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규 교수, '고조선은 단군이 아니라 부여와 삼한이고 이는 족장, 군장사회였다'

 

이청규 영남대 교수,

서양민족개념과 서양고고학 관점으로 우리역사와 민족개념 칼질하다

문헌사학, 특히 한국고대사학회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듯하나,

여전히 눈치보는 주제발표로 일관하다

우리역사에서 단일국가는 고려가 처음이고,

이때서야 단일민족이 되었다고 하다

 

▲서기2017.11.03.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제41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가 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 관장의 축사 지원을 받는 가운데 열린 이날 전국대회는 문헌사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이 같은 몸부림이 무색해진다. 영남대학 이청규 교수가 첫 발제자로 나서 고고학으로 민족, 종족을 파악하고 고조선과 연결시켜려고 했다.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집단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국사책과 시민강좌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가 이미 밝힌바 있다. 서기2016. 서기2017. 두해에 걸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도한 이른바 ‘고대사시민강좌’류를 모두 취재, 분석해 본 결과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총 54회분 강연을 개최 측의 온갖 위협과 협박, 폭행을 무릅쓰고 동영상으로 담았고, 이를 심층분석 및 강사들에게 직접 질문해서 확인했다.

그런데 우리역사 왜곡, 말살에 힘 쓰고 있는 단체가 또 있다. 한국고고학회다. 이 단체는 지난 서기2016.10.08. 이화여대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연합학술대회를 개최했는데, 학국고대사학회와 보조를 같이 했다. 이 단체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한국고고학회가 서기2017.11.03.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41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를 가졌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전폭성 축사로 지지를 받은 가운데 이청규 영남대학, 고고학과 교수가 첫 강연자로 나섰다. 이 교수는 '고고학에서 본 민족, 종족의 형성과 고조선'으로 주제를 잡았다. 이 교수도 물론 위 연합학술대회에 참여했다.

▲ 이청규 영남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이 교수는 자신의 명확한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평을 받는다.

먼저 이 교수는 ‘민족’개념을 정의했다. 한국 역사학계가 그러하듯이 민족개념을 정의하는 데 서양이론을 끌어왔다. 서기19세기경 유럽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며 서양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따랐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민족의식은 이 시기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다. 민족이 없었다는 말과 통한다. 그는 이 때 나타난 민족주의를 부각시키며 민족주의는 처음에 자민족 중심민족주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기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가 대두 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것을 우리나라 민족주의와 연결시켜 결국 민족주의는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느낌을 방청객에게 주입시켰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미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노력들이 있어 왔지만, 독립국가 건설 후 오랜 세월을 지나온 역사적 공동체로써 민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는 그의 발언에서 이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견해를 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줄 곧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을 지극히 꺼려했다. 문헌사학 특히 한국고대사학회를 민감하게 의식해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그가 이날 발표한 내용물에 붙어 있는 인용주석을 보면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고대사학회 소속 인물들이 내놓은 연구물들이 수시로 인용되고 있다.

이는 이날 학술대회 취지를 무색케 한다. 그동안 고고학계가 문헌사학계의 종속, 보조학문이라 인식이 팽배해온 것이 사실이다. 문헌사학이 방향을 제시해 주면 고고학은 거기에 맞게 유물을 해석한다. 대표사례가 서울 풍남토성 유물 연대측정 번복사건이다. 백제유적으로 보았는데 첫 측정치는 서기전 까지 훨씬 올라갔다. 그런데 이 같은 결과를 뒤집는 측정을 다시 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조선총독부 일제 관학자, 쯔다소키치(津田左右吉)가 우리역사 말살하기 위해 내놓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짜맞추기 위해서 시기를 대폭내렸다는 맹비난을 받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는 한국고고학이 문헌역사학의 종, 부속학문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차별화를 하겠다고 판을 크게 벌였다.

그런데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만 정인성 영남대학 문화인류학 교수가 위만조선 왕검성 위치를 한국고대사학회와는 다르게 평양이 아닌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정 교수는 중국 1차사료가 말하듯이 하북성이나 요서 지역이 아닌 요동반도 근처로 추정했다. 역사진실과 한참 먼 해석이었다.

