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이비’고 누가 ‘유사’ 역사학인가?

『역사비평』의 이른바「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에 대해서

1.
  『역사비평』2016년 봄 호는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란 기획 기사에서 세 명의 젊은 사학자의 글을 실었다. 기경량 씨의「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위가야 씨의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안정준 씨의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그 글들을 읽으며 몇 가지 사실에서 크게 놀랐다. 첫째는 『역사비평』이라는 잡지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옹호하는 특집을 버젓이 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둘째는 이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비학문적이라는 점과 논리의 박약성에 놀랐다. 셋째 조금의 역사 지식만 있어도 금방 거짓으로 드러날 주장들을 공개적으로 한다는데 놀랐다. 넷째 조선총독부 사관을 옹호하는 이런 정치선전에 대해 ‘젊은 학자들 나섰다’는 식으로 칭찬하는 이 나라 언론의 병폐에 크게 놀랐다.

한마디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구한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많은 독자들이 이들과 일부 언론의 이런 행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한 일부 독자들이 사태를 오해할 수 있기에 그들의 글을 분석함으로써 과연 어느 쪽이 ‘사이비’인지 독자들의 판단에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세 학자 중 기경량 씨는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에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하는 역사연구’임을 전제하면서도, 필자 같은 연구자들의 연구는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사이비로 규정하는 논리의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마도 요즘 초등학생들도 배우는 논술의 기본 개념도 익히지 않았는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과 타 학자의 글을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규정짓는 것이 상호 모순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특히 역사학은 이런 다양한 설들 중에서 어느 것이 보편타당한 진실을 담고 있는가를 검증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사료적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주장들은 정리되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왜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는지 사료적 근거를 토대로 검증하는 대신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규정짓는 비학문적 낙인찍기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에 실린 이른바 낙랑유적. 그러나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이 지역은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낙랑군=평양설’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 기경량의 말을 빌리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낙랑군=평양설’이라는 한 목소리만 존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고, 광복 7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낙랑군=평양설’은 이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자 매일 외워야 하는 기도문이다. 역사학이 종교적 교리가 아닌 다음에야 지금 강단사학계의 ‘낙랑군=평양설’이라는 한 목소리가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물론 “경복궁은 서울시에 있다”는 이야기처럼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면 “경복궁은 부산에 있다”는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설들은 토론과 검증 과정에서 저절로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강단사학자들의 ‘낙랑군=평양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낙랑군=평양설’이 치열한 검증을 거친 정설이라면 다른 설에 대해 사료적 근거를 들어 비판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사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다른 학설에 대해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규정짓는 비학문적인 낙인찍기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행태야 말로 역사파시즘이다. ‘낙랑군=평양설’ 자체가 극도의 파시즘 국가였던 일본 제국주의가 확립시킨 식민사관의 정수이다.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나 조선총독부가 이땅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확립시킨 정치선전이라는 점에서나 ‘낙랑군=평양설’이야말로 역사파시즘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역사 파시즘이라는 것은 자신의 견해와 다른 역사학자들이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고 단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기경량 씨는 ‘학문 영역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사료의 조작을 시도’한다고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민족사학자들을 비난했다. 『환단고기』가 위서이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고대사를 논하는 것이 조작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환단고기』를 얼마나 연구했기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는 지면상 논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들이 왜 이렇게 『환단고기』에 대해서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내는지도 논하지 않겠다. 다만 이들이 지금 ‘낙랑군=평양설’을 비판했다고 극도로 비난하는 학자들 그 누구도 『환단고기』를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점은 밝히고자 한다. ‘낙랑군=평양설’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서기 전 2세기 때 기록인 『회남자(淮南子)』나 『사기(史記)』 같은 중국의 여러 1차 사료들을 근거로 삼았다. ‘낙랑군=평양설’을 비판한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가 신채호·정인보 선생과 북한의 리지린, 그리고 생존해 있는 윤내현·복기대, 이덕일 같은 이들은『환단고기』를 근거로 제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강단사학계에서 알면서도 외면했는지, 아니면 공부가 부족해서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단사학계에서 제시하지 못했던 중국의 1차 사료들을 근거로 ‘낙랑군=평양설’을 비판했다. 그러면 강단사학계는 이에 대해서 1차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반론하는 것이 역사학적 방법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료가 없다 보니 구체적 반론을 할 수가 없어서,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비판하거나 ‘사이비’로 모는 것이다. 그래서 강단사학계의 이런 행태 자체가 파시즘이며, 사이비니 유사니 하는 비판은 일체의 사료적 근거도 없이 하나뿐인 정설만 신봉하는 지금의 강단사학계에 되돌리면 맞는 말이다. 기경량 씨 역시 기존의 강단사학계가 그랬던 것처럼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사료의 조작’과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사례를 구체적으로 논증하지는 않고 총론으로만 낙인찍기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단적인 예를 필자는 국사학, 즉 지금의 강단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씨의 글에서 제시하겠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구절이 있다. (고)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병도 씨는 조선이 열양 의 ‘동쪽’에 있다는『산해경』의 원문을 ‘정확하게는 남쪽’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바꿨다(「패수고」, 1933) 또한 이병도 씨는 ‘열양은 열수(列水)의 북쪽이란 뜻’이라면서 “열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은 기지(旣知:이미 알려진, 괄호는 필자)의 사실(『한국고대사연구』, 2001)”이라고 열수를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 낙랑군 조에는 “열수는 요동에 있다(列水在遼東)”라고 요동에 있는 강이라고 나온다. 『후한서』 군국지에 요동에 있는 강이라고 나오는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우기려면 근거를 대야 하는데 아무런 근거 제시가 없다.


