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령위' 위치는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식민사학계에 반격 2탄>

고려 말,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경은 '요동' 철령

위화도 회군 세력에 의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조작

광복 후,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 왜곡된 주장을 답습하여

'강원도 철령위'로 고착

 

▲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정태만 교수가 밝혀낸 고려말 철령위 위치.

고려말 신생국 중국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일방 통보해 왔다. 철령위의 ‘위衛’라는 것은 명나라 행정, 군사구역을 나타낸다. 곧 철령까지 명나라 국경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 영토라는 말도 된다.

철령위 설치는 명나라가 고려 영토인 철령을 자기네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통보였다. 명나라가 흥기하면서 몽골제국, 원나라가 몽골초원으로 퇴각해 갔다. 이에 원나라가 사실상 차치하고 있던 고려 영토, 철령지방을 신흥국 명나라가 원나라 대신 차지하겠다는 것이 철령위 설치통보다.

이 통보에 고려는 대화로 여러번 시도했으나 먹혀들지 않자, 명나라를 토벌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당시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파가 내린 결단이었다. 그래서 최영을 8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도통사, 이성계를 우도통사로 하여 10만 정예군을 편성하여 명나라 토벌에 보낸다.

<고려사절요>에 고려군이 평양을 지날 때 배웅 나온 백성들이 '고려군 10만이 나가고 있다'고 환호 했다.

또 기마병력은 2만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기마병, 기병의 위력을 보자.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태조 금누루하치가 한말이 있다. “내게 기마병 1만만 주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이는 기마병의 위력을 상징하는 말로 유명하다. 그 만큼 기마병의 파괴력이 1당 백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중화사대주의자, 우도통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만약에 이성계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동아시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가슴이 뛴다. 동아시아 패자로 우리가 몽골제국, 원나라에 이어 등극했을 것이다.

더 추정해보면 해양제국 고려, 상업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던 고려제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지식정보 최첨단을 달릴 수 있게 하는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만들었고, 최고질의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종이는 이조선 시기 병사들 우비와 방탄복으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대량생산체제, 최고질 한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송나라 서긍이 남긴 <선화봉사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민간에는 책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는 금속활자를 통한 대량출판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고 세계최고 지식정보사회를 구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국사책에서 그려지는 우리 고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거의 정반대 모습이다. 모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그늘이다.

이와 더불어 고려역사를 담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위화도 회군 반란 세력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이는 필연이다. 고려 <왕조실록> 등 고려가 남겨놓은 사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현존하지 않는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이성계 조선이 만든 이조선 <고려사>, <고려사절요>만 전하고 있다. 이는 고려 눈으로 바라본 고려사가 아니라, 중화사대주의 정권, 이조선 눈으로 바라본 고려역사라는 뜻이다. 승자가 쓴 것이니 얼마나 왜곡, 날조되었는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려역사는 결국 조선총독부 식민사관과 이조선의 왜곡으로 두번 죽은 셈이다.

특히 철령위 위치 왜곡이 극심하다. 철령위 위치에 대하여 현행 국사교과서는 당시 명나라가 강원도 북단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그 이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려고 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참고로 쌍성총관부라는 기구가 있는데 원나라가 설치한 것으로 철령위 이북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제안
철령위가 현행 국사교과서가 말하는 강원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인하대학 고조선 연구소 정태만 교수에게서 나왔다. 서기2018.03.30.(금)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에서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주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정 교수는 먼저 고려말 서기1387년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와 고려간에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통고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당시 명 태조가 양국간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철령과 그 이북의 문주, 함주, 공험진 등이 고려땅"임을 주장한 표문을 명나라에 제출했다. 이에 명태조가 "요동 봉집현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서기1388년 3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려는 옛날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왔으므로, (요동의) 철령과 그 이북땅은 명나라 땅” 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고려는 이러한 명나라 요구를 거부했다. 또 고려가 그 철령이 '강원도 철령'인지 '요동의 철령'인지 명시하지 않고, 고려땅임을 주장한데 대해, 명나라는 철두철미하게 요동에 있는 철령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고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같은 사실은 처음부터 주원장이 강원도 북단 철령이 아닌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하여,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강원도 철령 북단의 쌍성총관부 지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정 교수는 이러한 근거로 <명실록>(1387.12.26, 1388.3.27, 4.18)과 <명사>(이원명 전)를 들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정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는 만큼, 그 근거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에 명태조 주원장이 경계로 삼고자 한 철령이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는 것은 최근 인하대학의 복기대교수, 강원대학의 남의현 교수 등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바 있다. 정교수는 이에 더하여 이렇게 잘못 알려지게 된 근본 원인이 <고려사>조작 때문이이라고 지적했다.

