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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2「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오종홍 | 승인 2016.03.25 10:10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최동환 / 역사연구가

 

둘째, 물증(고고자료)을 살펴보자. 『역사비평』의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에서는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썼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윗 글에서는 동경 공과대학(건축학과) 교수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이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하였다고 소개하면서 그가 1902년과 1909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조사했는데, 1909년 대동강 유역의 석암동 고분을 처음에는 고구려 고분으로 보았다가 훗날 낙랑군 유적으로 수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키노 타다시는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대동강 일대 토성리 지역의 유적들을 발굴 조사하고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유적 유물을 확인했는데, 이것이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임을 확인하는 핵심적 증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헌사료로는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고고학으로 낙랑이 평양이라는 물증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의 고고학 발굴이란 조선총독부의 의뢰에 따른 일방적 주장인데도 이를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임을 확인하는 증거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의 실체이다.

▲점제현 신사비,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가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는 발견 당시부터 조작설이 일었다.

여기에 덧붙여「특집」에 있는 세 번째 글「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보면,“낙랑군 대방군에 대한 고고자료의 발굴은 일제시기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지역의 고분의 수는 70여 기에 불과하지만,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 무려 2600여 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70기가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데 이어서 해방 후에 북한에서 발굴한 2600여기의 고분 역시 평양 낙랑군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랑목간은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증거인가?

계속해서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는, 1990년 7월에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부장품인 「초원 4년 호구부」목독, 즉 이른바 낙랑목간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당시에 평양지역의 낙랑군 내에서 군현지배를 위한 문서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그 목독이라는 것은 나무에 글을 쓴 목간(木簡)을 말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부장 이용구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樂浪木簡) -「낙랑군(樂浪郡) 초원 4년(初元四年) 현별호구(縣別戶口)」통계문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낙랑목간에 대해서 처음 논문을 쓴 사람은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손영종이다. 낙랑목간에 대한 남한의 여러 논문들은 모두 이 손영종의 논문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영종은 낙랑군 소속인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은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 고찰해 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초원 4년은 서기전 45년을 뜻하는데, 이해의 낙랑군의 현별 호구수를 기록한 낙랑목간에 대해서 손영종은 낙랑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낙랑목간은 평양에 낙랑군이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남한의 일부 인사들은『역사비평』에서 낙랑목간은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국민들을 완전히 속인 것이다.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는 계속해서“해방이후에도 중국군현의 지배와 관련한 문자들이 이 일대의 벽돌무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기타 낙랑군 시기의 고분 내에서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칠곽이나 양산 등의 물건들도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써가며, “이러한 근거들을 고려할 때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의 저서에서 현재 학계가 일제 시기의 총독부 주도로 발굴한 자료들만을 근거로 낙랑군의 위치를 확정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북한도 해방이후에 발견된 유물을 낙랑군의 유물임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읽힌다.

거기에 덧붙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천 기의 중국계통 고분들, 그리고 그 고분 내에서 발견된 중국계 인명과 군현 관리 명칭 등이 새겨진 벽돌과 칠기 유물들 그 외에도 점제현 신사비, 봉니 등을 언급하면서 평양일대에서 발견되는 2600여 기의 고분들을 아예“중국계통 고분”이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내장된 유물들 역시 평양 낙랑군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점제현 신사비와 봉니도 평양 낙랑군 설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목간, 북한에서는 이 목간은 낙랑군 일부군현이 요동반도 남단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일단 일제강점기 때 이미 정인보 선생이 조선총독부에서 발견했다는 유적, 유물에 대해서 전혀 한사군의 유적, 유물이 아니거나 조작의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겠다. 여기에서는 북한 지역에서 발굴한 낙랑고분 및 내장 유물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 발굴과 조사분석에 대해서 북한은 어떤 입장인지 정확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 2600여 기」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에 대한 발굴 및 조사 보고서는 북한에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책의 형태로 북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간하였는데 그 책을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규정에 따라 우리나라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재출판하여 2001년, 시중에 판매하였다.

이 책에는 낙랑고분 2600여 기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의 발굴과 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분석, 그리고 북한의 정확한 주장이 담겨있다.

그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낙랑고분은 모두 낙랑국의 고분이지 낙랑군의 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씨 낙랑국의 고분이지 한사군 낙랑군의 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점제현 신사비에 대해서도「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서기 85년 후한의 영역 안에 세웠던 비이며, 비석 자체도 그 근방의 돌이 아니라 다른데서 만든 것을 거기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점제현 신사비는 원래 다른데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므로 비가 현재 서 있는 곳은 점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봉니 역시 그 책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때문에 ‘한 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한 일제어용사가의 두목 이마니시까지도 락랑 토성에서 수집한 거의 모든 봉니가 가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현지에서 발간한「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에서는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무덤은 낙랑군의 무덤이 아니라 최씨 낙랑국의 무덤이며, 점제현 신사비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일제가 옮겨다 놓은 것이며, 봉니는 대부분 가짜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비평』에 실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라는 글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이며 국민을 완전히 속인 것이다.

북한의 조사 및 발표 결과는 낙랑국의 유물이라고 말했는데, 그 유물을 발굴하거나 조사하지도 못하였고 실물조차 본 일이 없는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쓴 자는 는 무슨 근거로 해방 후에 발견된 유물이 낙랑군의 것이며 따라서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가?

왜 북한에서 발표한 것과 완전히 반대로 주장하면서 국민들을 속이는가?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이며 따라서 누가 사이비인가?

*앞뒤 안 맞는 주장들

더구나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중국제 물건이 발견되는 것에 대해서「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라는 글에는 “그렇다면 토착민의 무덤에서 중국제 물건들이 함께 부장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중국과의 통교가 잦아지면서 이 지역에 들어온 제품, 그리고 이 지역에서 제작된 중국식 물건들이다.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토착민이 중국제 고급물건들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이를 무덤에 위신제로써 함께 부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부유층이 값비싼 미국제나 일본제 수입품들을 구입해 사용하고 이를 자기 지위를 내보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즉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중국제 물건은 중국과의 통교로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고 분석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해방이후에도 중국군현의 지배와 관련한 문자들이 이 일대의 벽돌무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기타 낙랑군 시기의 고분 내에서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칠곽이나 양산 등의 물건들도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다른 이야기를 서술했다. 앞에서는 중국과의 통교로 들어왔다고 주장해 놓고는 여기에서는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물건들을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똑같은 중국제 물건을 낙랑군의 증거가 아닌 중국과의 통교로 인해 들어온 물건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반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모순되게 서술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들이 했다는 분석은 제 입맛에 맞게, 작위적으로 행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분석한 것이지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첫째, 1920년대 중반에 대부분의 학자들, 즉 일본인 학자들 사이에 확고한 통설로 자리 잡았다는 평양 낙랑군 설의 양대 축의 하나인 문헌 연구는 추론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또 하나의 축인 물증 역시 북한이 발굴한 고분 2600여 기 등을 통하여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타다시) 등의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발굴한 유물은 낙랑국의 유물이지 낙랑군의 유물이 아님이 밝혀졌다. 즉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완전히 근거를 잃은 것이다.

이처럼 조금만 연구해 보면 평양 낙랑군 설은 사실이 아니고 허구이며 거짓임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완전히 속이고 아직도 거꾸로 평양 낙랑군 설이 사실이라고 국민을 속인다.

누가 사실을 속이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누가 사실이 아닌 사이비인가?

왜 대국민 사기극을 벌리는가?

 

오종홍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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