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단군)의 하늘굿 올 곧게 계승하다

황궁씨가 전하는 천부삼인이 동맹제의 중요 신물

세르게이 정 / 북방고고인류학연구소 교수

 

高句麗의 東盟祭와 民主的 會議制度

고구려의 동맹제는 10월 상달에 치러지는 국가적이 아닌 국제적인 제천행사이다. 동맹제는 남녀노소 외국인 할 것없이 모두 즐겼으며 하늘에 감사하고 한 해를 무사히 잘 보낸것에 대한 감사함도 함께 곁들여 있다. 그러나 동맹제를 하기에 앞서 국가의 중대사 문제를 각 72부족 및 지배계층은 5부가와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 회의는 다음과 같다.

가. 5부가 회의

이 회의는 고구려의 구성세력인 5부(계루,연노,소노,순노,절노)의 수장들이 국가 중대사에 대한 안건을 가지고 회의를 한다. 이 회의는 꼭 동맹제 때만이 아닌 매달 하는 회의로써 10월에는 5부가회의가 제가회의로 바뀌기도 한다. 5부가 회의는 대략 이렇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당시 기존의 졸본부여에 있던 5개의 정치세력이 연합하여 세운 것이 고구려인데 고구려의 정치는 철저한 왕권중심이 아닌 5부가의 회의에 의해 결정되는 체제로 서양의 의회와 같은 역할을 한다.

5개의 정치세력이 제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때가 제6대 태조대왕 때 이고 이 때부터 5부가 회의가 정착이 되었다. 이 5부가 중 왕권이 강한 계루부가 중심이 되었고 그러한 계루부를 견제하기 위해 나머지 4부족이 연합하여 회의를 결성한 것이 5부가 회의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전시 상황에도 5부가회의에서 결정된 안건만이 적용되었으며 왕족과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에 많이 활용이 됨에 따라 큰 민주적인 회의라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나. 제가회의

제가회의는 대략 왕위계승·대외전쟁·외교문제, 그밖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결정했다. 초기에는 국왕이 제가회의의 의장 역할을 했으나, 점차 국상(國相)이 이를 대신했다. 이것은 동맹제 이전으로만 제한되어 있었으며 동맹제를 앞두고 중대사가 벌어졌을 때 (예를 전시체제의 경우)이를 개최하여 급하게 안건을 해결한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에만 생기는 회의로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다. 공회

공회는 동맹제를 3일 남겨놓고 열리는 민주적 회의제도다. 여기에는 5부가 뿐만아니라 72개부족 수장 모두가 참여하며 여기 회의에서는 고구려 1년 예산 책정 문제. 태자책봉문제, 전쟁문제, 세금문제 등이 거론되며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민주적인 회의다. 이 회의 주관자는 태왕이며 태왕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만장일치제로 투표할 수 있게 한다. 여기 확정되는 회의안건은 1년동안 절대 수정할 수 없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5부가 중 4부가에 대한 막대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정치적인 효과도 작용한다.

이 공회제도는 후일 서양 민주주의 회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영국의 민주화혁명들도 이것에 기인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동맹제 이전에 회의로 모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고 모든 고구려인의 화평을 빌었다. 회의가 끝나면 동맹제를 준비하게 되고 이들은 7일간 동맹제의 연휴를 즐기고 7일후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 고구려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高句麗의 東盟祭 本文과 進行 

동맹제는 잘 알려진 고구려의 제천행사이다. 그리고 10월 상달에 이것을 열었는데 오늘날의 개천절도 이에 기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필자의 추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임을 밝히는 바이다. 10월 상달의「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로 비롯되었다. 그 중에 동맹제는 단군조선의 천제를 이어받은 가장 국제적이고 큰 제천행사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동맹제에 관한 부분을 먼저 중국인들이 동맹을 보고 들어서 기록한 [삼국지] 〈고구려〉조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가-1 사료>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행사로 치러진다. 이를 동맹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식모임에는 모두들 비단에 수놓은 의복과 금과 은으로 치장을 하고 나온다. (중략) 그 나라의 동쪽에 수혈(隧穴)이란 큰 굴이 있다. 10월 국중대회(國中大會) 때 이곳에서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상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고구려의 도성에 못 오는 경우라면 가까운 소도에서 동맹제를 치러 하늘의 은혜에 감축했다고 했다니 지방 동맹제도 분명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서술하고자 하는 부분은 도성동맹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추가로 지방 동맹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인용하도록 한다.

동맹제의 의식은 이규보의『동명왕편』에 추모왕이 큰 나무 아래에서 유화부인이 보낸 새(鳥)로부터 씨앗을 받았다는데 이것이 신목(神木)신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만주에서는 신목을 세워놓고 이를 소모(索莫)라 부른다고 한다. 이것은 추모(鄒牟)왕에서 연유된 명칭인 듯하다. 그렇다면 추모왕은 주몽이라는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명칭 외에도 새 모양의 신이 내려앉은 신목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추모왕 즉 신목을 통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지만, 반대로 천신과 지신이 만나 신목의 생명을 낳은 것이기도 하다. 즉, 동맹행사는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고 추모왕이 탄생하는 고구려 건국이야기의 재현인 셈이다.

