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 여왕 히미꼬

왜국의 여왕 히미코(임나일본부설은 불가능)

세르게이 정 / 북방고고인류학연구소 교수

 

3세기에 北九州에는 30여 소국이 있었다. 그리고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邪馬臺國(야마타이국)은 이 30개 소국으로 구성된 왜국의 종주국이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사료 가>

왜인은 대방군의 동남대해에 있다...... 대방군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해안을 따라가면 狗邪韓國(김해)에 이른다. 여기서 큰 바다를 건너면 対馬國(대마도)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면 一大國(이키섬)에 이른다. 다시 바다를 건너면 末盧國(마쯔라)에 도착한다. 여기서 육로로 동쪽으로 가면 伊都國(마에바루). 奴國(후쿠오카). 不弥國(위치불명). 投馬國(위치불명)에 이르고 이어서 여행의 목적지 邪馬臺國(위치불명)에 도착하게 된다...... 그 남쪽에는 남자 왕이 다스리는 狗奴國이 있는데 이 나라는 여왕의 왜국연합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마쯔라, 마에바루, 후쿠오카 등은 모두 北九州의 지명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180년경 왜국에 대란이 일어났는데 서로 싸우고 있던 소국들이 야마타이국의 무당이었던 10대 초의 소녀 히미코를 왕으로 共立함으로써 난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北九州에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하는 왜국연합이 성립한 것이다. 238년 중국의 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킴으로써 낙랑대방 2군이 魏에 속하게 되자 여왕 히미코는 대방군을 통하여 위의 수도 낙양에 사절을 파견했다. 魏의 황제는 이들을 환대했으며 여왕에게 ‘親爲倭王’이란 칭호를 仮授했다. 그런데 이 칭호는 당시 서역의 大國이었던 大月氏의 왕에게만 주었던 특별한 것이었다. 이것은 魏가 倭를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한 점도 있지만 사실은 촉. 오와 대립하고 있던 魏의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즉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열도가 九州의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양자강 남쪽의 會稽와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마타이국의 남쪽에는 야마타이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狗奴國이 있었다. 240년대 후반 히미코는 狗奴國과의 전쟁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13세에 여왕이 된 이요는 265년 西晉이 성립하자 266년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다.

▲ 가야무당, 히미꼬의 후예인 현재 일본의 무당 '미꼬'(사진풀이-오종홍)

일본서기편자들은 중국의 역사서를 읽고 일본에 히미코라는 여왕이 있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일본서기에 기술하면 일본의 왕이 중국왕조에 조공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왕을 중국의 천자에 비견한다는 방침 하에 저술된 이데올로기의 책이므로, 일본의 왕이 중국왕조에 조공했다는 기사는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히미코 대신 만들어진 것이 신공황후라는 가공인물이고 삼한정벌이라는 조작기사이다. 서기 편자들은 그 조작된 神功황후의 기사를 석우로, 미사흔의 이야기와 함께 히미코의 시대(240년경)에 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사에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부자가 등장하므로 현대의 역사가들은 神功황후의 紀年이 실제보다 120년 앞당겨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학자들은 에도시대부터 이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관하여 논쟁을 벌여왔다. 하나는 畿內지방(=近畿지방)에 있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北九州에 있었다는 설이다. 畿內지방 논자들은 邪馬臺(야마대)를 ‘야마타이’라고 읽지 않고 ‘야마토’라고 읽는다. 臺가 ‘토’로도 발음될 수 있으며 또 이 여왕국을 邪馬堆(야마퇴) 라고 표기한 중국의 역사서도 있기 때문이다. 양쪽 논자 모두 山門(야마토) 등 각지의 야마토 라는 지명을 내세우며 그곳이 야마타이국의 소재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야학자 古田武彦은 여왕국의 이름이 邪馬臺(야마대)가 아니라 邪馬壹(야마일)임을 고증을 통하여 입증하였다. 삼국지의 표기도 사실은 邪馬壹(야마일)이라는 것이다. 邪馬壹 대신 邪馬一로 표기한 중국역사서도 있다. 삼국지에는 여왕국 ‘야마’ 외에 또 하나의 ‘야마’라는 소국이 나온다. 古田武彦은 삼국지의 편자 진수가 그 나라와 구별하기 위하여 여왕국을 邪馬壹(야마일)이라고 표기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본의 첫 고대국가를 야마토(大和)정권이라고 하는데 이 야마토라는 명칭은 진수의 삼국지에 倭를 邪馬臺(야마토)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마토는 ‘야마’를 ‘야마토’로 잘못 알고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들은 후세에 倭(=邪馬臺)가 멸칭임을 알고 倭(와)를 동일한 발음의 佳字 和(와)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야마토를 大和 라고 하는 것은 大國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국지 왜인전에 大倭(여왕국의 관직명)라는 용어가 있어서 이 大倭를 大和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倭, 大倭, 大和는 표기는 달라도 모두 ‘야마토’라고 읽는다. (국명 ‘야마토’를 말할 때는 반드시 大和라고 표기한다. 和라고는 하지 않는다)

266년 여왕 이요의 西晉 조공을 마지막으로 일본은 약 150년 간 중국역사서에서 자취를 감춘다. 倭가 다시 중국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5세기 초의 이른바 ‘왜 5왕’의 하나인 讚 때부터이다. 그러므로 그 후 야마타이국이나 그와 대립했던 狗奴國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 畿內에서 어떻게 고대국가 야마토정권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일본학자들은 이 기간을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부른다.

