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능력상실한 불교계, 부처는 없고 불교인만 가득하다.

 

타락절정에 오른 한국불교, 희망은 있는가,

절간에 스며있는 우리고유문화요소들은 무엇인가

인생 가장 절박한 문제는 죽음 공포다

경허선사 같은 존재들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대인가

 

▲서울 종로에 있는 한국 불교 대표하는 조계종 총 본산 조계사.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하여 1주일 전 부터 조계사 대웅전안에는 복을 비는 신도들로 가득찼다. 조계사 앞마당에는 큰 나무가 우뚝 서 있다. 한웅천왕이 내리는 신시 신단수를 뜻한다. 절간에 우리고유문화요소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조계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를 끌어 안고 저 마다 무엇인가 이루어 달라고 빈다.

불기2562년, 오늘 서기2018.05.22. 부처님오신 날이다.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부처님오신 날을 축하했다. 석가모니 부처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1천년 하고도 수백년이 흐르고 있다. 그 동안 수 많은 종파로 난립하고 있다.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대략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교주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아상我相(ego)은 반드시 패거리를 따로 만드는 습성이 있다. ‘생각’ 자체가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Buddha)는 ‘생각 없음’이다. 분열은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따로 살림을 차린 것이니 필연이다. 그러니 분열과 종파 난립은 반드시 일어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어쨌거나 불교 시조 석가모니를 모시는 날은 종파를 뛰어 넘어 전국에 걸쳐 거행되었다.

그런데 이 땅의 절간에는 부처가 없다. 불교문화만 있다.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다. 부처는 ‘생각없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절간에는 온갖 생각으로 가득찬 승려와 신도로 가득하다.

그 생각이 부처가 된 생각이나, 천당 생각이나, 거룩한 생각이나, 신성한 생각이나 모두 생각임에는 변함이 없다. 상황이 일변하여 언제든지 정 반대 생각으로 바뀐다. 생각은 좋은 생각 싫은 생각으로 대변된다. 좋은 생각도 생각이다.

지금 절간은 좋은 생각을 갖고자 노력하는 수행공간이다. 이것은 전문승려들이 하는 역할이다. 일반 신도들은 복을 달라고 빈다. 흔히 듣는 소리가 ‘성불하세요’다. 부처를 이루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이다. 이 기원도 이미 죽은 말이 된지 오래다.

▲ 부처님오신 날을 앞두고 조게종에서는 연등회를 개최했다. 2틀에 걸쳐 조계사 앞 도로는 세계 각국에서 온 불교가 선을 보인다. 사진은 티벳불교다.

그런데 이 불교문화공간도 최근에 와서 더욱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최근에 문화방송 피디수첩에서 방송한 것을 보면 한국불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 주고 있다.

한국 불교 대표종단 최고 수장의 경력이 화려하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강간, 살인교사미수, 횡령, 학력위조 등 백화점식 범죄자다. 또 한 대표승려는 접대부 술집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성욕을 즐겼다. 성추행은 애교다.

작은 사찰 말단 승려가 이랬다면 일부 일탈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종단 대표 격 승려들이 한 것이다. 그동안은 좋은, 거룩한 불교문화공간이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악한 불교문화공간으로 절간이 변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타락의 대표지표는 또 있다. 절간 한 앞에 길을 막고 문화재 관람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다. 절간을 가지 않는 사람도 그 길을 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 자비를 외치는 불교가 돈을 뜯어 낸다는 것에 할말을 잃는다. 이미 이윤추구하는 기업체로 변했음을 말한다.

부처가 떠난 자리에 부처를 앞세운 아집과 아상만이 새빨갛게 뻗쳐있다.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다만 서로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신도는 돈 내고 복을 빌고 승려는 돈 낸 신도를 위해서 염불을 한다. 불교는 종교를 가장한 철저한 위계질서로 유지되는 강력한 권력조직일 뿐이다.

여기에 신도들이 열심히 힘을 보탠다. 불교라는 조직에 소속된 신자로써 불교힘이 곧 자기 힘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자신간의 동일시다. 불교아상 탄생이다. 불교아상은 승려가 더 강고하고 신도가 조금 약할 따름이다.