혹자는 이 의식을 하늘의 해신(日神)과 물의 신(水神)이 만나 혼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때에 동맹제가 극점에 달한다고 본다. 또한 동맹제를 수확제로 보고 한해의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을 상징하는 일신과 수신의 결합 의식을 통해 내년의 풍요를 빌었던 축제로 보기도 한다.

의식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추모왕을 추모하는 의식부터 먼저 시작된다. 추모왕은 고구려의 시조로써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고구려의 무탈함을 알리는 축문을 읽는것이 먼저 시작이다. 축문을 마치면 천부왕인을 들어 당시 해의 농사가 잘되었고 이에 감사함을 알리는 기도가 시작이 되는데 이를 여신관이 맡아서 기도를 올리고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인장을 찍어 태우게 되는데 이것은 태우는 자가 바로 태왕이다.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한거번에 출토된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조선(단군)시대를 대표하는 표지유물이다(출처:국립광주박물관). 부도지, 일연의 '삼성기'의 문헌에서도 '천부인3개'가 확인된다. 전남지역은 최근까지도 단골판이라하여 무당들이 굿을 하는 영역이 남아있었다. 이를 통해서 조선(단군)시대의 지방분권의 제정일치사회를 엿볼 수 있다. 위 청동유물들은 무당들이 하늘굿, 마을굿을 할 때 사용하던 무구이다. 지금도 큰무당이 죽으면 신자녀에게 무구들을 전수하거나, 한거번에 땅에 묻어 인연이 닿은 후대 무당이 이 무구를 캐서 사용케 한다.

여기에 여신관이 3배를 올리게 되고 여신관을 따라 모든 문무백관이 3배를 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천. 지, 인의 의식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섬기며 모든 인간을 평화롭게 한다는 삼신사상이 깃들여 있다.

그 다음엔 여신관이 천부삼인을 들어 참석한 모든 이에게 축복을 해주는 의식인데 천부삼인은 서기전6100년경 유인씨(有因氏)가 황궁씨(黃穹氏)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즉 이때 천부삼인은 하늘을 상징하는 무극(無極),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 모습을 본 딴 태극(太極), 하늘과 땅과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을 본 딴 삼태극(三太極)의 문양이 되는 것이며, 그 문양이 새겨진 증거물은 거울, 방울, 칼이다.

천부삼인은 여신관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의 천복을 참석한 모든이에게 빌어주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구로 동맹제 때는 등장하고 있음을 알린다. 천부삼인을 들고 축복할 때 마다 여신관이 지나갈 때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바로 뒷 줄의 사람은 1배를 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복을 내림에 대한 감사함의 1배로 보인다.

그 다음에는 그 해 땅에서 소출해낸 첫 곡식을 태우는데 이것은 중동의 번제문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번제는 갓 낳은 가축의 첫째, 처음 소출한 첫 곡식을 하늘에 바치는 제사로써 이 제사가 고구려에도 유효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단군조선 제천 때에도 이러한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번제를 올리며 태왕이 먼저 3배를 올리며 천부의 도를 봉송한다. 천부의 도가 끝나면 모든 문무백관이 다시 3배를 드린다. 번제를 올린 다음 태왕이 제단 아래 무부리에 올라 공회에서 결정된 국가 중대사를 하늘에 알리고 만백성에게 반포하고 내년에도 좋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3배를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양 숭배에 대한 접사를 하게 되는데 태양숭배 사상은 즉 이렇다. 태양은 밝음으로서 하늘의 대표이자 상징이기도 하다. 또 태양은 하늘님의 화신(化身)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양을 신(神)으로 받들고 하늘을 조상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光明)으로서 삼신(三神)이 계시는 곳이 된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의 하나인 거울은 하늘이자 태양을 상징한다. 특히 다뉴세선문경(多紐細線文鏡)에 새겨진 가는 선은 태양의 살, 즉 햇살을 의미한다. 첨부삼인의 하나인 거울은 천성(天性)을 의미하며, 천성은 곧 인간본성(人間本性)이고, 거울의 역할을 유추하여 항상 천성(天性)을 되돌아 보라는 의미를 가진다.

