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과 반전연속이었다

 

글: 이병권(시민 기고가)

 

평범한 역사책조차도 금서로 만들어 처벌하던 군사독재정권 폭압세월을 넘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학문영역, 특히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장악한 동토 왕국 그대로다

서양 한 지성인이 쓴 <역사는 무엇인가>,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 서기1987년 서울대 고 박종철 학생 고문사건을 다룬 영화'1987'.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성을 알 수 있다. 고문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 식민통치문화 잔재로 지적된다.

1987년 1월 14일, 한 꽃다운 젊은이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물고문 중 숨졌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만행과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자 그 독재정권의 조종을 울린 6월 항쟁의 발화점이었습니다. 당시 캠퍼스에 몸담고 있던 필자는 또 한 번의 죽임 소식에 전율해야 했지만 이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정권의 폭력과 살인행위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비애감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군사독재에 의해 스러져간 젊은이들은 이미 부지기수였습니다. 정권에 대한 일체의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 시절, 대학생들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하던 독립지사들이 ‘불량선인’으로 몰려 잔악한 고문과 투옥에 시달렸듯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캠퍼스에서 쫓겨나고, 강제징집을 통해 사회와 분리시켰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강제징집’을 시위에 따른 구속 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기업합니다. 시위하다 구속되어 재판 받으면, 조사과정에서 구타당하고 고문도 받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신원만은 지인들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최전방 부대로 끌려간 학생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밤 낮 없는 구타와 학대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상당수의 대학생이 의문사로 처리되었고, 일부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른바 ‘녹화사업’ 이었지요. 악의 체제에 맞서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하는 모든 학생들은 바로 분노와 두려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 1987은 찬란한 저항의 시기였다

영화 <1987은 바로 그 짙은 어둠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그리고 그 극도의 어두움에 저항해 새벽을 이끌어 내는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1987년 1월 박종철의 죽음에서 6월 이한열의 죽음까지, 그 진실을 알게 된 모든 시민들은 더 아상 ‘야만’의 폭압에 숨죽일 수 없음을 알았기에 숨을 쉬기 위해 떨쳐 일어났던 것입니다. 영화 중 이한열의 말처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였던 것이지요. 영화는 지극히 처절하지만 평화적이기만 한 시위대 외침만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대학가와 시내 곳곳은 엄청난 전쟁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생들은 전경의 살인적 최루탄과 백골단의 곤봉에 맞서 짱돌을 들었고 화염병의 등장도 심심치 않았습니다. 대학가는 물론 시내 곳곳의 보도블록들은 남아 남지 않았습니다. 6월 항쟁 기간 중 서울 시내 곳곳에서 학생 시민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전경부 대들이 속출했지요. 6월 항쟁은 빌딩 위에서 꽃잎처럼 휘날린 휴지와 각 빌딩에서 내뿜은 소방호수의 물줄기뿐만 아니라 학생과 시민들의 육탄전이 얻어낸 전과 물이었습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앞 일대부터 남대문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까지 가득찬 시민들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외침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선연히 그려지는 것이 그 날의 그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1987>의 장엄한 시민혁명은 비록 직선제 개헌과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이후의 성과물을 내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던 프랑스 1932년 6월 혁명처럼 말입니다. 혁명의 대상이었던 ‘썩은 체제’의 전복 대신 ‘위장 세력’이 집권을 이어갔기 때문이죠. 이 미완의 아픔은 정확히 30년 후 이번에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평화적 ‘촛불혁명’으로 재 점화 되어 이번에는 ‘구악 적폐’의 심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정부가 과연 시민의 염원을 얼마나 담아갈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부패하고 무능하며 죄악으로 가득한 체제를 전복하고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를 염원하는 새로운 미래를 갈구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장엄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이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민주주의의 파괴자들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역사는 무엇이고 우리는 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 끊임없이 ‘民意’를 반영하는 민족

돌이켜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는 온갖 외세와 독재에 맞서 민의를 지키고 발현시키고자 열망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역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일본의 기관총 앞에서 10만 농민이 희생되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조선에는 더 이상 나라를 지킬 정치 집단도 무장조직도 소멸하여 무방비 국가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1919년 25년 만에 조선의 민중은 전국 각지에서 조국 해방을 위해 독립을 외쳤고 만주 무장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6년 후 비록 타율적 해방이었지만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 골몰했습니다.

그리고 15년 후 온 국민은 이승만 독재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또 20년 후엔 민주쟁취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민주주의의 염원을 드높였고 불과 7년 만에 군사독재정권의 장기독재를 막아냈습니다. 30년 스페인 프랑코정권, 20여년 칠레 피노체트 정권, 민정 이양 20년이 지나도록 군사독재의 구악을 해결 못하는 아르헨티나 등 수 많은 국가들이 이룩하지 못한 지구상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우리만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30년 이후, 해방 이후 이 땅을 지배했던 반공극우정부의 몰락을 전 국민의 촛불로 이루어 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도모할 기회를 쟁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역사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 고민을 역사가 E. H. Carr와 함께 하고자 합니다.