▲승려들이 만달라를 정성을 다해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화려하게 만들어 놓고 한순간 흩어 버린다.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집착은 고통과 번뇌의 뿌리라고 한다.

다른 종교 타락도 불교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기독교, 이슬람교 등 타 종교가 불교보다 더 타락했다는 것은 다른 것도 많지만 살육의 일상화다. 이들 종교사는 살육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도 종교에 기반하여 중동에서는 살륙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그나마 불교가 타 종교보다 덜 욕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역사에서 서양과 같이 종교가 살육을 일상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또 불교가 우리고유문화요소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잊힐 것 같지 않다.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이다. 사찰 맨 위쪽에 통상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집이다. 삼신, 삼성, 칠성이라는 말은 불교와는 거리가 있는 이름들이다. 우리 고유문화요소다.

산신은 단군의 다른 이름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일연이 고기를 인용해서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 뒤에 아사달에 숨어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국의 산에는 산신이 정좌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굳이 이 산신들 역사성을 찾자면 단군이라는 것이다.

삼성은 역시 삼국유사 고조선기를 보면 한인, 한웅, 단군이 나오는데 이 세 성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계사 일대에서 2일 동안 열리는 연등회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세게각지에서 외국인이 몰려오며, 행사내용도 불교요소 외에 우리고유문화요소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칠성은 어떤가, 우리고유종교를 굳이 말하자면 굿, 무당이다. 무교巫敎로 불리고 있다. 굿 중에는 칠성거리가 있다. 또 제주도 무속신화에는 칠성사신七星蛇身 등 신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 무당이 쓰는 무구巫具, 명두明斗에 새겨진 별자리가 북두칠성이다. 물론 해와 달도 새겨져 있다. 토속성과 원시성을 가지고 있다.

칠성이 중국 도교에서 왔다고 한다. 근거 없는 소리다. 도교가 들어오기전 고인돌에 새겨진 대표 별자리가 북두칠성이다. 북두칠성 곧 칠성은 도교가 나오기전 아득한 세월이전부터 내려오는 우리고유문화다. 오죽하면 윳판도 북두칠성이 4계절 도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는 논문도 나오겠는가. 그래서 절간 맨 위에 있는 칠성각이 우리 것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절간에 우리고유문화요소는 또 있다. 절간의 중심각인 대웅전大雄殿이다. 다른 말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대부분 대웅전이라고 쓰고 있다. 민족사학에서는 흔히들 대웅전을 한웅전이라고 풀이한다. 대웅전의 대大를 우리말 한으로 바꾸어서 부른다. 지금 충남 대전大田이 원래는 한밭이었다는 사례를 든다. 원래 대웅전에는 한웅천왕을 모셨는데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불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충남 당진 지역에 있는 한 사찰의 산신각. 이 산신각에는 정 중앙에 산신그림이 안치되어 있다. 보기드문 경우다. 대부분 절간의 이런 산신각에는 정 중앙에 부처 그림이 놓여 있다. 왼쪽이나 오른 쪽에 산신그림이 있는 형편이다. 산신은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의하면 단군을 말한다.

절간의 우리고유문화요소는 이 뿐만이 아니다. 통상 대웅전 앞마당 중앙에는 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복을 빌며 탑돌이를 한다. 탑을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소원을 빈다. 그런데 이 탑은 단순히 돌을 조각해서 만든 물체에 지나지 않을까. 탑 자체를 보면 특별한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갓 모습을 한 탑층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뭘 빌 것이 있을까.

단순한 돌 물체에 소원을 빌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탑은 신단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신단수는 하늘 신, 한알님, 천령인 한웅천왕이 내리는 곳이다. 이것도 분명한 역사성을 띠고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한웅천왕이 아버지 한인의 명을 받아 천부인3개와 무리 3천을 이끌고 이 땅에 온다. 홍익인간세상, 이화세계를 이루고자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다. 이름하여 신시神市라고 했다. 이것을 무속에서는 서낭나무에 오방색 띠를 두르는 것으로 나타낸다. 또 나무에 오방색 끈을 매서 굿 마당으로 내려 잇는다.

