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는 대륙 북부를, 청나라는 모두 차지했다.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여진 금(金)나라...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소위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의 이분법적 세계관 틀 속에서 모든 사물과 역사를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주의에 몰입된 비자주적이며 편협한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으며 우리의 역사와 얼의 싹을 잘라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광복 70 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중국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자기들이 천하의 중심인 중화이며 우리는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라고 부르고 야만인이라 생각하는 흉노나 선비, 거란, 말갈 등을 우리도 중국이나 우리보다 못한 천박하고 비루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여진(女眞)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에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내몰고 아홉 성을 쌓은 곳이 두만강 이북 7백리 선춘령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여진이라는 말의 뜻이나 여진의 역사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다. 여진하면 함경도 일대부터 그 북쪽 변경에 살던 부족으로 고려를 괴롭힌 오랑캐 정도로 인식하는 막연한 역사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진, 고조선 후예.... 야만스런 오랑캐 아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나라의 본래 이름은 주루준(珠嚕凖)이었는데 설음(舌音)이 와전이 되어 여진이 되었으며 혹은 루르진(魯爾錦)이었다고 한다. 혹은 발해의 별족(别族)이라고도 하고 또는 삼한의 하나인 진한(辰韓)의 후예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대금국지>에서 주리진(珠里眞)이라 하였다. 만주어에 소속(所屬)을 주신(珠申)이라 하는데 주리진과 음이 서로 가까우며 완급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모두 숙신(肅愼)이 바뀐 음이다. 후에 여진 혹은 려진(慮眞)으로 와전이 되었다. 숙신의 후예이며 발해의 별족이다.”라고 하여 여진이라는 말의 유래와 뿌리를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북애자가 편찬한 <규원사화>에도 “여진은 숙신의 후예이다. 그 옛 풍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믿음에 예의와 정성으로 한다.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여진이 야만스런 오랑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옛 성스러운 임금’은 단군을 말한다. 그런데 청나라 서건학(徐乾學)이 편찬한 <자치통감후편>과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 대신 ‘개출자연(皆出自然)’이라 바뀌어 있다. 개출자연은 “대개 자연스럽게 생긴 풍속”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골타(阿骨打, 1068년 ~ 1123년)이며 <요사>와 <송사>는 아고달(阿古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만주어 ‘아구다(Aguda)’를 가차한 것이며 ‘너그럽고 넓은 아량이나 모양(寛濶)’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구다는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9년(1115년 ~ 1123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한자식 휘는 민(旻)이다. 그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이었으며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하고 요나라를 공격하였다.

▲금나라 태조 김아구다의 모습. 조우(鳥羽)로 된 모자 깃이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임을 말해 주고 있다.

신라의 9주, 현 만주 지역 포함

금나라의 시조에 대하여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는 “<통고>와 <대금국지>에는 모두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요사>나 <금사>에서는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덧붙여서 “사전(史傳)의 기록으로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여 온 것인즉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건국한 나라의 이름 또한 당연히 이것을 취하였다. <금사지리지>에서 나라 안에 금이 있는 물줄기가 있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며, 전거로 삼기에 부족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금나라의 시조와 국명의 연원이 신라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이처럼 금나라의 연원이 신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부족’편과 ‘강역’ 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9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사습유(遼史拾遺)>와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録)>을 인용하여 신라산(新羅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동주(同州)에 이르면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보이는데 신라산이며 산의 깊은 곳과 더불어 고려와 경계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이 신라산은 오늘날(청나라 건륭제 당시)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의 사이’라고 하고 있어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으며 고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를 뜻하는 ‘계림(鷄林)’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한자 독음으로는 ‘길림’과 ‘계림’이 서로 다르지만 현 중국어 발음으로도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다. 김함보가 추장으로 있었으며 아구다가 금나라를 세운 요나라의 완안부가 신라의 강역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완안(完顔)’이라는 말은 <대금국지>에서 한어(漢語)로 왕(王)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신라왕의 후손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금나라의 시조인 김함보는 신라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라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도 <금사>에서 “완안부 사람들이 밝은(白) 것을 숭상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금(金)을 취하여 ‘대금(大金)’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어 성(姓)과 그 뜻을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금나라, 대부분 고구려와 발해 부족들로 구성

완안부 세력을 규합하고 금나라를 세운 태조 김아구다(완안아골타)는 요(遼)나라를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서성의 대동(大同), 하북성의 연경(燕京)으로 진출하였다.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하남성의 변경(卞京)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임금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나라는 만주 전역과 내몽골, 하북성, 하남성, 섬서성, 산서성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제3대 희종(熙宗,재위 1135∼1149)때에 회수(淮水), 섬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남송의 임금은 신하의 예로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 필을 매년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의 대부분과 만주와 유라시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금나라의 강역을 표시한 중국역사지도집 -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금나라가 이처럼 요나라에 이어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금나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군사 조직으로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는 맹안모극을 군사 행정 제도로 실시한 금태조의 강력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금나라의 군사제도는 후대에 금나라를 이었다고 하여 후금(後金)으로 불린 청나라의 8기(旗) 군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1115년 건국하여 1234년 몽골에게 망할 때까지 120년간 존속한 금나라는 정복전쟁만 일삼은 것이 아니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문화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제5대 세종(世宗, 재위 1161∼1189)때는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였으며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여진 문자는 1119년에 태조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존속기간 만에 금나라가 멸망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규원사화>의 ‘만설’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나라의 폐단은 한 때의 이익에 급급하여 오랜 폐악을 답습한데 있었으니, 그 중엽에 이르러 요(遼)의 검소하고 소박함을 깔보고 송(宋)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글을 따랐으며, 송(宋)의 너그럽고 부드러움은 제재하고 요(遼)의 엄격한 정치만을 더하게 되었다. 이는 두 나라의 장점을 버리고 그 단점들을 아울러 쓴 격이다. 그러한 까닭에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기승을 부리니 재정은 바닥이 나고, 엄격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백성들은 피해를 입었다. 무릇 나라의 살림이 고갈되고 백성의 마음이 떠났는데 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여 같은 고조선의 후예인 금나라 멸망을 한탄하고 있다.

금나라가 흑수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요동과 만주를 석권하고 장성을 넘어 변경을 도륙한 뒤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내쫓았다. 그랬더니 송나라의 군신이 신하를 자칭하고 목숨을 구걸하고 아첨을 떤 일은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을 통탄한 것이다.

여진이던 말갈이던 우리의 '사둔(一家)'

금나라는 멸망 이후 4백 년이 흐른 17세기 중반에 청나라의 중원대륙 제패로 다시 한 번 부활하였으나 금나라를 바라보는 고려의 시각이나 청나라를 바라보는 조선의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부모의 나라에서 형제의 나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청나라의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진 말 중에 ‘사둔(Sadu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친척 집안(親家)’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사둔’ 또는 ‘사돈’과 음과 뜻이 같은 말이다. 원래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사돈을 맺는다.’는 말로서 남녀 개인 간의 결합뿐만이 아닌 다른 집안끼리 친척이 되기로 맺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한집안(一家)이 되는 것이다. 말갈이라 부르든 여진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배달 고조선 고구려를 거쳐 이어온 같은 강역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는 ‘친척 집안’이며 일가(一家)이다. 금나라의 뿌리가 신라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이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었고 그 땅이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전향적인 연구와 인식이 절실하다.(완)

*글 :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