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고죽국이 아니라 고죽국이 고구려 강역의 일부

 

고구려가 고죽국이 아니라 고죽국이 고구려 강역의 일부

신완순 / 한울빛새움터 원장

 

설이나 추석 등 민족의 명절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우리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큰 명절을 지켜온 전통만큼 소외받고 가난한 이웃과 명절을 같이하였던 훈훈한 우리 조상들의 더불어 사는 지혜가 사라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움을 느낀다.

10여 년 전 방송국의 가요제에 ‘육각수’라는 젊은 듀엣이 출연하여 ‘흥보가 기가 막혀’라는 노래로 상을 받았으며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흥겨운 우리 가락과 노랫말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현대적인 감각의 리듬에 담아 남녀노소 누구나가 좋아했었으며 그 노래의 내용은 자못 풍자적이고 해학을 담고 있어 재미가 있었다.

먹여 살릴 자식은 많고 가난한 흥보가 형인 놀보집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쫓겨나는 과정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들으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그 가사 중에 ‘백이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이 엄동설한에…….’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춥고 배고픈 상황을 백이숙제(伯夷叔齊)와 비교를 하여 흥보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와 숙제

물론 수양산으로 간 백이숙제와 형에게 쫓겨난 흥보하고는 그 처지와 입장이 다르다. 유교국가 에서 살아왔던 우리는 의리와 충절의 상징으로 은(殷)나라 말기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던 백이와 숙제를 곧잘 인용을 한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한시외전(韓詩外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인용하여 쓴 것으로 추정이 되는 사마천의 <사기> 권61 < 백이열전>에는 백이숙제를 기술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를 차기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고 아버지가 죽게 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위하려고 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 하고 끝내 달아나 숨었으며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하며 달아나자 고죽국 사람들은 다른 아들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 후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아버지인 서백창(西伯昌)이 경륜이 있는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서백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서백이 죽고 무왕(武王)이 아버지를 받들어 문왕(文王)이라 칭하고 동쪽의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려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아버지가 죽어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으며 신하가 임금을 죽이려 하니 이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은나라 정벌의 불가함을 주장을 하였다.

이때 무왕의 측근들이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라 하며 붙들어 데려 가게 하였다. 후에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것을 보고 백이와 숙제는 이를 의롭지 않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 주나라의 녹봉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이상이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위 글을 보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장렬하게 선죽교에서 죽어간 고려시대 말기의 충신 정몽주가 생각이 난다. 백이와 숙제는 유교를 숭상하는 동양권의 나라에서 줄곧 충절과 의리의 상징으로 이야기되곤 했었다. 여기서 필자는 은나라의 신하로서 주나라의 녹봉을 마다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어간 백이와 숙제의 충절을 떠나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의 속국이었다는 고죽국의 왕자들이었고 그들이 죽은 곳이 수양산이라고 하는 것에 착안하여 우리 고대 역사의 고조선과의 연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고구려가 백이숙제의 '고죽국'이며 또한 기자를 봉한 곳?

고죽국이 우리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영양왕 시절에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려 하자 배구(裴矩)라는 사람이 수양제에게 올린 글에서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를 봉한 곳이었다.”라고 한 <수서(隋書)> 권67의 기록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가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기자가 살았던 지역이 단군조선의 강역이며 이를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신.구당서>의 배구열전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이를 인용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에도 똑같이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고죽국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대에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주해한 집해(集解)에서 고죽국은 요서(遼西)의 영지(令支)에 있으며 정의괄지지에 이르기를 고죽의 옛 성이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남10리에 있는데 은나라 때 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이다.”라고 하여 지금의 하북성 난하의 서쪽 부근에 고죽국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이를 인용한 많은 문헌들이 고죽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고죽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 서쪽에 있었다고 하면서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었다는 수양산의 위치는 고죽국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수양산의 위치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당연히 고죽국이 있는 지역이어야 함에도 전혀 엉뚱한 여러 곳에 수양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양산의 위치를 고찰한 중국의 여러 지리서들을 보면 크게 세 곳으로 비정이 되고 있다. 황하 동쪽의 산서성의 포판(蒲坂)이라는 설과 하남성 낙양(洛陽)이라는 설 그리고 위에서 말한 하북성 평주 부근이라는 설 등이 나뉘고 있는 실정이다.

