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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천안 안성 답사기
김명옥 | 승인 2015.09.18 23:16

P군! 잘 지냈어?

오늘 우리 일행은 뜻밖의 횡재를 했어. 천안·안산 유적지에서 말이야. 그 횡재를 P군과 함께 나누고 싶은데 어떤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그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우리가 천안을 찾은 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고 햇볕은 따가웠어. 가을볕이니 따가울 수밖에. 오죽하면 봄볕에는 딸을 가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낸다고 했을까. 며느리는 미우니까 따가운 볕에 타도 괜찮다는 말이겠지. 우리 일행이 이동녕 선생의 생가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11시 30분 경이였어. 매미가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지. 한여름 만큼 힘은 없었어. 어디서 왔는지 잠자리들도 날고 있었지.

이동녕 선생 생가 옆에는 선생의 기념관이 있는데, 우리 일행밖에 없더군.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을 찾는 사람은 없었어. 이동녕 선생은 P군도 알다시피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잖아.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 건원하고 임시헌장을 선포했지. 이동녕 선생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발길을 돌려 류관순 선생 생가와 매봉교회를 찾았어. 매봉교회 지하1층은 류관순 선생 기념관이야. 그런데 여름에 빗물이 샜었나봐.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더군. 곰팡이 냄새는 코를 찔렀어. 3·1만세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의 기념관 치고는 너무 초라하더군. 매봉교회 옆에는 류관순 선생의 생가가 있어. 커다란 삼나무 두 그루만이 선생의 생가를 지키고 있더군. 류관순 선생의 생가를 둘러본 후, 우리는 곧 아우내 장터로 갔어.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 말이야. 지금은 병천시장이라고 불리지. 우리가 찾은 날은 마침 장날이었어. 장터에는 온갖 물건들이 선을 보였지. 우리는 만세 기념비를 찾아 골목을 누비고 다녔어. 그런데 기념비가 없어진 거야. 누가 치웠을까? 왜 치웠을까?

그런데 말이지. 쨍하던 하늘이 갑자기기 어둑어둑해지면서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장사꾼들은 물건을 덮느라고 야단이고 우리는 차 있는 곳으로 뛰었지. 상상이 되지?

이쯤 되면 P군은 ‘이게 무슨 횡재’냐고 묻고 싶겠군. 잘 들어보게. 이제부터니까. 우리는 한명회 묘에 들려 안성 청룡사로 향했어. P군은 청룡사는 몰라도 남사당패 바우덕이는 잘 알거야. 바우덕이 일행이 도움을 받았던 청룡사로 향했지. 청룡사에 도착할 때쯤 빗줄기는 가늘어지더군. 한두 방울쯤이야 하는 생각에 우산을 차에 두고 청룡사로 향했어. 청룡사 대웅전 대들보들은 깎거나 다듬지 않고 나무 생김 그대로였어. 운치 있고 멋지더군.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절 입구 왼편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가 있었어. 몸통은 텅 비었어. 썩어서 없어진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 나무는 살아있어. 잎을 매달은 나뭇가지는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어. 마치 ‘나는 아직 건재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지.

청룡사를 나와 좀 걸었어. 막걸리 집이 나오더군. 막걸리를 부르는 날씨잖아? 막걸리 집은 허름했어. 물론 손님은 없었지. 그런데 그 집이 맛집이라고 방송에도 소개되었다고 하더군. 주인 할머니는 정말 할머니였어. 꽃무늬 몸빼(?) 바지에 잔 체크무늬 남방을 걸친 그러니까 패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할머니 말이야.

부침개에다 막걸리 한 사발씩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우리 쪽으로 오셨어. 누군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지.

“할머니 맛걸리 맛이 예전 그대로네요. 5~6년 전에도 왔었는데 여전히 정정하세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래 맞아. 할머니가 직접 빚은 막걸리 맛을 기억한 분이 있었어. 일부러 우리 일행을 이끌고 할머니 가게에 들른 거지. 할머니는 의자에 앉으면서 말씀하셨지.

“내 나이 팔십육이오. 그래서 정신 안 잃어버리려고 요즘도 글을 읽어요. 우리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었어요.”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스승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어. 할머니의 스승님은 어떤 분일까? 그런데 할머니에게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어.

“우리 선생님은 누구나 다 아는 이광수 선생이오.”

일순간 우리 일행은 고요해졌어. 친일파 이광수를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쳐야 하나,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모두들 난감했던 거지.

“이광수한테서 배웠다구요?”

우리는 다시 물었지.

“이광수 집안사람. 이학수 선생이라고. 청룡사에 계실 때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나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우리 선생님이 당신 돈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내줬어요. 우리 선생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세요.”

이학수 선생에 대한 할머니의 존경심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

“하루는 내가 우리 선생님 저고리를 지어드렸어요. 선생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제자가 지어준 옷이라고 아깝다며 안 입고 걸어만 두셨어요. 그깟 저고리는 몇 벌이라도 지어드릴 수 있었는데 말이죠. 선생님은 2년 있다가 부산으로 가셨어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부산까지 갔지만 결국 못 만났어요.”

“할머니 언제 부산에 가셨어요?”

