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구려신사 유래기

 

일본의 고구려신사 유래기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에 임나일본부설이란 것을 주장했다. 서기 369년 신공(神功)왕후가 신라를 공격해서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세워서 6세기 후반까지 2백여년 간 통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한론의 핵심으로서 일제의 한국 점령은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 고대로의 복구이자 회귀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맞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분국설을 주장했다. 김석형은 1963년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은 한국 내의 국가들이 아니라 이들 국가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한국에서는 이후 임나의 위치에 대해서 최재석 교수처럼 대마도로 보는 학설과 김문배 선생처럼 큐슈 등지로 보는 학설이 속속 발표되었다.

▲고려신사에 '고구려신사'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아직도 임나의 위치를 한반도 남부로 보는 식민사학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당시 두 나라의 관계를 보면 임나일본부설은 문헌으로나 고고학으로나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정치선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김석형과 최재석 교수 등은 그 증거의 하나로 일본 열도 내에 있는 무수한 한국계 지명들을 들고 있다. 실제로 일본 열도 내에는 고구려(고마)를 뜻하는 거마(巨麻), 소간(小間) 등의 지명과 백제(구다라)를 뜻하는 구태량(久太良), 구다량(久多良), 신라(시라기)를 뜻하는 신좌(新左), 백목(白木)과 가야(가라)를 뜻하는 가량(可良), 한(韓) 등의 지명이 숱하게 남아 있어서 분국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명뿐만 아니라 인명에도 남아 있는데, 얼마 전에 일본 드라마에서 백목(白木:시라기)라는 성을 쓰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신라계 후예의 성씨임이 분명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사이타마(埼玉)현에는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사이타마현 서남부에 있는 고려천(高麗川)이라는 강이다. 도쿄(東京)에서 전철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이 강 근처에 있는 역의 이름이 고마가와(高麗川)역이다. 그 주변에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있고, 국가 사적으로 고려촌석기시대 주거 유적(高麗村石器時代住居跡)이 있고, 고려가주택(高麗家住宅)도 있다. 또한 국도 299호에는 고려교(高麗橋)라는 다리도 있어서 온통 고려 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고려신사를 수호하는 장승-원래는 목제로 되어있었으나 훼손되어 화강암으로 다시 세웠다.

고려신사의 대표인 궁사(宮司) 고마 시즈오(高麗澄雄)와 그 아들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는 모두 고려를 성씨로 쓰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잣코)의 후예들이다. 고려신사는 사이타마현 히다카(日高)시에 있는데, 히다카시의 과거 이름은 고려군(高麗郡)이었다. 고려신사에서 발간한 󰡔고려신사의 창건 경위(高麗神社創建の経緯)󰡕에 따르면 현재의 시즈와카(静岡)현에 있던 스루가노국(駿河國:스루가노쿠니)에 살던 고구려 유민 1799인이 716년에 무장국(武藏國)으로 이주해서 고려군을 설치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초대 군사(郡司)는 약광이었는데, 󰡔일본서기󰡕 천지(天智)기에는 약광이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고마 가문은 현재도 「고려씨계도(高麗氏系圖)」라는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고마 후미야스는 약광의 60대 후손이다.

고려신사는 고려 왕족 약광을 제사지내는 사찰이다. JR 고려천역에서 보도로 약 20분, 신사입구의 장군표(將軍標)는 한국 내의 장승과 같은 형태다. 1992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에서 나무로 세웠다가 사고로 훼손되자 화강암으로 다시 세웠다. 고려역 광장에도 장승이 있는데, 이케부쿠로선(池袋線) 고려역에서는 도보로 약 45분 걸린다.

언제 도쿄에 오면 고려 선조들이 걸었던 옛길을 걸으면서 선조들의 감회에 젖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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