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식민지 낙랑군, 대방군이 우리나라 전역을 영향권하에 두었다.

 

인천도시공사 윤용구씨,

'중국 <삼국지> 조조 위나라 대방군,

 황해도,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남한 담당했다'

우리 역사 마한은 작게, 왜는 크게 그리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논리 그대로 강연하다.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직원이 서기2018.03.09.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 박물관 후원 받아 개최된 '제31회 백제사 연구의 제문제'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올해 들어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사학계가 결탁해서 매국지도로 판명돼 폐기 처분된 동북아역사지도집 부활을 획책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연세대 사학과 출신 김도형(65)씨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면서 불거졌다. 그는 서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에서 한국 근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하일식 연세대학 사학과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도 이 지도집 제작에 참여했다. 

이 지도집은 이미 수없이 지적되고 있듯이 서기4세기 까지도 백제와 신라, 가야가 없었다고 그렸다. 또 한강 이북에는 중국 식민지 낙랑군,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다고 그렸다. 대방군은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위나라가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인천도시공사에 근무하는 윤용구씨가 이것이 맞는 다는 주장을 해 충격을 주고 있다. 서기2018.03.09.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이 후원하는 ‘최근 백제사 연구의 제 문제’ 학술회의에서 이 같이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제31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라는 이름으로 백제학회가 개최했다.

윤 씨는 이날 노중국 전 계명대 교수에 이어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섰다. 주제는 '마한 제국 위치재론'으로 잡았다. 서기 3세기 중후반의 우리나라 상황을 발표했다. 서기240년대를 전후한 경기 이남의 상황을 그려나갔다. 그는 이 때 까지 소위 삼한시대였다고 전제했다. 근거는 중국 <삼국지>와 <후한서> <진서> 등 중국 사료였다. 그는 마한을 중심으로 당시 50여개 소국이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며 이들 작은 나라들이 어떻게 나열되어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했다.

▲ 윤용구씨는 이날 자신이 그의 밑에서 수학하기도 했다는 천관우씨가 비정한 마한 50여개국 위치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위 지도 왼쪽 상단을 보면 황해도 지역에 중국 위나라 식민통치기관, 대방군을 설정해 놓은 것이 보인다. 이러한 일제식민사관과 중화동북공정사관이 현재 우리나라 국사학을 담당하는 주류사학계의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먼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친일사학자) 이병도씨가 마한 소국 위치를 가장 먼저 위치시켰고 이어 그의 제자 천관우씨가 보완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 학설을 기준으로 해서 풀어나갔다.

그러나 비정 방법에서 천관우씨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며 다르게 비정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마한 소국들이 모두 내륙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비정한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 증거로 최근에 발굴되는 마한시대유적으로 규정된 것을 예로 들었다. 이 유적들은 기존 비정위치에 들어가지 않는 공백지대에서 나왔다고 비판했다. 기존에 비정된 마한 소국들 위치는 이런 유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럼 이 유적은 마한의 어느 소국이냐’고 따졌다. 또 소국 중 하나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비정되는 것을 덧붙여 꼬집었다. 처음에는 경기 가평이라고 했다가 파주라고 했다가 이제는 김포로 이동했다고 비꼬았다.

이어 이러한 주먹구구식 비정은 틀렸다고 전제하고, 마한 수십개국 숫자는 대방군이 교섭하면서 본 것을 <삼국지> 등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섭은 해안선을 따라 했다고 강조했다. 이 때 본 나라들을 기록한 것이 <삼국지> 등 중국사료에 나오는 마한 소국들 숫자라는 것이다.

▲고려대학 박현숙 교수가 이날 주제발표 사회를 맡았다. 그녀는 지난 서기2016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된 고대사시민강좌에 강사로 참여했다. 이 시민강좌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강좌라는 것이 본지 취재를 통해서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시 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왜나라도 <삼국지> 왜인전에는 30개국이 나온다면서 이것도 연안에서 본 숫자이고 사실은 더 많은 나라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30개국은 당시 위나라가 통교한 나라만 적은 것이라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나라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마한 소국들에 관해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왜 처럼 마한도 기존의 50여개국 보다 알려지지 않은 나라가 많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한 등 삼한 교통로 보다 왜로 가는 교통로가 더 활발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일본사를 높이고 우리역사는 낮게 보려는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이 뒤 따른다.