“선생님이 떠나신 지 한 20년 지나서요. 살아서 꼭 한 번은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할머니 몇 살 때 이학수 선생님을 처음 만나셨어요?”

“스무 한살 때요. 전쟁 났을 때니까.”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송효순이요.”

그러니까 스님이었던 이학수 선생이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서 1952년까지 청룡사에 계셨고, 바고 그때 할머니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거지. 이학수 선생은 스님이었지만 본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했었어.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 선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니까 대종교는 종교보다 독립운동가들을 키우고, 독립운동가들이 하나로 뭉치는 구심점이 되는 곳이라고 해야 할 거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채호·박은식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 역시 모두 대종교인들이었어.

이학수 선생의 이력을 보면 독특해.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는 측량기술을 배워 측량기수가 되지. 나라를 빼앗기자 친구인 계찬겸한테 만주로 가서 동지들을 모와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을 해. 그런데 계찬겸은 이학수 선생을 배신하고 나중에 친일관료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고. 참 씁쓸한 일이지. 이학수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해. 이학수 선생은 1913년에 대동청년단에 들어갔지. 대동청년단은 안희재 선생이 남형우· 이원식·서상일 선생들과 같이 조직한 비밀결사였어. 선생은 무장투쟁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여겼어. 그래서 1920년에 광한단을 조직하지. 광한단은 일본 행정·경찰관청과 같은 기관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무장단체야. 1921년에는 만주 독립단체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려고 국내로 들어왔다가 왜놈들한테 쫓기게 되지. 그래서 피신한 곳이 강원도에 있는 봉선사야.

인생은 참 묘해. 어떤 우연한 계기가 운명을 바꾸기도 하지. 이학수 선생은 봉선사에 세 달 정도 숨어 있었는데 이때 사미계를 받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거야. 이후 만주로 돌아와서 독립운동을 하지. 1929년 재만한인 자치구인 국민부가 결성되고 국민부 소속 민족진영에서 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당에 가입해. 1932년 1월 5일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그리고 조선혁명군은 비상회의를 열었어. P군도 잘 알겠지만 이때는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시기잖아. 일본이 만주까지 침략했으니 우리는 독립 근거지를 잃어버린 셈이고. 그래서 대책회의를 하려고 모였던 거야. 그런데 친일단체인 보민회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는지 신빈현 공서에 밀고를 한 거야. 공서는 통화현에 있는 일본 영사분관에 통보하고. 이렇게 해서 지도자급 6명이 체포되었어. 이학수 선생은 누이동생 집에 은신했다가 음력 2월쯤 봉선사로 되돌아 왔지.

그런데 P군이라면 “무장투쟁을 안 할 때 뭐 했는데요?”라고 물어보겠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학수 선생은 교육사업에 매우 적극적이었어. 1911년에는 대성학교에 들어갔고, 1913년에는 동창학교에 들어가. 둘 다 민족학교지. 대성학교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만들었어. ‘105인 사건’으로 폐교되었지만 말이야. 동창학교는 대종교가 만든 학교이지. 1915년에는 1916년에 흥동학교로 개칭될 일신학교를, 1918년에는 통화현에 배달학교를 설립하지. 배달학교는 “배달민족(올바른 한국인)을 만드는 곳”이야. 배달학교에서는 우리말과 우리 지리, 그러니까 우리의 것을 가르쳤어. 역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교육사업에 온 힘을 쏟은 거지. 이학수 선생이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까 송효순 할머니한테도 공부할 기회를 준 거고, 또 가르쳤던 거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학수 선생이 이광수의 팔촌형이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이학수 선생이 3개월 빨라. 선생 집안은 문재가 뛰어났나봐. 이학수 선생은 한족회 기관지 『한족신보』 사장과 주필로 활동했지. 이광수도 변절하기 전에는 『독립신문』 사장과 주필이었잖아.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 같은 집안에서 한 사람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한 사람은 일제에 투항해 그들의 앞잡이가 되니 말이야.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아. 독립운동가들은 신분을 감추려고 이름을 자주 바꿨어.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일을 진행해야 했으니까.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도 클 거야. 이학수 선생도 이름이 세 개야. 이시열·박용주는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이지. 이름이 서너 개쯤 되니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찾고, 기리는 일은 싶지가 않아.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

이학수 선생은 1953년에 부산에서 『한국독립운동사』편찬에 관여했어. 1950년에서 1952년까지는 청년사에서 야학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고. 막걸리 집 할머니는 그때 선생한테 배운 거지. 그런데 청년사 안내판에는 이학수 선생에 대해서 한 줄도 없었어. 남사당패 바우덕이와의 인연만 자랑스러운 듯 소개해 놨더군. 조국의 독립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독립운동가가 유명한 재인 남사당패에 밀린 거지.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런데 말이지. 인연이란 참 묘해.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그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어.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이 마치 우리를 그곳으로 보낸 것 같은 착각 말이야. 이번 답사에서 느낀 점이야. 생각해봐. 우리 일행 중 누군들 막걸리 집에서 이학수 선생의 제자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그것도 이렇게 우연히 말이야. P군! 이것이야말로 답사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횡재가 아닐까?

 

김명옥(건국대학교 겸임교수)

김명옥  koreahit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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