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주류사학, 중국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재평양설' 견지

 

토론 사회자로 나선 '서영수' 전교수, 강단주류사학에 유리하게 진행, 편파성 논란...

 

요즘 한국 고대사에 대해서 역사학계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해서 설치했다는 ‘한사군’존재 여부와 위치에 관하여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22일 동북아 역사재단의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대사 주제발표 및 토론에서도 확인되었다. 비주류사학에서는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교수,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박성용박사가 나왔고 강단주류사학에서는 우석대 역사교육과 조법종 교수,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정인성교수가 나섰다.

▲서영수 전교수가 사회를 보고 있다. 가운데 인물이 서영수 전 단국대 교수, 서영수 전 교수는 '한사군'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한군현'이라는 말을 쓰자고 했다. 그래서 인지 동북아역사재단은 미리 서영수 전 교수의 이러한 의견을 받아 들여서 학술토론회 제목에 '한군현'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이는 강단주류사학이 한사군재평양설을 견지하고 있어 일제식민사학과 같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한 꼼수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다. 왼쪽 부터 박성용, 조법종, 서영수,정인성, 복기대.

첫발제자로 나선 조법종 교수는 ‘고조선 왕검성 위치 논의와 쟁점’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조교수는 현재 강단주류사학의 견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만 왕검성과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가 다르다는 견해를 보였다. 조교수는 왕검성의 위치를 현토군 지역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일제식민사관이 말하는 낙랑군 재 평양설과 결론에 있어 같다는 점에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영남대 정인성교수는 낙랑군 재평양설을 고고학적 입장으로 접근하여 증명하려고 하였다.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사관에 입각하여 왜구격퇴기에 다량으로 위조, 날조한 이른바 ‘낙랑유물’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뢰할 만한 것이 있고 정교수 자신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낙랑유물을 치밀하게 연구했고, 일본 구주에서 발굴된 평양산 낙랑유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렇다고 하여 낙랑군재평양설이 흔들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하여 결과에 있어 일제식민사학과 같은 견해를 유지하였다.

▲ 발표전 발표자석에 대기하고 있는 발표자들, 왼쪽 부터 정인성 영남대 교수, 박성용 인하대 박사, 조법종 우석대 교수이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박성용 박사는 ‘한나라 군사작전으로 보는 위만조선 왕검성 위치 고찰’이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다. 박성용 박사는 결국 당시 한나라 군사규모와 북경에서부터 현재 평양까지의 지형지물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나라가 평양에 있었다는 왕검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나라 공격으로 탄생한 낙랑군도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복기대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 복 교수는 역사학의 기본인 문헌을 중심으로 해서 '낙랑군' 위치비정을 논하자고 제안했다. 고고학적 유물로는 '한사군, 낙랑'의 위치비정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복기대 교수는 유물을 기준으로 해서 낙랑군 위치를 비정한다는 것은 끝없는 논쟁만 양산할 뿐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역사학은 문헌이 기본이고 당시 한사군과 관련한 기록은 풍부하기 때문에 우선 문헌을 철저하게 고증을 한 후에 이를 기초로 낙랑군위치논쟁을 하자고 하였다. 복교수 자신이 현재도 중국에 가서 고고학 유물을 수없이 접해 본 결과 ‘임둔태수장’의 유물을 발견하는 등 대륙 쪽에 한사군 낙랑군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구나 낙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주장되는 유물들이 몽골지역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문헌적으로 고증해 본 결과 왕검성과 한사군은 현재 하북성 동북부와 요녕성 서남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복 교수는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한나라가 식민기관으로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현재의 평양으로 이식되고, 고구려의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재의 평양으로 이식된 것은 이성계조선의 세종때라고 하였다. 요사, 원사 등 그 이전의 중국 측 사료에서는 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은 요녕성 지역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복교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에서는 서영수 전 단국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서 전교수는 발표자들의 발표내용을 요약하고 평가하였다. 강단주류사학을 대표해서 나온 조법종교수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발표’했다고 했고, 정인성교수에게는 ‘박수치고 싶을 정도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반면에 박성용 박사의 발표에 대해서는 ‘잘 맞지 않는다, 대동강 형세와 비교해 볼 때 박성용박사의 주장이 당연하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복기대 교수에게는 제자에게나 부르는 호칭인 ‘군’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서 전교수는 ‘낙랑군 재평양설’에 입각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함으로써 방청객들에게 지적을 받았다. 한 방청객은 ‘사회를 보아야지 강의를 하면 되겠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 이번 학술 주제발표 및 토론회를 위해서 축사와 인사말을 하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왼쪽이 이종찬, 오른쪽이 김호섭.

발제자 상호토론과 방청객과의 토론에서는 치열한 견해 공방이 오갔다. 상호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언성이 높아질 정도로 토론이 이어졌다. 한 방청객은 미리 제출한 질문지 내용과 다르게 말하면서 답변하는 조법종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직접 질문을 했다. ‘평양에서 출토 되었다는 봉니, 와당, 목간 등을 연대 측정했는가, 그리고 이 유물들의 글씨체가 한나라당시의 글씨와 같은 것이냐, ‘낙랑토성’이라고 쓰여 진 유물이 나왔는가, 평양에서 한사군 낙랑관련 유물이 나왔으니 현재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국강상 호태왕 호우 솥이 경주에서 나왔는데 그럼 경주가 고구려 식민지였다는 것인가, 경남 창녕에서 연가라는 고구려연호가 새겨진 불상이 나왔는데 그럼 거기도 고구려 땅이었다는 얘기인가’라고 하면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또한 ‘현재 평양지역의 한 토성위에는 수천 년 된 고인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토성은 고인돌 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도 낙랑토성이냐’고 따졌다.

이에 대하여 조법종 교수는 그렇게 단순하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중국의 역사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여 동문서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인성 교수는 ‘그렇다면 좋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도해서 일본에 있는 낙랑관련 유물을 다 국내로 가져와서 연대측정 다시하고 글씨체도 한나라 것과 같은지 검증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이번 주제발표와 토론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주최 측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주제발표 책자를 2백여 부를 준비하였는데 모두 나갔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받지를 못했다고 했다. 사설 경호업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인원이 입구 좌우에 서있었고 장내에도 사설 경호원으로 보이는 인원을 좌우에 배치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이런 장면은 그다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번 학술발표 전에 미리 동북아역사재단 누리 집을 통해서 발표 내 용문을 게시하여 누구나 미리 숙지하고 질문 등을 준비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약정한 날짜인 21일을 지나 22일 당일 아침에서야 게시하여 이용하는 데 불편을 주었다. 한편 재단 측은 1년에 4번 고대사 쟁점과 관련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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