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허구다...

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

광복 71주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이 땅의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사를 왜곡해서 한국인의 의식을 사대주의, 노예사관으로 바꾸어 놓아야 영구히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든 것이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이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한사군 한반도설과 임나일본부설이다. 광복 후 우리 사회는 친일청산에 실패했고,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학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일제 식민사관은 지금까지 한국사의 정설이 되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까지 고개를 들고 있는 개탄스런 상황이다. 그래서 본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과연 한사군 한반도설은 사료적 근거가 있는지, 임나일본부는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 있었는지를 실증적, 역사학적 방법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강호 제현의 관심 및 투고를 바란다.

시리즈 1.「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최동환 / 역사연구가

 

『역사비평』 특집

『역사비평』 2016년 봄 호에는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기획 아래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기경량이 쓴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위가야가 쓴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안정준이 쓴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가 그것이다. 몇 몇 신문에서 이들의 주장을 편향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마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했다. 일부 언론들은 누구의 주장이 사실인가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은 일체 생략한 채 이들의 편향된 주장만을 그대로 실어서 이 문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문제점까지 드러내 주었다.

중요한 것은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에 실린 글이 사실인가? 다시 말해서 이들의 주장이 학문적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가? 즉, 결론뿐만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역사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있는가? 학문의 엄밀성과 정치성(精緻性)을 갖춘 글인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글의 핵심적인 부분이 사실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평양이 낙랑군인가?

『역사비평』에 실린「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을 보면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핵심이다. 이를 두고 한 언론은 “사료 가지고 따져보자”는 식의 제목을 뽑았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사료 가지고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들의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다.

이들은 먼저 일본인들의 연구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 즉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연구의 결론은 「문헌 비판을 통하여 실증하고,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문헌과 고고학을 통해 내린 ‘평양 낙랑군설’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연구의 결론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제부터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문헌 연구(사료 연구)를 살펴보자.

먼저,「문헌 비판을 통하여 실증」했다는 이야기를「특집」에 실린 글에서 보면, 1892년 임태보(林泰輔: 하야시 다이스케)가 지은 『조선사』의 단계에서는 한사군을 기미제도를 이용해 다스린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런 한사군의 성격이 식민지배가 가시권에 들어온 1900년대 후반부터는‘식민지’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인들은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을 바탕으로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역사상(역사의 모습)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들은 늘 총론이나 서론에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척하는 관례처럼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항상 그 다음 각론과 결론이 문제다.

이들은 이렇게 일본인들의 연구결과에 한 마디 비판을 가한 다음에, 「한사군의 공간적 범위를 확인하기 위한 역사지리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서술했다. 물론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행된 연구를 말한다.

▲ 사마천 초상,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누가 승자인지 모호하게 서술했다.

이런 연구결과란 무엇일까? 1894년에 나가통세(那珂通世: 나카 미치요)가 『조선, 낙랑, 현도, 대방고』를 지어 한사군의 역사지리 연구를 시작했지만 그뿐이었다가 한반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자 백조고길(白鳥庫吉: 시라토리 쿠라키치)이 1912년에 「한의 조선사군 강역고」를 발표하고, 도엽암길(稻葉岩吉: 이바나 이와키치)이 1914년에 「진번군의 위치」를 발표하고,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이 1916년에「진번군고」를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사를 한국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일인들이 한반도 역사가 식민지로부터 출발했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헌 연구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문구찾기가 바로 문헌 연구였다는 것이다. 물론 일제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그랬다는 말이다.

*서로 엇갈리는 주장

이들의 연구방법은 20세기 초나 지금이나 놀라울 정도로 같다. 즉 사료에 낙랑이 평양에 있다는 어떠어떠한 문구가 있는 것을 근거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고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전제를 만들어 놓고, 문헌에서 그에 맞는 문구를 찾고 문구가 없으면 문구 해석을 어거지로 해서라도 평양을 낙랑군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일제의 문헌 연구였다. 그리고 그런 행태를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양 낙랑군 설이 사실을 기초로 내려진 결론이 아니고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에 따라 꾸며진 사기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의 정치적 목적이란 물론 한국을 식민통치하는 근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학문의 탈을 쓰고 지금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즉, 평양 낙랑군 설은 처음부터 학문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사기였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실은 「특집」에 있는「‘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라는 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글을 보면, “그들이(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한국이 일찍부터 외국의 식민지였다는 이해를 확산시켜 결과적으로 제국일본의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고 말하여 평양 낙랑군 설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쓰였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맞다. 또한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가 식민사학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솔직하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까지도 맞다.

그러면 결론도 일본인들이 식민사학 차원에서 전개한 한사군 연구는 일제의 정치선전이므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고 내려야 했다. 즉,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을 때 식민지배의 정당성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꾸며진 사기인 평양 낙랑군 설은 당연히 없어졌어야 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서론에서는 늘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결론은 늘 식민사학 옹호로 이어지는 것이 관례인 판국에 그렇게 할 리가 없다.

▲ 송 배인의 사기 주석서인 사기집해, 사기 주석에는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해방후 친일청산을 못하게 되어 일인들에게 지도받고 일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한 사람이 서울대학교수가 되고 문교부장관이 되어 일인들에게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일인들 밑에서 주장하던 대로 평양 낙랑군 설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평양 낙랑군 설이 죽지 않아 학문의 탈을 쓰고 대학 강의와 논문으로 이어지며 대중강연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오히려 평양 낙랑군 설이 사실이라고 큰소리치기에 이른 것이다.

계속해서, 문헌 연구에 대한 글을 보면, “이들(일본인)의 연구는 한정된 문헌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추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썼다. 즉, 일본인들의 문헌 연구는 추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이 왜 이런 자백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결론은, 사료를 가지고는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기 곤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이 함락당할 당시의 사료인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본문에는 왕험성이 오늘날 평양이라는 일체의 내용이 없다. 따라서 패수 등을 가지고 왕험성의 위치를 자의적으로 추측하고 그것을 가지고 오늘날 평양이 낙랑군의 군치(郡治)라고 추론하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추론으로 시작해서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대지 못하고 추론으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평양 낙랑군 설을 주장하는 자들끼리도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자는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추측하고 대동강 남쪽의 낙랑토성을 낙랑군의 군치라고 추론하며, 다른 자는 압록강을 패수라고 추측하고, 또 다른 자는 청천강을 패수로 추측하면서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을 낙랑군의 군치라고 추론하는 등 각자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왜인들과 이병도가 패수 등을 가지고 저마다 추측과 추정을 한 결과를 저마다 제각각 따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문헌 연구를 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말하는 문헌 자료는 없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니 왜인들은 물증, 즉 고고학에 매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료를 가지고는 거짓말을 하는데 부족하니 물적 증거를 조작하거나 물적 증거에 대한 허위 선전과 엉터리 해석을 해서라도 거짓말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평양 낙랑군 설을 주장하는 자들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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