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남당 박창화 학술회의, 남당을 편협한 민족주주의 사학자로 몰다

 

남당 박창화, 일제강점기 일본 국내성 도서료에서

조선전고 사무촉탁으로 근무한 사실 복수로 확인되다

고려대 조형열 연구교수, 고려대 남당 학술대회서

남당을 '이상향을 재현하려는 낭만적 민족주주의자'로 매도하다

 

▲서기2017.10.20. 조형열 연구교수가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주최한 '남당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날 고려대 비케이21플러스 한국사사업단 연구교수 자격으로 나왔다. 그는 이날 남당 박창화 선생을 '팽창주의에 입각한 낭만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학자로 깎아 내렸다.

남당 박창화(이하 남당)는 누구인가. 남당(서기1889~서기1962.)은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한문과 중국 사서에 능통한 천재로 알려졌다. 당대 유학자들의 수하에서 배우면서 유학과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여러 학교의 교사로 활동했고, 일본에 건너가서는 20여년간 활동했다. 일본 국내성 일왕실도서관인 '도서료'에서는 조선전고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다. 이때 신라 김대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화랑세기를 발견하고 필사해서 해방 직전에 국내로 가져왔다. 이후 계속 교사생활을 하면서 집필활동을 하다 서기1962년에 생을 마친다.

남당은 역사학 관련자들 사이에서는 생소한 인물은 아니다. 민족사학계와 강단주류사학계에 상당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남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민족사학계에서는 남당은 민족사를 바르게 복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역사침략에 맞서 투쟁한 인물이다. 그러나 강단주류사학계에게는 남당은 조선총독부, 일본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우리역사를 부풀린 민족주의 사학자에 불과하다. 그것도 근대 역사학 방법론을 익히지 못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제, 고려대 사학과 교수) 주최로 ‘남당 박창화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고려대학 비케이21플러스 한국사업단 조형열 연구교수는 남당의 학문일생을 다루었다. 그는 남당의 역사학 전반을 조명했다. 남당 역사관이 고증학과 일본 국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했다. 고증학은 남당이 유학교육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일본 국학 영향받은 것은 남당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 사학잡지에 기고하고, 일왕실도서관에 촉탁으로 근무한 것에서 찾았다.

▲단기4283(서기1950년대). 충북교육청 퇴임자명단에 나오는 남당 박창화 선생 사진과 근무기록. 이 기록 이력에도 일본 궁내성에 근무했다고 나온다(사진: 역사스페셜1999.07.10.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갈무리).

이 같은 흐름속에서 이날 조 교수는 남당을 깎아 내리기에 바빴다. 남당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 국내성 도서료에서 20여년 동안 근무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극우 황국사관 사학잡지인 중앙사단에 기고를 했다는 점을 근거로 일본 국학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조 교수는 이때 남당의 편협한 민족주의 사학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추정했다. 그는 남당이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직접적인 대결과 극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에 남당이 팽창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강단주류사학계가 일제역사침략에 맞서 역사전쟁을 벌인 광복투사들을 일제나 나치와 같은 국수주의 사학자로 몰 듯이 남당도 역시 이런 범주에 가두려는 시도를 조 교수도 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남당이 “이른바 모화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팽창적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다고 비난했다. 남당이 사료에 근거해 바른 역사를 회복하고 자한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남당이 소중화 조선이 남긴 “각종 서책과 유물이 위조되었다”고 했다며 이를 역사발전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몰아 부쳤다.

▲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남당 박창화의 다른 모습을 한 사진도 공개되었다. 이 사진을 띄운 조 교수는 남당기념사업회에서 제공해 주었다고 전했다. 의관을 보면 남당은 유학자 집안 후손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남당 집안이 유학을 숭상하는 명망가였다는 것을 거론하며, 서기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봉기 중에 동학도에게 야간 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부각시켰다. 이는 동학도의 습격을 받을 만큼 남당집안이 불의한 집안이라는 것을 방청객에게 각인 시키고자 한 것으로 지적된다. 또 남당을 대종교 영향을 받은 인물과 연결시켰다. 이는 대종교라는 민족주의 종교와 관련 있다고 함으로써, 남당 역사학이 근대역사학이 아닌 일제와 같은 국수주의 황국사관과 같은 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지적이다.