태양과 같은 밝음이 인간의 본성임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가르침이 천부경(天符經)의 말씀이다.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이라 하여 본래 인간의 마음이 본래의 태양이며, 밝음을 우러러 받들면 사람 안에 천지가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해, 태양은 누구에게나 비추어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만물을 소생(蘇生)하게 하는 신(神)의 작용인 기(氣)의 원천(源泉)이다. 태양은 밝음(明)으로서 어두움(暗)으로 인한 질병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선(善)을 상징한다. 하루의 단위를 해를 나타내는 일(日)을 사용하고, 한해의 단위를 해, 태양을 기준으로 하여 세(歲, 살), 년(年)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생장을 주관하는 에너지(氣)의 원천인 것이다. 태양 숭배에 접사는 청동 거울을 들어 하늘의 태양과 비를 내려줌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이럴때 태양을 향해 8배를 하게 되는데 여신관을 비롯한 모든 신관들이 8배의 예를 올린다.

그 외의 태왕과 나머지 백관들은 4배만 올린다. 태양 숭배에 대한 접사가 끝나면 행사가 끝이나게 된다. 여기까지 제례 행사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 제사 음식에 대한 설명이다. 제례에 올리는 음식물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두 가지 관념이 있었다.

그 하나는 이것이 천신들에게만 올리는 특별한 식품으로서 산 사람들의 음식과는 달라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제수의 제의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따라 고대에는 육류이든 곡물이든 조리하지 않은 채 날 것으로 올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것은 제수라기보다 제물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천신에게 올리는 식품도 보편적인 음식물로서 천손들이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다. 이는 제수의 식이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에서 보면 모든 제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익히고 조리하여야 된다. 그러한 부분에서 고구려는 음복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동맹제가 끝나면 동맹제 제사음식을 도성 내에 모든 백성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구려 백성들은 7일 동안 휴일을 보냈으며 이때 정부에서 곳간을 풀어 모든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국가 차원에서 술과 고기를 대접하여 7일동안 내내 가무를 즐기게 했다. 죄지은 자가 있으면 사형수들을 제외한 모든 죄인이 사면을 받았으며 고구려의 남녀들이 밤늦도록 노래하고 놀다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한다고 했다.

그리고 7일 째 되는 날에는 무술대회 및 사냥대회가 열리는데 이것은 3월 3일에 열리는 춘절과 동맹제 사냥 대회는 같으면서 다른 조건이 있다. 3월 3일에 하는 사냥대회는 태왕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무나 10월 상달의 동맹제 사냥대회는 무조건 왕실 모두가 참여하게 되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이 하는 사냥대회가 있는데 여기서 우승하는 자는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자와 동급으로 대우하며 관직을 수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동맹제의 사냥대회와 무술대회는 인재 발굴의 장이기도 하였으며 우승자에게는 장수가 될 수 있는 영광을 받게 되니 이것은 출세의 길이 열리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동맹제는 그리스의 올림푸스 제전보다는 훨씬 더 성대했으며 아시아 최강국 고구려의 힘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아시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제천행사였다. 그리고 다른 제천행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가 함께 잘 살고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민족대통합의 상징이기도 했다.

高句麗 東盟祭의 影響

고구려 동맹제는 전,후관계와 상관 없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북방민족의 제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투르크의 제천의식은 고구려의 동맹을 옮겨다 심었을 정도의 유사성을 보였다. 그리고 후일 이것은 발해와 고려로 이어 내려왔으며 고려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불교행사가 아닌 전형적인 고구려의 동맹과 비슷한 행보를 걸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 뿐이 아니라 거란의 제천행사인 요천도 그 영향을 받았다. 요천은 6일 동안의 제천을 지내고 하루를 사냥대회로 마무리 한다. 몽골도 쿠릴타이 대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6일 동안 제천행사를 가진다.쿠릴타이 대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모든 몽골의 부족들이 탱그리에게 재를 올리고 먹고 마시며 가무를 즐기기도 했다. 이로써 몽골은 그 동안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에 반해 이 날만큼은 모든 부족이 통합과 단합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만주족이 일어나 청나라를 세웠을 때 이 같은 제천행사를 국가의 제례로 정하고 매년 영고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황제가 영고탑으로 갈 때마다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은 수도인 북경에서 천단을 세우고 그 곳에서 지냈다 한다.

<청사고>를 보면 제천행사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강희제가 기존의 6~7일에서 3일로 줄였고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세력들의 규합을 원했으나 단기일 안에 규합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한족들과 융합을 하려 했으나 260년 동안의 노력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신해혁명으로 무너져 버렸고 만주족은 다시 고향인 만주로 돌아와야 했다.

후일 만주국 황제 푸이는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만주족 고유의 제례를 다시 살렸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결국 고구려의 제례인 동맹은 많은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외래종교와 더불어 외래사상이 같이 들어와 같은 제천행사라도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현재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맹제 형식의 제천행사는 아직 자기 문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만주족이 가지고 있다. 이전 같이 7일동안 제를 지내지 못하지만 10월 상달 초하루에는 항상 단군께 감사하는 천제를 올린다. 그 하루동안은 만주족의 언어인 만주어를 가르치는 모든 학교가 휴교이며 제가 치러지는 그 하룻동안 먹고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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