또 『사기』 「조선열전」에 한나라 수군 대장 양복이 위만조선을 치러 갈 때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渤海)에 떠서(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병도는 여기의 발해를 아무런 근거 없이 황해라고 조작했고(「패수고」), 후에는 ‘발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고 ‘바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면서 “지금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국도(國都) 왕험성(王險城:평양)을 지향하여”라고 한나라 수군이 황해를 건너온 것처럼 조작해서 설명했다(『한국고대사연구』). 위만조선의 왕험성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고정시켜 놓다 보니 발해와 황해는 분명히 다른데도 『사기』 원문의 발해를 자기 마음대로 황해로 바꿔서 설명한 것이다. 기경량 씨는 이런 것이야말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사료의 조작’이란 사실을 밝히고, 이런 주장이야말로 ‘학문의 범주를 벗어난’ 사이비이자 ‘낙랑군=평양성’이야말로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역사파시즘임을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젊은’이라는 형용사에 걸맞게 되는 것이다.

2.
 다음에 위가야 씨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이가?」에서 조선 후기의 한백겸·유득공·정약용·한진서 등 학자들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미 주장했으니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창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익 선생의 요동설을 언급했으나 이익의 주장에 대해서는 “독특한 사료 해석을 근거로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폄하했다. 자신들의 생각과 맞으면 일반적 견해이고 다르면 ‘독특한 사료 해석’이라고 폄하하는데서 하나의 정설만 우기는 이들의 파시즘적 사고가 엿보이고 있다. 또한 위가야 씨는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 싸운 신채호·정인보 선생 등의 학설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에도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싸고 두 학설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두 학설 중 어느 것이 맞는 학설인지를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하는 것이 역사학적 방법론이다.

그러나 위가야 씨나 강단사학계에서는 정약용의 설이 맞다고만 주장할 뿐 왜 맞는지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정약용의 설이 일제 식민사학의 설과 같기 때문에 환호하는 것이라는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작 정약용이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지금 사람들은 낙랑군의 여러 현이 혹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당시 사람들 다수가 ‘낙랑군=요동설’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다. 윤내현 교수가 한사군 한반도설이 문헌적 근거가 단 하나도 없다고 비판하며 1차사료로 요서설을 주장한 것은 1차사료에 대한 치밀한 검증을 거친 것이다. 지금의 강단사학계는 낙랑군을 평양이라고 서술한 1차사료가 전무하자 말없는 고고학 유물로 도망가서 ‘낙랑군=평양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강단사학계가 사이비인가, 1차 사료에 입각해서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민족사학계가 사이비인가?


  문헌적 근거에 관하여 위가야 씨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처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파악한 중국사서의 주석가들 이래 ··· ”라고 서술했는데, 이는 그의 학문이 이 문제를 다루기에 부족하거나 아니면 강단사학계의 고질병적 수법인 1차사료의 자의적 변개 사례다. 이는 전적으로 거짓 주장으로, 중국의 1차 사료나 그를 해석한 수많은 주석가들은 결코 한사군을 한반도로 파악하지 않았다. 강단사학의 주장대로 중국의 여러 1차 사료나 여러 주석가들이 한사군을 한반도로 서술하고 있다면 강단사학계는 왜 그 많은 근거들을 제시하는 대신 1차 사료를 조작하거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의 가치를 폄하하는 비학문적 태도로 일관하겠는가?


중국 고대의 여러 주석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낙랑 등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몇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산해경』의 열양(열수의 북쪽)의 ‘동쪽’에 조선이 있다는 기록을 이병도가 열수의 ‘남쪽’이라고 조작한 사례를 보았는데, 이병도가 조작에 나선 이유는 1차 사료만이 아니라 주석서도 열수를 반도 내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산해경』의 주석자인 곽박(郭璞)은 낙랑군 열구(열수의 하구)에 대해 『산해경』을 인용해 “열(列)은 강 이름이며,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주석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한서』 군국지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1차 사료인 『산해경』에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쓴 것을 주석자인 곽박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열구(列口)에 대해 또 『사기색은』에는 소림(蘇林)의 말을 인용해 “현 이름으로 바다를 건너면 가장 먼저 이르는 곳이다.”라고 주석했다. 여기의 ‘바다’는 앞에 본 『사기』 「조선열전」의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 그 후 당도한 곳이다. 즉 발해 서안을 말한 것인데, 열수가 한반도의 강이 아님을 앞에 보았으므로 그 입구인 열구 역시 한반도가 될 수 없다.