그가 남당과 연결한 인물은 국어 학자이자, 역사가로 알려진 권덕규다. 조 교수는 권덕규가 “대종교 영향을 받아 광활한 고대 강역을 증명 및 단군-부여-고구려-발해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쏟은” 인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교수는 남당 유학 지식도 부정하게 취급했다. 그는 “박창화에게는 유학의 기본원리가 강조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박창화의 경우 유학 자체에 대한 관심사는 높지 않았다” 며 남당을 깎아내렸다. 그러면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데, 박창화는 유학 공부를 했지만 유학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여 남당지식을 수박 겉핥기식 수준으로 폄하했다.

또 남당이 일제가 우리 외교권을 박탈 후 설치한 통감부 체제하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근무한 것도 문제 삼았다. 이 학교 교사자리는 “식민지 교육정책을 최일선에서 수행해야 하는 자리” 이었다면서 “박창화는 내면에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행동하거나 실천하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매도했다.

또 남당이 일본에서 20여 동안 생활한 것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일본 국내성 도서료 활동목적을 부각시켰는데 이 기관이 ‘천황가를 위한 사료 보관, 편찬이었다'고 운을 뗐다. 남당이 이 도서료에서 근무했고, 이 기간 남당이 만난 일본인들이 천황제를 옹호하는 데 앞장선 국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당이 이 기간 이런 일제황국사관 국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이들을 닮아 갔다고 추정했다.

조 교수의 이런 주장을 듣고 있으면 남당은 친일사학자이다. 아니면 일본제국주의 역사학을 이어받아 조선식 제국주의에 터 잡은 민족주의 사학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날 조 교수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남당은 친일부역인사에 가깝다. 또 극단에 치우친 민족주의 사학자로 보인다. 따라서 조 교수에 의하면 남당은 '화려하고 광대한' 민족사에 매몰되어 역사사실과 다른 부풀린 민족사를 만들어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 문화체육관광부, 최광식 전 고려대학교 교수(좌)와 전 서강대학교 총장, 이종욱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우)가 반갑게 악수로 인사하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화랑세기 진서론자와 창작론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는 평이다.

그러나 남당의 실체는 조 교수의 주장과는 많이 다르다.

해방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남당과 같이 근무한 최기철(서기1999.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90세) 박사의 증언을 보면 남당의 실체가 확인된다. 해방 후 당시 최기철 박사는 36세로 교장하고 있었고 남당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박사는 서기1999.07.10.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당시 남당과 나눈 일화를 쏟아냈다.

“(남당이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독립운동이라도 해보려고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대요. 그런데 일본관헌한테 붙잡혔대요. 독립운동을 한다면 치고 받고 야단났는데 정중히 모시더래요. (일본관원이 남당에게)선생님은 소원이 뭡니까, 이러니까 역사공부라고 그래서 (일본관헌이)이젠 그러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실컷 할 수 있도록 그런 장소로 안내를 할 테니까, 안심하십시오 해서 간곳이 황실도서관이래요.”

▲최기철 박사가 서기1999.07.10. 한국방송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여 남당이 한 말을 증언하고 있다.

최기철 박사에 의하면 남당은 독립 투쟁하는 항일투사다. 이 같은 최기철 박사의 증언은 서기1998년 발행된 민족사학지 <한배달>에 실린 글에서도 확인된다. 이 지면에서도 최 박사는 같은 말을 진술하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조영철 연구교수는 발표지 주석에 이 같은 사실을 달아 놓았다. 이는 앞서 조 교수가 주장한 남당의 인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한편 남당이 정말 당시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느냐를 가지고 이날 학술대회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 학술대회를 개최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소장, 박대재 고려대 사학과 교수의 개회사에서 이런 분위기가 엿보였다. 박 소장이 인사말 중간에 “남당이 일본에서 귀국한 시점조차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고 한 발언이다. 이는 일본에 체류해서 국내성 도서료에 근무했는지에 대한 불신으로 까지 번질 수 있는 주장이라는 평이다.