일본학자들이 광개토왕비문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그러한 역사의 공백기에 왜가 한반도남부에 진출했다는 것을 증언해주는 생생한 역사기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야마타이국 畿內說 논자들은 야마타이국이 畿內 야마토정권의 前身이며 그 야마토정권은 이미 4세기 초에 九州를 통합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4세기 중반에는 한반도남부에 파병하여 백제. 가야. 신라를 제압하고 그곳을 지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역사서가 전하는 일본의 실정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왜왕 讚은 413년 동진에 조공하고 작위를 청구했지만 아무 작위도 수여받지 못했다. 동진정부는 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작위를 받는 것은 420년 동진이 송으로 바뀐 뒤 송의 무제(劉裕)가 새 국가수립을 자축하기 위하여 주변국의 왕들의 작위를 한 계급씩 승급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讚이 수여받은 작위는 ‘安東將軍倭國王’에 불과했다. 이것은 고구려는 물론 백제왕의 작위보다도 훨씬 낮은 등급이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신라의 무당들이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초기 지도자로 군림한다. 현재는 신라 화랑도의 후예인 '修驗道'와 일본무당인 '미꼬'가 한조가 되어 무업을 이어가고 있다. 위 사진 남자들은 일본신사의 '神職'이다. 그들이 쓴 검음 모자는 백제의 금동관의 변형이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일본무당 '미꼬'가 쓰고 있는 관도 현재 우리나라 남해안 별신굿에서 무당들이 쓰는 관의 변형이다(사진풀이-오종홍).

5세기에 ‘왜의 5왕’이 대를 이어 중국 南朝에 조공했다고 중국역사서는 전한다. 일본학자들은 왜왕 讚을 비롯한 이 5왕을 畿內 야마토정권의 천황들에게 比定하고 있다. 하지만 古田武彦은 중국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왜국은 九州지방이라고 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 ‘왜의 5왕’도 北九州에 있던 왜국의 왕이라는 것이다. 물론 야마타이국도 北九州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近畿지방의 일본(야마토정권)이 중국에 알려지는 것은 702년 일본의 견당사가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꿨다고 당의 조정에 보고했을 때의 일이다.

구당서 일본전은 그 때의 일을 전하면서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라고 기술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한 일본의 사신은 ‘倭는 이름이 우아하지 않기 때문에 국명을 日本으로 바꿨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신은 ‘일본은 원래 소국이었으나 왜국의 地를 병합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일본’이란 국명은 백제에서 붙여준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본열도에는 처음부터 近畿지방의 야마토정권만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열도는 北九州로부터 개화하기 시작했으며 소국이 처음 발생하는 것도 北九州인 것이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야마토정권의 천황 가운데 제10대 崇神천황(4세기 전후) 이전의 천황들은 모두 가공인물이며 崇神 이후에도 가공의 천황이 많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일본학계에는 ‘7세기 이전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재야학계에는 일본의 고대사에 관하여 수많은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古田武彦은 倭奴國(후쿠오카)의 뒤를 이은 왜국이 北九州에 있었으며 더욱이 이 왜국이 近畿지방의 야마토정권의 종주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본서기의 편자들은 北九州 왜국의 역사를 일부 盜用하여 그것을 마치 야마토정권의 역사인양 기술했다. 이 北九州의 왜국이 야마토정권에 흡수 통합되는 것은 663년의 백강전투의 패배 이후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원래 소국이었지만 왜국의 地를 병합했다’는 구당서의 기술을 그 근거로 들었다.

광개토왕비문 신묘년 조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대다수의 일본학자들은 ‘백제.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으로써 조공을 했었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이 해석은 당시의 일본열도 실상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파병은커녕 일본열도에는 국가다운 국가도 없었다고 본다. 3세기의 왜국은 巫女를 왕으로 삼는 미개한 나라였다.

▲일본무당인 '미꼬'가 춤을 추고 있다. 일본무당은 도제식으로 이어지고 있어, 우리나라의 강신무당들 처럼 접신상태에서 춤을 추지 않는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춤을 춘다. 그러나 저 무당들이 갖고 춤추는 무구인, 방울과 거기에 이어지는 끈은 현재 우리나라 무당들의 것과 같다. 상징적인 의미가 같다. 방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이고 그 끈은 신이 내리는 통로이다(사진풀이-오종홍).

5세기 초의 일본도 왜왕 讚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직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것이 중국에서 본 일본의 실태이다. 그런 일본이 한반도에 대군을 파병하여 백제. 가야. 신라를 쳐부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대서특필감일 텐데 일본서기는 이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 일본학자들은 한반도 파병 운운하기 전에 왜 일본서기에 그에 관한 기사가 없는지 그 이유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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