○ <변호인> 과 <역사는 무엇인가>

이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하나의 책과 관련되어 소개된 일이 있었습니다. 영화 <변호인>(2013)>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노무현 변호사 역으로 연기한 송강호가 당시(1980년) 부림 사건으로 재판 받던 학생이 소지했던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당국으로부터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죄목으로 거론되자, 이 책의 이적성 여부를 영국대사관에 의뢰하여 책의 저자인 E. H. Car는 공산주의와 전혀 무관하다는 답변을 받았음을 내용으로 검찰 측을 공박하는 내용 때문입니다.

위리가 이 책을 겉으로만 대강 훑어본다면, 왜 이 책이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용공서적으로 분류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역사교양서로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특히 이 인용 문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이외의 내용들이 회자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다소 읽기 난해한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진 맨 오른쪽이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이에이치,카( E. H. Carr). 그의 책은 오늘날에도 역사학자의 지침서로 활용되곤 한다.

○ 역사가는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는 E. H. Carr(Edward Halleat Carr, 1892-1982)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 강단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라는 제목으로 연속 강연한 것을 당해 연도 발간한 책입니다. 한국에는 1973년 탐구당에서 길현모 당시 서강대학교 서양사 교수가 처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자 길현모 교수는 당대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인물이었습니다. 유신치하에서도 비판정신을 잃지 않고 기회마다 교수들의 서명운동에 앞장섰고 해직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지성인으로 손꼽힙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암흑기 속에서 역사의 진보를 믿고 고뇌하는 지식인이 한국의 지성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이 책을 번역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Carr의 독특한 이력을 통해 그의 역사관을 이해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Carr의 지적 배경이 개방과 관용과 차이를 인정하고 그 객관적 차이를 인정하는 영국의 지식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세계의 수도이자 세계 문화의 용광로로 불리었던 당시 영국의 관용적 지적 수준 하에서 빛을 발휘했다고 보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대전 이전까지, 영국 런던은 전 세계에서 학문/사상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습니다.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쫓겨난 마르크스도 비로소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자본>을 비롯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냉전이 극한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영국이 숨 쉴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은 로마 몽고 등 대제국의 필수 미덕 요건입니다.

바로 그 다양성을 존중하는 그 용광로 안에서 새로운 사상과 지성의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다양성의 인정은 사실과 사료분석에서 객관성과 사실 간의 연관성을 드러내는데 매우 중요한 태도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역사가가 그 객관성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비극을 일본의 식민학자들한테서 볼 수 있습니다. 자국의 영광을 위해 동원되었던 그들은 오로지 정책목적을 위해 역사를 가공하고 뒤틀고 심지어 제작까지 서슴지 않았던 '공무원'이었습니다.

Carr는 바로 그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한 편견 없는 지성인이었다고 평가됩니다. 그의 역사 저서가 그렇습니다.

Carr는 189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등에서 공부하고 1917년 외무부에 들어가 20여 년간 외교관이자 정보 분석가로서 활약했습니다. 1936년부터는 웨일즈 대학에서 국제정치 관련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그 유명한 <The Times>의 부편집장을 역임했고, 1953년부터는 옥스퍼드 대학 교수를 거쳐, 1955년부터는 모교인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컬리지에 돌아가 역사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이력은 그가 학문과 현실에서 유럽의 정세를 관념이 아닌 현실의 사실을 통해 바라보며 가장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영국 외교부에서 소련 관련 기밀자료들을 장기간 분석하면서 현실 세계의 야누스적 진면목을 차갑게 인식할 수 있었고, 후일 그 바탕 위에 쓰인 역작이 바로 14권에 이르는 <소련사>라는 금자탑이었습니다.

둘째, E. H. Carr 는 ‘우상’의 혁파를 역사가가 지녀야 할 첫 번째 책무임을 강조합니다. 그 우상이란 20세기 중반까지도 역사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과 ‘주관’에 관한 오도된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Carr는 특히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휘몰아친 역사에 대한 회의, 냉소주의,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경계하고자 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과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성장 하에 진보적 낙관주의는 세계적인 지적흐름의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양차 대전과 유태인 대량학살 등 이해하기 힘든 일련의 세기 말적 참화는 기존의 직선적 낙관론에 심각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동서 냉전이 불러온 극단적 체제간의 대결 역시 인류의 앞날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부채질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인류는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인류 스스로가 종말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인가, 인간성은 발전하는가 등 숱한 의구심이 서구 지성사회를 뒤덮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회의론적 시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세계사적 흐름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할 역사가들에게 이러한 자조적 분위기는 현실 회피적이고 무책임한 ‘실증’에 귀결되거나, 현상적 ‘경험’에만 매몰되는 부작용 또한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장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실증주의’와 주관주의’의 문제는 결국 야만과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과 ‘판단‘에 관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비로소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조망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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