대한불교 태고종 본찰 서대문구 봉원사에서는 해마다 부처님오신날 대웅전 마당에서 영산대제를 거행한다. 삼신불을 그린 괘를 무대 앞에 걸어놓는다. 그런데 괘불 지지 양쪽 기둥 꼭대기를 나뭇가지로 장식한다. 나무 술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양쪽에 오방색 다발 끈을 드리우고 있다. 또한 오색 띠를 괘불에서 시작하여 행사장 청중석까지 잇어 놓는다. 여기도 신단수 개념이 등장한다. 솔로 상징되는 신단수에 오방색 끈으로 한웅천왕이 내린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태고종 총 본산 봉원사. 부처님오신 날이 되면 이 절에서는 영산대제를 선보인다. 그런데 이 영산대제 행사장 정면 괘불과 주변 장식물이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괘불 양쪽 기둥 끝에는 신단수를 상징하는 나무 잎이 장식되어 있다. 또 양쪽에는 한웅천왕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오방색 끈 타래가 내려져 있다.

한편 부처님오신 날을 다른 말로 ‘사월초파일’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사월초파일이라고 전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력으로 4월 8일을 부처님이 탄생한 날로 본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탄생한 날을 부처님 오신 날로 하는데 나라마다 틀린 것이 확인된다. 4월 8일을 부처님 오신날로 기리는 나라는 우리 말고 대만도 있다.

그런데 <한단고기> 북부여기에는 해모수가 내린 날을 4월 8일로 정하고 있다. 북부여에서는 임금을 단군이라고 불렀다. 시조가 해모수다. 북부여 개국신화에는 해모수가 나이23세에 하늘에서 웅심산에 내려온 날을 4월 8일이라고 한다.

민족사학계에서는 지금 우리나라 부처님오신날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흔히 해모수 탄생일을 부처님오신 날로 바꾸어 기린다고 알려져 있다. 예수탄생일을 12월 25일로 기리고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 날은 로마 태양신 탄생일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진짜 예수탄생일은 다른 날이라고 한다. 이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나라 부처님오신 날도 아마 이런 사례일지도 모른다. 석가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 땅의 토속신을 존중했다고 한다. 앞서 우리고유문화요소가 절간에 많은 것이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탄생일도 원래 다른 날짜인데 해모수라는 우리 조상신과 관련된 날짜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신도들 또는 사람들이 절간을 찾는 이유도 이런 우리고유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석가모니불을 찾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 무의식에는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절간에 오는 대부분 사람들이 절간 맨 위에 모셔져 있는 산신각을 찾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간의 본체이자 중심이며 핵심 전각이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은 '한웅전'으로써 한웅천왕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조계사 대웅전이다. 그 앞에 한웅천왕이 내려오는 신단수를 나타내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단군세기>에서는 한웅천왕이 항상 계시는 곳이라 하여 '웅상雄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외에 불교가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남을 가능성은 많다. 불교가 남겨놓은 경전 속말이다. 비록 말글로 전해오고 있지만 물질세계를 넘어 영원한 무엇을 찾는 이들을 끊임 없이 유혹한다.

이른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누가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예수 언행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도 저자가 있지만 누가 썼는지 역시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반야심경>, 4복음서 모두 보통사람이 쓴 것 같지는 않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신비로움을 주는 대목이 공중空中에는 눈, 귀, 코, 혀, 몸, 의意가 없다고 한다. 여기서 공은 하늘과 같은 허공이 아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체험세계다.

또 공중에는 안계眼界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니 의식계意識界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공상태가 있다고 한다. 또 공상태가 아닌 오관(눈귀코혀몸)과 그 결과물인 의意(마음)으로 형성된 이 세계는 사실 허상인 꿈이라고 까지 한다.

보이지 않는 공계가 실상이지 색으로 대표되는 색계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이 세계가 허상인 꿈이라고 한다. 누가 이것을 믿겠는가. 그러나 불교 대표경전이라고 하는 <반야심경>이 거짓말을 할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수께끼이고 신비다.

이어 공포, 두려움을 얘기한다. 보리살타(보살,bodhisattva)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서 공포가 없다고 한다. 공포감은 사실 인간 삶과 죽음의 유일한 걸림돌이다. 우리 삶과 죽음이 여기에 달려있다. 우리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강도, 정도만 다르지 공포감의 연속이다. 두려움이다.