<하북성 난하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고죽국 - 대청광여도>

이렇게 여러 가지 설로 나뉘고 있는 백이와 숙제의 고죽국과 수양산을 제대로 고찰하기 위해선 중국 상고대 하.은.주 3대의 역사와 강역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중국 상고대 하.은.주 3대의 역사와 강역을 고찰한 서적들을 보면 하.은.주 3대의 국가 강역은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 그리고 안휘성 일부와 산동성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황하를 넘어서 진출한 사례는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孟子)>를 주해한 <맹자주소(孟子注疏)>등을 보면 “하.은.주 삼대(三代)의 전성기에도 그 지경(地境)이 1000리를 넘지 못했으며(夏后殷周之盛地未有過千里者也), 제(齊)나라 땅은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 사방에까지 이르렀다.(而齊有其地矣鷄鳴狗吠相聞而達乎四境)”다고 하였다.

고죽국과 수양산의 위치는 황해도가 아닌 황하 부근에서 찾는 것이 타당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은.주 3대 이전시절부터 중국에는 천자가 있고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를 했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며 하.은.주의 강역이 1000리를 넘지 못하였다는 위의 기록은 중국 상고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재고시킬 수 있는 단서가 되며 백이와 숙제의 고죽국을 찾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주나라가 들어서고 강태공에게 봉지를 주었다는 제(齊)나라도 이쪽 끝에서 시작된 닭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저쪽 끝까지 들렸다면 나라가 아닌 조그마한 일개 고을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더욱이 백이와 숙제가 고죽국을 떠나 주나라 무왕을 찾아가 은나라 정벌의 불가함을 이야기했다면 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된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지역과 고죽국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고죽국과 수양산은 황하 부근에서 찾는 것이 타탕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대청광여도에 표시된 산서성 황하 동쪽의 수양산과 백이숙제묘>

따라서 고죽국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부근으로 비정을 함이 옳으며 수양산은 무왕의 등극이후에 피신을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산서성 포주(蒲州)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청나라 말기에 간행이 된 대청광여도에는 이곳에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묘를 표시하고 있고 하북성에는 고죽국을 표기하고 있다. 만약 중국의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고죽국이 하북성 평주 부근에 있었다면 어떻게 그 멀고 먼 산서성 황하 부근에 백이와 수제의 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동이족의 세력이 밀리면서 후대에 이식된 지명일 뿐이며 사실이 아니다. 이러함에도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이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수양산을 황해도 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은 앉아서 우리의 옛 역사 강역을 코도 안 풀고 내주는 꼴이며 중국의 중화주의 유학자들이 뱉은 침을 도로 삼키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은 같은 시기의 기자(箕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기자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밥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가서 굶어 죽은 것처럼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중화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의 평안도 평양지역을 조선으로 비정을 하고 이곳에서 기자가 산 것처럼 호도를 하고 있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의 칼럼에서 기자의 선조가 살았다는 기국(箕國)은 지금의 산서성 요주(遼州)부근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자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하남통지>, <대통일통지> 등의 문헌을 종합하여 보면 기자는 하남성 서화(西華)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서화에는 기자와 관련한 유적인 기자대(箕子臺)와 기자의 사당(箕子廟)이 있고 홍범당(洪範堂)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으며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조현(曹縣)에 실제로 기자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백이와 숙제 그리고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은나라의 신하

이를 토대로 보면 기자는 지금의 한반도의 평양이나 요녕성으로 간 것이 아니며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들어서자 주나라를 떠나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간 것이며 그 곳이 산동성 하남성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이와 숙제 그리고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은나라의 신하였으며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를 피해 대륙에 있던 단군조선에 예속이 된 것이다. 이는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수양산 그리고 기자가 살던 지역과 묘와 사당이 있는 지역을 살펴본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이 지역이 단군조선의 역사 강역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또한 기자가 조선에 전했다는 8조금법이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중국 하(夏)나라나 은(殷)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단군조선에 존재하였던 사상 체계를 정리한 것을 저들이 후대에 각색을 한 것에 불과하다. 대사상가이며 정치가인 기자를 숭모하고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나 그가 활동을 한 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다시 평가하고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왜곡된 상태로 잘못 비정된 지리 강역과 사상을 고집하는 것은 고사리를 캐먹고 죽을 또 다른 역사의 백이와 숙제를 낳게 될 것이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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