이 교수는 이어 민족이라는 것이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서양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의 'nation'을 썼는데 일본이 번역하면서 ‘국가’ 가 아닌 ‘민족’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근대국가형성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이 서기19세기 말에 다룬 것은 민족이 아니라 근대국가형성을 다룬 것이 된다. 근대국가가 서기19세기 이전에는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기19세기 정도가 되어야 세계 각국에서 자기나라를 근대국가라고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은 민족으로 번역했고 우리학계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득한 상고시대에도 민족이 있었다고 하면 터무니 없다며 펄쩍뛰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 연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고대사학회나 한국고고학회가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위 사진에서 맨 오른쪽 물건이 소위 나팔형 청동기다. 이 유물도 요서에서 부터 우리나라 남부에서도 발견된다. 그럼에도 이날 이 교수는 이 지역들을 단일 문화권으로 보려고 하지않았다.

이날 이 교수도 이런 관점을 갖고 있어서 인지 우리민족 형성시기를 최대한 늦게 잡고자 하는 것이 역력했다. 이 점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민족 이외에 종족을 설정하고 역시 한국고대사학회의 막후실력자로 알려진 전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의 이론을 끌어왔다. 이어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민족형성을 상고대시기로 끌어 올리려는 북한 학계를 깎아 내렸다.

그러면서 민족에 터 잡은 단일국가가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시기로 봤다. 그는 “대체적으로 우리 민족역사상 단일국가 체제는 고려 때 비로소 정립되었는 바,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 국가론도 이에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가 동포니 남북한 민족공조와 민족번영을 추구하자고 할 때의 민족이 고려시대에나 와서 생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낸 식민사관을 그대로 대변했다. 그는 “이와 맞물려 고려시대 역사서에 단군을 시조로 한 고조선 건국 신화가 기록되는데, 이는 민족의식을 부각(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이라고 주장했다. 주석을 보면 송호정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의 책이 인용되고 있다. 송 교수는 단군을 역사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책 이름도 <단군, 만들어진 신화>다. 이 교수가 이 책을 근거로 자신 생각도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신념이라는 듯이 “이들을 단일 민족으로 통합한 것은 고려 중세국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된 셈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의 이 주장에 따르면 단군은 역사가 아니고, 신화에 불과하며 단군기원인 서기전2333년은 더욱더 있을 수 없는 허구가 된다. 일제는 고려시대 일연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당시 몽골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군신화'를 창작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날 이 교수가 이 것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 목이 긴 토기가 대륙과 우리나라 땅에서도 똑 같이 출토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교수는 같은 민족이 만든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단군 조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포석으로 보였다.

이러한 흐름은 이날 그가 발표한 주제 전반에 걸쳐 묻어났다. 그는 “그중 상위에 속하는 ‘국’의 우두머리 명칭을 따라서 군장사회라 하면서, 서기전3~2세기 남한에서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목관묘 집단에 대응시킨 사례가 있는바 이에 따르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고려대 전 교수 김정배씨 견해를 따른 것이다. 서기전 3~2세기에도 우리나라는 나라가 없었고 촌락사회가 여러 개 모여있는 수준의 군장사회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시기 중국에서는 거대한 제국, 진나라나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하고 멸망시키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중화사관, 곧 동북공정사관을 충실히 따르며 이날 강연을 한 것이다. 중국입장에서 우리역사를 풀어나간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역사를 쪼개고 분리하고 찢어내는 관점을 유지했다. 그는 민족을 파악하는데 고고학 자료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고고자료의 같은 점을 찾아 민족을 파악하지 않았다. 다른점에 주목했다.

