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독일 베를린 유학시절 부터 일제의 민족말살 만행 비판하다.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말을 뺏기면 민족도 사라져

언어와 민족 일체관 주장

조선어사전 만들어 우리 말 지켜야

독일 베를린 대학 유학 후 출세길 버리고

국내 들어와 언어독립투쟁 투신

조선민족 갱생은 조선어 통일과 정리

일제의 조선어 금지령에 격렬하게 저항

말은 정신, 글자는 생명, 이것 있으면

그 민족은 영원불멸함

 

▲ 일제치하 혹독한 민족 말살공작을 거부하고 조선어 독립투쟁에 투신한 이극로 선생. 그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면서 일제의 우리민족 말살책동을 비판했다. 또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조선어독립투쟁의 불을 당겼고, 이어 국내로 들어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도 주시경 선생의 영향을 받았고 대종교인으로서 독립투쟁에 나섰다.

3)이극로의 언어관

1910년대와 1920년대 만주와 중국에서 주시경의 제자인 김진(김영숙)과 김두봉과 함께 보낸 이극로는 독일에서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는 1924년에 일제 언어정책의 본질이 동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에서 일제가 학교에서 조선어 대신 일본어를 강요하고 한국역사 대신 일본 역사를 가르치며 한국의 민족 종교를 탄압하고 있는 사실을 폭로했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을 말살시키거나 동화하고자 했던 일제의 시도는 그 실현이 불투명한, 가소로운 정치적 꿈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였다.

이극로는 이미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4대 교주로 촉망을 받은 인사였다.

그는 조선어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동화정책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의 언어관도 주시경의 그것과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의 언어관에 의하면 언어는 민족의 기본이며 중심핵이다. 언어를 발전시키는 것은 민족문화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언어가 망하면 민족은 멸망한다. 민족국가에서 언어생활은 중요한 요소이다.

언어를 유지시키면 민족은 유지되고 끝내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언어관은 ‘언어 민족 일체관’으로 규정할 수 있다. 언어 민족 일체관은 언어의 흥망이 민족의 흥망과 일체한다는 관점이다.

이극로의 언어 민족 일체관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다. 이극로는 조선어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동화정책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조선말이 없어지면 우리 민족은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모조선어인 조선말의 유지를 통해 조선 민족과 민족성을 보존하자고 이극로는 주장하였다.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이극로는 귀국 도중 1928년 8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모조선어의 유지를 통해 민족과 민족성을 보존하자’는 주장하였다.

‘첫째, 조선어사전을 편찬하자. 둘째, 우리글을 국한문으로 섞어 쓰지 말고, 국문으로만 쓰자. 셋째, 우리글을 가로로 쓰자.’라고 실현 방법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6월 24일 미국 뉴욕 강연에서 “조선어방면에서 일을 하리라”라고 포부를 밝혔다.

같은 해 10월 1일 하와이 강연에서 자신은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전심 갈력하겠다”는 심경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그는 1928년 해외시절에 언어독립운동에 대한 결의를 가졌다. 1929년 1월 부산에 도착한 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질 때까지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귀국 뒤 그의 주도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었다. 그는 ‘조선민족 갱생의 방법이 조선어의 정리와 통일에 있다’라고 자신의 언어관과 사전편찬 의도를 드러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의 중심은 말과 글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1933년 「조선 민족과 한글」이라는 글에서

“한 민족은 남 다른 문화를 가진 것이니, 곧 어떤 지리적 역사적 환경 밑에서 물질생활로나 정신생활로나 남다른 생활 방식을 이룬 것이다.

이 문화의 중심은 곧 말과 글이다. ···· 제 뜻을 나타내는 데에는 제 말처럼 완전한 것이 없고, 제 말을 적는 데에는 제 글처럼 완전한 것이 없다. 한글로 적는 조선말이오, 조선말을 적는 한글이라.

이 말과 글로써 우리 생활의 힘이 되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며 배우는 것은 정당(正當)의 정당한 일이다. 한글은 조선민족 문화생활의 유일한 도구요 무기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말하였다.

1935년에 이극로는 ‘우리 조선말을 영구히 유지하자’라고 주장하였다. 1935년 일제의 학무당국은 조선의 교육제도 개정안을 제시했다. 그 골자는 조선과 일본의 차별을 철폐하는 차원에서 학교의 명칭 통일, 공학(共學)제의 실시였다.

이에 대한 사회의 여론이 다양하게 나왔는데, 친일세력은 환영일색이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은 신문 기고를 통해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안재홍·한용운·이극로가 그들이다.

이극로는 일제의 공학제 실시를 반대하면서 비판하였다. 공학제가 실시되면 조선말을 없어진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제가 기도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내선공학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조선어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조선어학회라는 조직을 가지고 눈물겨웁게도 애를 써나가는 것은 죽은 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연구는 한 수단이요 우리 조선말을 연구정리하여 가지고 그것을 널리 보급시키며 영구히 유지하자(밑줄 필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보급과 유지의 대상은 학교와 학생인데 일단 공학제가 되고 조선말의 학과가 없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 동안 가지고 있든 중요한 한 수단을 잃게 되니 어찌 가석치 아니하겠습니까. 좌우간 이러한 국한된 입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조선사람으로 도대체 반대입니다. 그 이유야 여기에 설명할 수 없으니 피합니다.