또 마한 50여국은 대국, 위나라 식민지 대방군에 무역과 교통을 통해서 발전해 나가는 나라라는 논조를 펼쳤다. 이 소국들이 대국, 위나라 대방군에 해안선을 따라서 조공하여 커져 갔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이어 낙랑군은 내륙교통로를 통해서 내륙 삼한 소국을 ‘관할’했다고 했다.

이 같은 윤 씨 주장은 낙랑군, 대방군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사실상 지배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기존의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보다 더 심한 주장이라는 지적이다. (대방군의) “동이경략”, “교역권 관장”, “담당”이라는 표현에서도 이 같은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또 “예성강 유역 대방분 남부경계와 가까운 임진강 및 한강 유역” 이라고 하여 대방군이 경기도 일대까지 내려와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 아래부터 마한 소국들이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조 위나라가 경기도 까지 지배했다는 말이다.

그는 또 중국 식민기관 낙랑군, 대방군은 우리나라 남부를 맡았고 현도군 등 다른 군들은 북부지역 고구려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또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예맥을 원산만과 강원도 북부에 있었다고 하며 여기까지 쳐들어 갔다고 했다.

또 윤 씨는 서기 3세기 중반까지도 백제, 신라,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제했다. 대신에 마한, 진한, 변한 등 촌락수준의 작은 나라들의 집합체만 있었다고 했다.

▲왼쪽 인천도시공사 윤용구씨, 오른쪽 박대제 고려대 교수가 주제발표가 끝나고 상호 토론중이다.

이는 모두 <삼국지> 등 중국사료만 신뢰한 결과다. 그는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일찍부터 중서부지역을 장악한 영역국가(강력한 왕국)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해당시기 중국사서인 <삼국지>에 따르면 백제는 마한의 50여 대소 제국가와 마찬 가지로 그 국명만 보일 뿐이며, <진서> 동이전에는 그 마저도 보인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발표 머리 부분에서 한 말이다. 그 만큼 확신한다는 얘기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은 믿을 수 없어 역사가 아니고 중국사료 기록이 역사라는 소리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는 백제, 신라, 가야가 엄연히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고 나온다. 일식과 자연현상을 전문으로 기록하는 국가기관이 존재할 만큼 강력한 고대국가였다고 한다. 일식기록 실현률이 당시 중국 측 기록보다 훨씬 높다고 세계적인 고천문학자, 박창범 교수가 이미 확고하게 증명한 바있다. <삼국사기>가 오히려 중국 사료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 씨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서울대학 국사학과 출신으로 박사 자격으로 이날 주제발표에 나섰다. 그는 이전에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주하는 역사관련 사업에 참여했다. 이때 북한에서 내놓은 이른바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다수’라는 목간이 낙랑군=평양을 증명한다는 책자를 공동제작한 바 있다.

동북아역사지도집에 어째서 북한을 중국 식민지로 그렸는지, 남한도 중국 반 식민지 내지는 고대판 조선총독부, 임나일본부가 들어오기 좋게 촌락수준의 작은 나라들로 그려 놓게 되었는지 윤용구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날 학술회의가 백제사에 관한 주제였다. 그러나 실상은 강단주류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또 우리나라 정사를 놔두고 중국사료만 인정함으로써 중화사관에 함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고려대 박대제 교수가 윤용구씨를 겨냥해 다시는 윤 씨와 학술주제발표 토론회를 하지 않겠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 이날 윤 씨 주제발표에 토론자로 고려대학교 박대제 사학교수가 나왔다. 그는 토론질문을 하기에 앞서 윤씨에게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주제발표와 상관없는 불만이었다. 그는 윤씨의 발표문을 이날 오전 10시나 되어서야 받아 볼수 있었다고 했다. 토론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미리 발표자 글을 보아야한다. 그런데 학술회의가 임박해서 주니 토론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토론에 들어가면 발표자에게 유리하여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폭발했다. 윤씨와 하는 학술발표에서 늘 반복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윤씨와 학술토론회는 하지 않겠다고 쏘아 부쳤다. 박 교수는 불만을 토로하는 내내 조용하고 웃음 띤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시는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백제학회 31회 정기학술회의 취재 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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