 시멘트로 버티고 있었다고 할 만큼 위태롭게 서 있었다.

서기 2001년부터 해체에 들어갔고 서기 2017년 10월에 복원을 끝냈다. 현재는 복원 위해 지어놓은 거대한 구조물 안에 있다. 들어서니 석탑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었다. 사진기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탑이었다. 원래는 9층이라고 하는데 현상보존에 그쳐서 현재는 6층까지 남아 있었다. 그래도 고개를 한참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다 보일 정도였다.

▲ 해체 뒤에 복원이 완료된 미륵사지 서쪽 석탑.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구조물 입구 벽에는 그동안 이 석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었다. 해체 과정에서 나온 유물들이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나왔다.

청동기부터 토제 물건 쇠로 된 제품, 유리제품은 물론이고 관옥, 홍옥기, 곡옥 최고 발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황금으로 한쪽을 감싼 곡옥도 나왔다. 서기 7세기 초인 백제 무왕시기 탑이라고 하지만 출토 유물을 보아서는 이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기 어렵다.

다만 사리함과 더불어 장수와 복을 비는 불교식 글귀가 새겨진 금동 판을 통해서 시대를 가늠할 따름이다. 이 금동판에는 ‘대왕 폐하’라는 말이 나온다. 폐하는 황제에게만 쓰는 용어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 ‘붕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붕도 황제가 죽었을 때 쓰는 용어다. 중국 주나라 <예기>에 의하면 사람이 죽었을 때 지위를 나타내는 용어가 나온다. 붕은 황제가 죽었을 때, ‘훙薨’은 제후, 왕이 죽었을 때 쓴다. 이것을 볼 때 백제는 황제 국이었음이 틀림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임금을 통상 ‘대왕’ 또는 ‘태왕’이라고 쓴다. 중국에서 황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태왕, 대왕으로 부른 것으로 나타난다. 신라 금석문에서도 ‘태왕’이라고 나온다. 연호도 함께 나온다.

그런데 제도권 강단 주류사학계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황제국 면모를 무시한다. ‘내제외왕內帝外王’제도라고 깎아내린다. 황제 체제는 나라 안에서만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면에외국,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황제 보다 낮은 왕이었다고 한다. 이 이론을 고려와 대진국 발해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 미륵사지 석탑 네 귀퉁이에 놓여있는 석물. 우리 고유 정서가 깃든 신령한 동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가 동성 태왕 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또 중국 <북사> 백제전, <주서> 백제전에서도 동진 때부터 양나라 때 까지 양자강 좌측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또 <구당서>에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월주는 오늘날 중국 절강성 지역이다. 이는 명백히 대륙백제를 말한다. 잠시 점령한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이 백제 땅 이었다는 얘기다. 충분히 제국, 백제를 연상할 수 있다. 다만 중화사대주의사관이 득세하면서 왜곡된 사료가 많아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미륵사지석탑 규모를 보아도 황제국이 아니면 이렇게 큰 절을 만들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높이만 14m라고 한다. 무너져 내린 6층 탑 높이가 이렇다. 원래 9층 탑이었던 때는 더 높았다는 얘기다. 이런 대규모 사찰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다는 말이다. 국력과 직결된다. 이런 점에서도 백제는 대륙을 포함한 황제국 체제의 대백제였다고 할 수 있다.

미륵사지는 우리 삼사상이 그대로 체현된 곳이다. 서탑과 동탑이 있고 그사이에 중앙 탑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9층 석탑이었다고 하는데 9라는 숫자도 3의 연장이다. 또 ‘탑돌이’라는 말이 있다. 탑돌이, 이는 탑을 돈다는 말이다. 왜 탑을 돌까.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소원, 복을 비는 행위다. 지금도 불교 신도들이나 방문객은 절 마당 가운데 있는 돌탑을 돌면서 소원을 빈다. 그것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돌탑에 무엇이 있길래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일까. 뭔가 영험한 기운, 곧 신이 내려왔다고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 여기서 신단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단수에는 한웅천왕이 내려왔다. 서낭당 돌무더기 나무에 비는 것이 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나무 아래서 한다. 대보름날 당산나무 아래서 제물을 차려 놓고 풍장을 치는 것도 한웅천왕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 동쪽에 조성된 미륵사 동탑. 부실한 고증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탑 위용은 대단하다. 탑 안으로 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할 만큼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답사에서는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았던 탑 수호신 석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상상 속의 동물로 보이는 자그마한 돌상이 복원된 탑 네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이는 예전에 동네 어귀에 서서 액을 막아주던 장승 같은 것이다. 또한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은 존재다.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탑을 지키는 ‘신수神獸’다. 불교문화라기보다는 우리 고유문화에 가깝다.

동쪽에는 동탑을 만들어 놨다. 이번 답사 주해설 자로 나선 김병기 박사에 의하면 충분하게 고증 해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탑으로써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층까지 완성해 놓고 있다. 탑 밑 둥도 서탑 크기로 해 놨다. 관광객들이 탑 1층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미륵사 석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익산 미륵사는 백제가 황제 국이 아니면 운영할 수 없었던 사찰임을 탑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절 건물 흔적에서도 찾아 볼 수 가 있었다. 제국, 백제의 숨결을 더 느끼고 싶었으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답사지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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