고인돌에서 이 같은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요동과 서북한 고인돌이 탁자식으로 같다면서도 거기에 나오는 토기가 다르다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면서 요동과 서북한 지역 사람들은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서북한 고인돌은 뚜껑 길이만 10미터가 넘는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고인돌을 국가규모에서 축조한 것이 아닌 부족수준에 머문 집단이 만든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이 시기에도 아직 민족이나 종족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대규모 고인돌군이 우리나라 전체는 물론 남만주 일대에 널려 있다. 이것도 이 교수 눈에는 다 다른 종족이 세운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이어 “문제는 물질적 자료 상이성 여부를 따져서 곧 바로 그것을 민족 구성원, 동족의 잣대로 삼기 어렵다” 면서 “일정 수준의 물질문화가 같더라도 반드시 같은 종족, 민족이라고 할 수 없을 주의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주장해 놓고 뒤이어 뒤집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다르다고 해서 다른 종족, 민족이라고 할 수 없음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발언은 강연 내내 되풀이했다.

이런 행태는 이 교수의 본심은 민족형성시기를 아주 이른 시기로 잡고 싶은데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문헌사학을 의식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고뇌는‘고조선’ 강역과 관련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요하 건너 조양지역의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고조선 유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지역도 고조선 강역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문헌사학에서는 고조선 요동설 입장을 취한다면서 눈치를 봤다.

그는 “하가점 상층문화와 십이대영자문화는 구분해야 한다. 십이대영자문화는 적어도 예맥과 관련해서 다룬다. 예맥을 대표하는 정치체라면 역시 또 고조선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지 않 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고조선 요동설 입장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명칭이어떻든 간에, 후대 중국학자들이 어떻게 불렀던 간에 요서 십이대영자는 고조선과 어떻든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청동기 토기문화의 집단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주장은 한국고대사학회에 반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 이 교수가 발표한 내용전반을 보면 한국고대사학회의 그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주장에서도 나타난다. 이 교수는 이날 하가점상층문화를 산융이나 동호 것으로 보았다. 하가점상층문화지는 이 교수가 고조선 것으로 보는 십이대영자문화하고 바로 인접해 있다. 같은 유물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날 다뉴경 등 차이점만 강조해서 전혀 다른 사람들 문화라는 주장을 펼쳤다. 산융, 동호론은 단군을 부정하는 한국고대사학회, 송호정 교수가 주장하는 것이다.

▲ 다뉴경으로 알려진 청동거울이다. 분포도를 보면 요서 지역에서 부터 만주-우리나라-일본열도가지 퍼져있다. 청동거울은 무당이 굿을 할 때 쓰는 무구였다. 지역 특색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투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날 이 교수는 각자 다른 정치체와 다른 종족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청동거울 분포는 오히려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신시배달국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근거도 된다. 고조선기에는 한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올 때 천부인3개를 가져왔다고 한다. 천부인 3개 중에 거울, 곧 청동거울이 있다는 것은 민속학계에서는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오히려 단군조선 생기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저 지역에 분권 된 신시라는 단일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이날 이 교수는 2만 년 전의 좁날석기를 기준으로 동시베리아-만주-한땅(한반도)-제주도에 이르까지 한 문화권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에도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와서는 이 지역들이 각기 다른 문화로 진행된 것처럼 끌어갔다. 한국고대사학회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고인돌, 비파형 청동검, 세형 동검, 청동거울, 같은 류의 토기들이 요서-요동-만주-한땅-일본에 이르기 까지 고루 분포된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 교수는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어 각 지역에 다른 정치체가 난립한 것으로 해석했다. 또 요동과 일본열도까지 분포되어 있는 번개무늬 다뉴경이 공통 제의권을 나타낸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고조선 권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고조선’의 실상인 단군조선이라는 단일체 나라가 아예 없는 것처럼 다루었다. 대신에 중국사료에 따라 기준의 고조선, 위만 고조선, 삼한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것도 서기전 10세기를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취급했다.

이날 점심시간에 이 교수에게 “이 학술대회에서 말하는 고조선이 단군조선인지 기자조선인지 위만조선인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질문의도를 간파하고 일부러 안한 것으로 보였다. 이날 학술대회는 전국에서 모인 고고학 전공자와 학자들이 몰려들어 수백석의 행사장을 꽉 채웠다. 여기에는 앞으로 고고학을 업을 삼아 인생행로를 정하고 자 하는 학부생,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이날 자신의 선생과 스승들의 이 주장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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