▲ 이날 학술대회를 개최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대재 교수가 기자의 물음에 답변하고있다. 이날 기자는 남당 박창화 선생은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풍, 특히 박 교수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고대사학회와 반대되는 역사관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학술대회를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박 교수는 학문의 다양성 차원에서 열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학회 전반 분위기는 이미 밝혀진 바 대로 남당이 남긴 문헌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남당이 국내성 도서료에 근무한 자료를 확인했다. 또 이날 학술대회에서 조 교수도 같은 일본국회도서관 <궁내성직원록宮內省職員錄>자료에서 확인된다고 밝혔다. 한국방송에서 확인한 남당은 처음에는 박창화朴昌和로 이름을 쓰다가 서기1941년에는 소원창화小原昌和로 쓰고 있다. 이는 일제 막바지에 일선동조론과 황국신민화 정책에 광분하면서 추진한 창씨개명 정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 사무촉탁 월급으로 85엔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남당은 해방 후 자신이 국내성 도서료에서 근무할 때 본 우리 고대 사서를 잊지 못한 사실도 밝혀졌다. 남당은 정부 관계자에게 일본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무시되거나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목록을 적어 보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이날 발제자로 나선 조 연구교수도 인정했다. 남당은 당시 자신이 근무했던 청부사범학교 교장, 최기철 박사를 통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신석호 국장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일본 국내성에 소장된 조선 고자료를 가지고 오겠으니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 임량재 전 중앙대 교수가 서기1999.07.10.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남당이 남긴 말을 증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화랑은 '바람둥이'이로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 남당이 바로 잡아 주었다고 했다. 임량재 전 교수는 청주사범학교에서 남당의 제자였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남당을 가정교사로 모셨던 김준웅씨에게 서도 확인된다. 김준웅씨는 서기1999.07.10.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더 자세한 증언을 했다. 그의 증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왕립도서관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거기에 22년 동안 있으면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면서 거기에 있었는데, 그리고 그 서적들이라는 것은 한국에서 훔쳐간 것인데 또 그것도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 이거에요. 그런 식으로 자기네 책이라고 하고 앉아 있는데, 그걸 (아무나 가서 보여 달라고 하면)알려 주겠느냐는 거죠. 그런데 자기는 거기서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에 어떻게 몇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여기서 간다고 해서 그걸 주겠냐 말이야.”

한국방송이 서기1999.07.에 현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가서 화랑세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서릉부측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에 소중화 조선시대 문헌자료 목록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국 고서들은 아마도 미공개 목록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왕실도서관 이름이 원래는 ‘도서료 圖書寮’라고 했는데 현재는 ‘서릉부書陵部’로 바뀌어 있었다. 또 궁내성이 궁내청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남당이 주장한 우리 고서가 현재 일본 ‘궁내청 서릉부’ 지하서고에 보관되어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남당이 말하는 고서는 소중화 조선시기 발간한 문헌이 물론 아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상고대사를 기록한 우리 역사서일 것이다.

▲ 남당을 가정교사로 모셨던 김준웅씨가 서기1999.07.10.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남당이 한 말을 증언하고 있다. 남당이 '일본 궁내성 일왕실도서관에 일본이 훔쳐간 우리 고사서들이 많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국방송은 당시 역사스페셜을 방영하면서 일왕실도서관 지하서고를 보여주었다. 마치 동굴처럼 어둠으로 가득했고 불을 켜도 어두웠다. 거기에는 알수없는 크고 작은 상자와 문이 달린 일종의 ‘케비넷’ 같은 것이 잠겨진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결론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 고사서들이 남당에 의하면 일본이 불법으로 훔쳐갔다는 사실이다.

이조선왕조실록도 불법으로 탈취해 갔다가 돌려준 사실이 있다. 또한 조선 초대 통감,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나 초대 총독, 데라우치마사다케(寺内正毅) 등이 우리 고사서들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한 사례도 밝혀지고 있다. 데라우치처럼 별도로 그의 이름을 따서 문고형식(寺内文庫)으로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또 이날 학술대회를 주최한 고려대 사학과 같은 강단주류사학이 위서로 모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핵심사료로 인용되는 <조대기朝代記>도 현재 일본 궁내청 정창원正倉院에 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왕실도서관, 서릉부 지하서고에 우리상고대사를 증언하는 사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서기1999.07.10.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서는 일본 궁내청 서릉부, 일왕실도서관 지하서고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 중앙 하단에는 일본 고대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만엽집'이라고 써져 있는 육중한 상자가 보인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동원해 우리역사를 일본제국 지방사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먼저 우리 상고대사를 잘 알지 않고 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료들을 저들이 보유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향후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국가주요정책으로 다루어 사료 문화재 반환추진에 나서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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