  하나만 더 예를 보겠다. 낙랑군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에 설치한 것인데, 이 왕험성에 대해 『사기집해』는 서광(徐廣)이 ‘창려군에 험독현이 있다’고 말했고, 응소(應劭)는 ‘『지리지』에는 요동군에 험독현이 있는데,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지역이라고 주석했다고 말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군의 이름이 변했지만 그 산하 험독현의 이름은 그대로였는데, 이곳이 바로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험성이라는 뜻이다.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자체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기』의 여러 주석서들은 왕험성이 한반도의 평양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또 신찬(臣瓚)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 패수가 만약 조선총독부나 기존 강단사학계의 비정처럼 한반도의 압록강(쓰다 소키치 및 노태돈의 설), 청천강(이마니시 류, 이병도), 대동강(이나바 이와키치, 역도원) 등이라면 왕험성, 즉 평양은 그 강들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동쪽에 어찌 평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예만 보아도 중국의 1차 사료들이나 주석자들이 말하는 낙랑군의 위치는 한반도의 평양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필자는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에서 낙랑·위만조선 및 그 전의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근거로 위와 같은 사료를 30개 이상 열거한 바 있다. 위가야 씨는 중국의 고대 1차 사료나 그 주석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한 사료적 근거를 단 하나라도 제시하기 바란다. 역사는 1차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인데, 이런 사료적 근거가 하나도 없으니 ‘사이비’니 ‘유사’니 하는 파시즘적 용어로 상황을 호도하는 것 아닌가? 아직 젊은 나이에 이런 식의 비학문적 행태를 역사학으로 포장해서야 그 자신과 학계,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가 어찌 되겠는가? 극도의 전체주의 국가였던 일제가 만든 학설을 추종하는 것이야 말로 사이비 역사학이자 파시즘적 사고 아닌가?

3.
  세 번째로 안정준 씨는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요 근거로 유물·유적을 들면서,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연구에 그런 공식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낙랑군=평양설’을 공식(정설)이라고 우기면서 다른 학설을 사이비로 몰다가 막상 이를 입증하는 사료적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런 공식은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역사 연구에 어찌 공식이 있겠는가마는 문헌사료가 고고 유물·유적보다 우선이라는 것은 공식보다는 기본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씨조차 일찍이 ‘유물은 항시 굴러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문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만약 천 년 뒤 지금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의 유물이 쏟아진다면 인천을 중국의 식민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천 년 뒤 미국 뉴욕의 코리아타운에서 한국계 유물이 쏟아진다면 뉴욕을 한국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고려후기 유학자들이 중화사대주의 관점에서 평양에 기자묘를 세웠다. 물론 허묘이다.

  안정준 씨는 광개토대왕비가 ‘1,600년간 왕릉 주변에 서 있는 것’ 이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에, 유물·유적을 1차적 판단근거로 삼고 문헌사료도 함께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내용을 일제가 변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여기서 잠시 접어두더라도, 광개토대왕비는 ‘낙랑군=평양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유물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에 대해서 연구할 때 사료로 삼으면 되지 지금의 ‘낙랑군=평양설’과는 무관하다. 근거가 없다보니 이런 논리적 비약을 거듭하는 것이 안타깝다.


문제의 핵심은 일제가 평양 지역에서 발굴한 70 기의 고분과 광복 후 북한에서 발굴한 무려 2,600 기의 고분이 모두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듯이 거짓말을 하는 데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여러 유적·유물에 대해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이미 조목조목 조작설을 제기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자. 해방 후 북한에서 발굴한 2,600여기의 무덤의 성격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사회과학연구소)』라는 책에서 설명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출판되었다. 북한은 이 책을 통해서 북한 지역의 고분들은 낙랑국의 고분이지 낙랑군의 고분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즉 북한에서는 2,600 기에 대한 조사 결과 평양 지역은 한나라 낙랑군이 아니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몇 가지 유물만을 자의적으로 채택해서 안정준 씨가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이 고분들이 낙랑군의 것이 아니라는 북한 측의 상세한 보고서를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서 반박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전개해야 할 것인데, 그런 과정은 생략하고, 더구나 그 유적들을  전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몇몇 유물을 편리하게 자신의 입장에 꿰맞추어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비학문적 방식임은 굳이 논할 가치조차 없다.


필자 주위의 여러 연구가들은 『역사비평』에 실린 세 편의 논문을 보고 모두 혀를 찼다. 일부 편향된 언론에서 ‘젊은 학자’ 운운하며 칭찬했는데, 젊다는 것은 기존의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허황된 논리를 비판하는 학설에 대해 ‘사이비’니 ‘유사 역사학’이니 하는 비학문적 용어로 매도하는 것을 보고 그들 자신과 이 나라와 학계의 미래에 대해 큰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이 또한 광복과 동시에 해체되었어야 할 조선총독부 역사관, 즉 식민사관이 하나뿐인 정설로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국 사회의 기괴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필자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아직도 강단사학계는 식민사학을 추종하나요 라는 것이라는 점을 되새겨주고 싶다. 아니 필자 역시 강단사학계에 되묻고 싶다. 왜 아직도 식민사관을 추종하는가?

*글 : 황순종(고대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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