▲<마하반야바라밀타심경>, 곧<반야심경>일부분이다. 오른 쪽 부터 시작한다. 처음 부터 문구가 심상치 않다. '관자재보살' 보살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보살(보디사트바)이라는 소리다.

수험생이 시험을 치룬 후 합겨여부에 대한 조마조마한 마음이 두려움, 공포감에서 나온다. 무대에 올라 노래하려고 할 때 떨리는 것도 두려움에서 나온다. 강연을 앞두고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도 두려움에서 온 것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서 온다. 인간 삶의 모든 행위가 결국 죽기 전에 무엇인가 이루려는 크고 작은 몸부림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죽음 공포가 몰려오기도 한다. 몸이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 있을 때 죽음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주일 전부터 태어나서 처음 대상포진이라는 것을 앓고 있다.

정수리 오른쪽이 뽀개지도록 아프기 시작하더니 하루아침에 머리와 이마 그리고 오른쪽 주변이 울퉁불퉁 솟더니 붉게 물들었다. 닿기만 해도 바늘로 찌르는 고통연속이다. 이어 수포가 생기고 고름이 나온다.

칼로 찔러 후벼 파는 고통은 이제 뒤통수 목 뒤로 옮아 갔다. 잠을 잘 수 없다. 저절로 비명을 지른다. 눈알이 빠져 나오는 것 같다. 병원에 가서 염증 치료약과 진통제를 타다 먹고 있으나 안 듣는다. 오늘쪽 눈이 부어서 아예 감겨 버렸다. 애꾸눈이 되었다.

그래서 이 글도 애꾸눈 상태에서 글씨를 최대한 크게 한 상태로 겨우 쓰고 있다. 기사를 걸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주변이 마치 불이 꺼지듯이 스스로 꺼져가는 것 같다. 죽음이 이런 것인가. 직감으로 죽음 공포가 엄습해온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공중에는 몸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몸에서 일어나는 이 질병과 고통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이 고통과 공포가 사실은 허상이고 헛것이라는 소리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이것은 모두 전도된 몽상이니 멀리 떠나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구경열반에 든다고 한다. 이 얘기는 모두 소위 저 너머로 건너간 존재들이 하는 소리 일 것이다. 그러나 이 너머에 있는 자들은 이 고통, 이 공포가 생생한 현실이고 실상이다.

<반야심경>은 이와 같이 인간의식 진화의 최정점을 말한다.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공이 있다고 한다. 영원한 화두요, 수수께끼다. 어차피 무덤 속으로 들어갈 몸이라면 한번 궁구해봐야한다.

▲서기19세기 중반에 와서 서기20세기 초반에 떠난 경허선사. 그는 불과 9세때 출가하여 불교에 입문한 정통승려다. 그래서인지 선지식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전과 교리 및 한문에 능통했다. 강사로도 그래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 한다. 천안 일대에 창궐한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아비규환의 한 마을을 지나면서다. 그는 가던 길을 멈주고 다시 공주 동학사로 돌아가서 생사를 건 자신과의 투쟁에 돌입한다. 그리고 깨친다. 이 후 그의 행적을 보면 대자유인 그 자체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제자로 수월, 혜월, 만공 등 불교현대사에서 굴직한 선승들이 배출된다. 그러나 그 후 이렇다할 선승들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모두 불교안에서의 불교인들이 나오는 수준이다.  사진출처: 불교저널

불교는 이러한 심오한 그 무엇이 나온 종교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여기서 너무나 멀리 왔다. 불교타락도 우주원리 속의 하나라고 본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어차피 가치판단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불교는 선악 중에서 선만을 추구해야 하고 성불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안고 있다.

경허선사라는 거물이 있다. 서기19세기말 승려다. 그는 도를 많이 닦았다고 한다. 그러나 괴질로 마을 전체가 사라지는 죽음 현장을 보고 닦은 도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극심한 죽음 공포를 체험한다. 이후 생사와 선악을 뛰어넘는 삶을 산다. 경허선사와 같은 존재들이 많이 나와, 조계사 총무원장도 맡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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