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가 불인정, 남한 주권 북한까지 미치니 청구권도 북한까지 포함한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조선,

"남조선 당국은 일제 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서기2004.05.22. 북조선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본국 고이즈미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조일수뇌회담을 가졌다. 일본 수상의 평양 방문에는 현재 일본 수상 아베신조(安倍晋三)도 따라갔다. 모두 일제침략을 저지른 자들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일제침략의 근원,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 정신을 잇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날 회담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를 거론하며 일제침략배상에 소극적이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민족 수백만을 강제동원해 죽이고, 부상입히고, 노동력 착취한 만행에 비하면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새발의 피도 안된다는 것이 진실이다(편집인 주).  

4. 한일협정과 북일 수교

한국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한일협정에 관한 일본의 협상 기술이나 전략 또는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했을 것이다.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되던 북일 수교 추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과 일본의 협상 과정과 결과에 북한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엔 남한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명시되어 있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남한의 "헌법상 주권은 이북 지역까지 미치기 때문에 청구권 문제 해결에는 북한 지역에 관련되는 청구권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반도 "통일 이전에 북한의 청구권 문제에 대해 북한과 구체적 교섭을 하지 않을 것을 상호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 건넨 돈에서 박정희 정부가 일제 식민통치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보상금을 가로채기는 했어도 북한 지역에 돌아갈 보상금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된 직후 북한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남조선 당국은 일제 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남한이 받은 8억 달러가 "턱없이 적은 금액"이기도 했지만, 그 돈의 성격이 '피해 보상'이나 '손해 배상'이 아니라 '경제 협력'이나 '독립 축하' 명목이었기에 한일협정이 굴욕적이고 반민족적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여만 명의 학살 만행, 840여만 명의 강제 련행, 20여만 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터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김일성 부대가 1940년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승전국으로서 패전국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이 아니라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역시 보상이든 배상이든 '경제 협력'의 틀 안에서 과거를 청산하기로 합의했다. 참고로, 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小泉進次郎) 일본 수상이 서명한 '조일 평양 선언'의 제2항은 다음과 같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력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대하여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리자 (낮은 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중략)"

북한과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수교 협상을 시작했다. 앞에서 보듯 200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과 2004년 5월의 정상회담에 힘입어 협상이 곧 타결될 것 같았다. 게다가 고이즈미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8월까지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나라의 관계가 수교로 이어지기는커녕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 관련 문제,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 그리고 미국의 반대다.

나는 이 가운데 미국의 반대가 북일 수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과거에 중국이나 베트남 등과 국교 정상화를 계획하고도 미국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다 미국의 양해와 승인을 받고서야 수교에 이를 수 있었듯, 북한과의 수교 역시 미국의 허락 없이는 진전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2000년대 이전엔 남한의 견제와 방해도 컸다. 남한은 1995년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때 일본이 쌀을 보내려던 것까지 막은 적이 있다. 일본이 남한보다 먼저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면 한일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1965년 한일 수교가 시작된 때는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여서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1966년 7월 러스크 (Dean Rusk) 미국 국무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시나 (椎名悅三郞) 외상이 대략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한일협정으로 남한과의 관계가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두통거리'가 있다. 일본이 북한에 공장설비를 수출하려는데 그러려면 북한 기술자들이 일본에 들어와 정밀검사를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한이 북한 기술자들의 일본 입국을 반대하기에 일본은 한일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3년 이상이나 연기했다. 이제 한일 국교정상화가 완전히 정착되어 일본 정부가 북한에 수출을 재개하고 싶은데, 남한은 일본이 북한 기술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설비를 수출한다면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손상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러스크가 남한을 편들며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일본이 북한과 무역하는 것은 모기에 한 방 쏘이는 것에 불과할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모기에 쏘임으로써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 일본과 북한의 관계보다 일본과 남한의 관계가 훨씬 크고 중요하다."

이렇듯 남한과 일본은 미국의 간섭 및 압력 아래서 가까워졌고 북한과 일본은 남한의 견제와 미국의 반대로 멀어져갔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8월 29일, 북한과 일본이 "미국에 알리지 않고" 지난 7월 베트남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외신 보도가 나온다. 두 나라가 올해 11~12월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지기도 한다. 남한이든 일본이든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려면 미국의 양해와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서글픈 현실이기에 북미 관계가 진전되길 바랄 뿐이다.

5. 연재를 마치며

지난 7월 "베트남 파병 :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을 연재하면서, 남한이 베트남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한 1964년의 정치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면서 7월 11일 다음과 같이 썼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8월 중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을 연재하면서 지난주 8월 23일 자 글에서도 '6.3사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지난 7월 11일의 연재 글을 읽은 미국의 한 독자가 흥분하다시피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왜 그 끔찍한 서울대학교 총장놈 이름은 밝히지 않으세요? 권중휘." 1970년대 초 경북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민주화운동을 한 죄로 군대에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약혼자 때문에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칠순 여성의 피맺힌 절규랄까.

그 할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며 역사 한 토막을 밝히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한다. 1964년 6월 3일, 야당의원들과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한 날,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정희는 계엄령에 대한 미국의 동의와 협조를 얻기 위해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와 하우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서울대학교 총장이 그 날 나용균 야당 국회부의장을 통해 자신에게 "65명의 서울대 학생과 시위대를 부추기는 다수의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하우즈에게 6사단과 28사단 병력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우즈는 버거의 동의를 얻어 승인했다.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 때 서울대학교 총장이 권중휘.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펴냈다는 대단한 영문학자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해인 1961년 총장으로 취임해 퇴임을 5일 앞둔 1964년 6월 3일, 박정희에게 자기 학생들과 교수들이 빨갱이라고 밀고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군사독재의 탄압으로부터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나용균 국회부의장은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하다 제헌국회부터 6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엔 장관도 지내고 1963년엔 야당 몫으로 국회부의장까지 된 사람이 야당이 주도하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앞장서는 '빨갱이들' 명단을 박정희에게 건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앞장서기는커녕.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 겸 최고 대학의 총장과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까지 군사독재자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대학생들과 야당의원들이 주도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방해했던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희 군사독재가 18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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