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원형 중의 하나, 서낭당...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 어느 표현이 맞는가? 아니면 성황당도 맞고, 서낭당도 맞는가? 성황(城隍)의 첫 기록은 부도지 14장에서 시작된다.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지더라.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성황과 서낭(西娘)의 차이를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 보면, 성황의 표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기인된 것으로 서낭(西娘)의 오기로 보인다. 서낭의 낭(娘)은 아가씨의 뜻 외에 ‘어머니’의 뜻도 갖고 있다. 어머니 쪽을 중심으로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모계 사회(母系社會)로 서녘에서 오신 어머니 즉 마고이시며 삼신할미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도지 1장에서 “마고(麻姑)는 희노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고 궁희는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을, 소희(巢姬)는 백소(白巢)와 흑소(黑巢)를 마고의 정을 받아서 배우자 없이 각기 두 천인과 천녀를 낳았다.” 하여 인류 최초 모계사회의 태동을 알리고 있다.

그 곳이 마고성(麻姑城)이며, 동이족이 웅거하던 대륙의 서녘지역이니 그 곳에서 오신 어머니인 삼신할머니가 아닌가. 생명을 잉태(孕胎)하는 모체(母體)가 여자였으며, 여자를 생명의 뿌리로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城과 隍의 글꼴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금문의 城자는 성을 지키는 무기(戊)와 성의 망루를 뜻(금문1)했는데 망루를 그리기 번거로워(금문2) 흙(土)으로 대치된 글자이다. 금문은 상주시대(商周時代) 청동기에 주조(鑄造)되어 있거나 새겨진 글자로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隍자의 소전을 보면 성 밖을 둘러 싼 못(垓子), 즉 城池라고 설문은 풀이했다. 토성을 쌓기위해 파인 구덩이에 물을 채워 적의 접근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해자이며 皇은 독음, 부(阜)로 뜻을 나타낸 것으로 진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이다.

성황은 마을 뒷산에 쌓아 적군을 방비하던 축성(築城)의 뜻이며, 서낭은 마을 어귀에 지어져 마을의 안녕과 만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기도의 터이다. 城의 고대어는 ‘잣’이다. '잣'은 순수 고유어지만 그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잣의 ‘자’는 “물체가 있거나 그것을 둘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말이니, 공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칭하면서 이전 사용하던 ‘자, 지’와 '재'의 뜻이 들어간 행정지명을 중국식으로 거의 모두 '성(城)'자로 바꾸었다. '잣'의 원말은 '위'의 뜻으로 지형을 나타낼 때는 '산꼭대기'나 '등성마루'의 뜻으로 뒤에 표준말로 정착되고, 잣 →자, 지 →재로 변하여 한재, 갈재, 새재 처럼 산이나, '고개'의 뜻으로 변하였다.

예를 들면, 1428년(세종 10) 우의정으로 물러난 유관(柳寬 1346-1433)이 삼성사(三聖祠)에 관한 상서(上書)한 내용에, ‘단군 조선 때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며, 신라 때에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다’하여 그 유래를 밝혔다. 단군시대 도성이었던 ‘아사달’ 말미 山은 원말인 ‘잣’에서 ‘성’과 ‘산’으로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잣’이 쓰인 옛 지명에 ‘잣안ㆍ잣미ㆍ잣골ㆍ잣실’ 등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성안(城內)을 뜻하는 ‘잣안’은 ‘장안’으로 쓰고 있다. 흔히 ‘잣’을 ‘잣(栢)’과 연관 짓기도 하나, 실제로는 단순히 ‘산(山)’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하겠다.

태초에 소리〔音〕가 있었고, 소리 값이 뜻글인 한자로 변화, 정립했다. 한자는 분명 우리의 뜻글이기는 하나 결코 한자에만 너무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 마고의 역사를 전해주던 신성지역 서낭당, 크고 넓은 세상을 아우르던 여신〔姑〕과 자재율 속에서 살았던 하늘나라 마고성의 축약지인 기도터가 아닌가.

▲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 고갯길 입구에 세워진 서낭당- 서낭당의 유래는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신단수에서 찾기도 한다. 무당들은 서낭나무라고 하여 굿을 할때 섬긴다(사진: 삼태극 국사광복단 제공).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모엄이란 자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성황에게 빌었으며, 당나라 장설과 장구령의 성황에 대한 제문이 있고, 송나라 이후에는 성황신사가 천하에 퍼졌다. 명나라 초기에는 경도의 군현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청나라도 이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두었으며 위엄 있게 숭배했다.”라 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본 조의 성황당은 바람, 구름, 우레, 비를 함께 하고 성황신을 받들었다. 바람, 구름, 우레, 비의 신을 오른쪽에 정좌시켜 남향으로 하고, 풍우단(風雨壇)에 신사를 행했다. 여제(厲祭)를 먼저 행한 다음 성황단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을 여제일이라 했다. 또한 성황신은 곳곳에 있으며, 무격이 기축하는데 반드시 신이 있다 하였다. 모든 성황신은 국도를 비롯한 팔도를 편안하게 하는 신이므로 나라를 보호하는 신이라 부른다.”했다.

이 글에서 이능화는 ‘조선무속고’라는 연구 논문을 통해 민속에 대해 관심을 불러 주었다. 참고한 문헌비고(文獻備考)는 1770년(영조46) 홍봉한 등이 왕명을 받아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라 했다. 최초의 편찬 기록이다.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제도, 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화사상기에 만들어진 자료의 언어 구성 문제인 성황의 뜻 말을 재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조선의 실록과 고전 또한 ‘성황’의 표기를 고수, 사대에 충실했다.

기원전 1891년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 했다’는 단군세기 기록을 성황당의 시원으로 둔갑시키는 일도 삼가해야 할 것으로 본다. 성황은 춘추필법의 관습에 의해 써진 낱말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西娘堂)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성황당에 대한 화하의 사초 첫 기록은 239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안휘성 (安徽省) 무호(蕪湖)에 사당(성황당)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전쟁과 재해, 전염병 등이 발생할 때마다 각지에서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앙으로 발전했다. 성황은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쳐 당(唐)대에 이르러 그 믿음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후대 도교(道敎)에서도 성황을 그들의 체제에 끌어들여 ‘흉악한 것을 물리치고 국가의 안전을 보우하는 신이며 한 지방의 망령들을 관활 한다’고 주장했다. 송(宋)대에는 전역에 걸쳐 모든 부현(府縣)에 있는 성지에 사당을 세워 성황신을 모셔 제사를 지냈으며, 원(元)대에 이르러 성황신을 한 단계 높여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명(明)대에는 주원장(朱元璋)이 토지신(土地神)의 사당(祠堂)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토지신에 대한 숭배와 존경이 최고조에 달했다.

도(都)의 성황신을 필두로 부, 주, 현 순으로 공식적인 토지신의 서열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하화족의 민간 신앙을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끼워 맞춰 서낭(西娘)을 성황(城隍)으로 덮어씌웠는데도 사대(事大)에 충성을 다 했다. 구월산 삼성사를 부숴버리고 아부에 급급했던 사대부들의 행태와 고사서(古史書)를 수거, 분서하고 위작 고려사를 만들어 역사를 호도한 증빙이 밝혀지고 있음에랴.

당파에 의한 계층 간 반목과 질시, 불신과 분노, 역사를 외면하고 사대에 맹종한 사대부들의 일신 안녕만을 추구한 복지부동이 남긴 유산이리라. 이제 선인(先人)의 기록에 후대의 왜곡과 곡필은 반드시 고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만 마고의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는 그만 두자.

* 글 : 한문수(성균관석전교육원 교수)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