▲ 이성계 조선에서 내 놓은 고려역사책,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고려 진면목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부터 누락 왜곡
정교수에 의하면, 서기1388년 4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위의 철령위에 관한 사실들을 고려에 통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요동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되었다(1388년 3월)는 사실'이 누락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 논의가 중단되었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이미 한 달 전에 강원도가 아닌, 중국 요동에 철령위가 설치되어 종료되었는데도 '논의가 중지되었다'고 왜곡시킨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철령위 설치통보에 따른 명나라 토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집권한 세력이 쓴 사료다. 이성계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로써 위화도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락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정태만 교수는 추정했다.

일제 관변학자에 의한 왜곡 및 식민사학자들의 답습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철령위 위치를 누락, 왜곡시키므로써 철령위 위치 왜곡 근본원인이 된 셈이다. 그 후 대일항쟁기에 일제 관변학자들에 의해 '고려말 문제가 된 철령은 강원도 철령'을 말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철령위 위치를 왜곡 시켰기 때문에 해석을 바로 해서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려 말에 명나라가 강원도 북단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이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마땅히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바로 잡아야 한다.

당시 고려는 요동지방을 고려땅으로 인식
그러면 명나라 토벌은 왜 하려고 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의 무리한 공물 요구, 상호 간의 사신 피살, 자주파와 사대파의 갈등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고려의 고려 땅, 요동수복전쟁이다. 고려는 공민왕 때에 이르러 현재 요하 동쪽에 위치한 요동성을 수복하고 이곳이 고려 땅임을 선포하는 등 원나라 간섭으로 눌려 있던 고려 땅 수복전쟁에 나섰다.

그런데 요동성 더 동쪽에 있던 철령에 명나라의 위를 설치하여 중국 명나라 땅으로 만들겠다고 하니, 고려에게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국토를 빼앗길 수 없으니 명나라를 토벌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잘못된 설정된 철령위 위치를 역이용하여  "강원도에 철령위가 설치되었고 그 이북 지역은 명나라 땅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정 교수는 우리 세대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북한의 격변기에 화근이 될 수있다고 내다 봤다.

▲ 중국은 현재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채워진 우리 국사책을 역 이용하여 고려말 명나라가 말한 철령위가 강원도 북단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동북공정이다.

명나라 스스로도 '압록강은 고려땅'을 인정하고, 요동의 철령이북은 중국땅 주장
한편 정교수는 이날 고려는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것을 명나라 스스로가 인정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서기1387년 12월 명나라에서 철령을 고려와 명나라간에 경계로 할 것을 알려왔다. 이어 4개월 뒤인 서기1388년 4월, 다시 요동땅 철령에 철령위가 설치되었다고 통보했다. 또 고려가 오래전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 두 개 역사 사실을 연계시키면 서기1388년 당시 ‘명나라와 고려간 국경은 요동땅 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고려말 ‘강원도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명나라가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 요동의 철령을 지나는 선이 명나라와 고려간의 국경이었다는 것이다.

철령위는 5년간만 존속하다가 요양 북쪽 현재의 철령시로 이동
현재 중국 심양시 북쪽에는 철령시가 있다. 이 지명은 과거의 철령위에서 유래 한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명나라 초기 처음 설치된 철령위는 1388년부터 1393년까지 단지 5년간만 존속했다.

그러다가 병참지원 어려움 등으로 그 지명마저도 지금의 철령시로 이동해 버렸다. 때문에 철령위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사정으로 이날 정 교수는 철령위의 위치에 대한 몇가지 견해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더 추가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강원도 북단이 고려말 철령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압록강 강건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는 정부로 부터 연구지원비를 받아 고려국경사를 연구, 발표해 오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고려국경사를 원점에서 다시 조사하는 작업이다. 이 연구사업에 따라 기존 국가교과서로 대표되는 고려국경사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서 나왔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박근혜 정권 국정국사교과서 사업과 연계시켜 파탄내려는 세력이 있다. 정요근 덕성여대 교수로 대표되는 한국중세사학회 등 식민사학계다. 감사원에 감사청구를 할 정도로 이들은 이 사업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조선총독부판 식민사학으로 호의호식해 온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서기2018.03.30.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학술발표 심층취재 2부끝,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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