위의 이극로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조선어의 연구·정리와 보급운동에 그치지 않고 민족어인 조선어를 영구 보전하자는 운동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 북조선에 있는 이극로 선생 묘지. 미군정이 실시되던 해방공간과 6.25전쟁 중에 북으로 넘어간 역사학자, 조선어학자들이 다수다. 이극로 선생도 이 때 북으로 갔다. 비석에 새겨진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이극로는 민족어인 조선어를 조선의 학교와 학생에 보급하여 영구히 유지하며, 이를 통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향상시켜 독립을 쟁취하는 전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같은 시기 일제의 조선어 교육 말살 정책에 항의하였다. 다음은 경성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물음 즉 ‘조선어 교육 폐지에 대한 감상’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언어생활은 경제생활이나 종교생활이 나와 같은 사람의 일종(一種) 생활 현상이요 또는 사실(事實)입니다. 수천만 사람의 커다란 생활 현상과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현명(賢明)이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현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인(一人)이라도 있다면 그는 정신의 이상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양심을 속이는 간사배(奸邪輩)일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1935년 1월 23일)

위와 같이 이극로는 학교 현장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동화 정책인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해 단호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38년에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의 교육을 금지시켰다.

그는 1938년 안국동 공안과에서 “서슬이 시퍼런 일본 제국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라고 태연하게” 공병우에게 말하였다.

이처럼 그는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말을 영구히 유지하여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언어관과 한글운동관에는 독립국가 건설 전망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이극로의 언어 민족 일체관은 해방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이극로의 「국가 · 민족 · 생활 · 언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언어를 순화하고 발달시킨다는 것은 민족문화를 발달시키는 것이겠으며 언어가 망한다면 민족이 망하는 것”라고 하여 언어의 흥망이 민족의 흥망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언어 민족 일체관은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民族이 있을진댄 말이명있을 것이요, 말이 있을진대 반드시 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댄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을 필연적일 것입니다.

··· 한글은 조선민족의 가장 큰 보배이었으나 ··· 그러다가 갑오경장 이후로 세계 신사조가 밀려들어오매, 중국 숭배 한문 숭배의 5백년 미몽은 깨어지고 자아의 각성과 함께 자국의 문자에 대한 존앙심도 생기게 되어서, 순조롭게 뜻있는 학자들의 품안에서 알뜰하게 길리워 왔던 것이나, 모지고도 독살스러운 왜놈의 동화정책의 독수에 걸려 우리 민족과 함께 무한한 고통을 느끼어 흙속에서 신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말과 글은 민족의 정신과 생명’이라는 언어관으로까지 인식할 정도로 절박하게 생각하였으며, ‘말과 글이 있으면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고, 또한 행복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언어가 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이극로의 주장은 독일의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W. V. Humboldt, 1767-1835)와 레오 바이스게르버((J. l. Weisgerber, 1899-1985)의 사상과 같은 입장이었다.

훔볼트는 언어가 본질적인 면에서 민족 자체인 것이기에, 민족의 형성에서 언어 이외의 다른 요인들이 공동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신적 형식의 특성은 주로 언어 속에서 간파된다고 보았다.

언어와 민족,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언어와 민족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훔볼트에게 있어서 언어란 민족의 기본요소이며, 민족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표명한 기관으로 정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언어가 민족의 형성에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훔볼트의 언어관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바이스게르버도 언어와 민족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는 “타고난 민족성은 모조선어와 존망을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매우 절실하게 나타난다.공통의 모조선어에 대한 의식에 의해 공속 감정은 자라며, 통일체로서 결속하고 활동하려는 희망도 또한 자라는 것이다.

반대로 지나친 외국화 시도가 건전한 민족정신과 부딪치는 모든 경우, 왜 언어투쟁은 그처럼 치열한 형식을 취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언어의 본질로부터 밝혀진다.”라고 하면서,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한, 지배민족 역시 대부분 자신들이 그 소수의 사람들을 합병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했다.

이는 언어투쟁의 본질을 지적한 것이다. 지배민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피지배민족에게 강요할 때, 피지배 민족의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어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민족정신을 유지하고자 언어투쟁을 전개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언어가 민족의 자기 보존을 위한 가장 강력한 그리고 최후의 받침대라는 주장을 하였다.

훔볼트가 언어는 민족의 세계상을 만든다고 말한 이래, 언어와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강조한 것은 독일의 언어관 속에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언어와 민족의 상관관계를 강조한 훔볼트의 주장이 독일의 언어관 속에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베를린대학 출신인 이극로도 훔볼트의 언어관에 대해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극로는 베를린대학 시절(1922, 4∼1927, 5) 부전공으로 언어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언어학자인 에리히 해니스(Erich Haenisch, 1880∼1966)교수로부터 몽고어를 배웠고, 언어학과 음성학의 대가인 위를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기도 하였다.

이극로가 이들 교수로부터 훔볼트의 언어학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한 훔볼트의 주장에 대해 이극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극로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언어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패망은 우리 민족의 해방을 가져왔다. 동시에 일제의 패망은 말과 글의 해방을 불러왔다. 우리나라에서 일본말과 일문의 패망을 의미하였다.

우리 민족이 일제가 강요한 일본말과 일문의 쇠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도 8·15 해방의 의미는 너무도 컸다. 이극로에게 언어는 민족의 정신이고 민족의 중심핵이었다. 그의 언어관은 언어가 유지되면 민족은 영원불멸한다는 언어 민족 일체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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